13화.
“잠시 나 좀 보자꾸나.”
“군주마마가 아니시옵니까?”
“그 약은 내가 세자부로 돌아가는 길에 전할 테니, 너는 기왕 출궁하는 김에 사가나 들렀다가 돌아가거라.”
“하지만…….”
“너만 입을 다물면 아무도 모를 테니 염려 말거라.”
연주가 시녀에게 눈짓하자, 시녀는 망설이는 궁녀를 향해 주머니에서 금편을 꺼내 건넸다.
쌀알 같은 금 조각이 손바닥 위를 구르자,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했던 궁녀는 이내 환히 웃으며 연주에게 약첩을 건넸다.
“그럼 부탁드리옵니다, 군주마마.”
“그래. 염려 말고 어서 가거라.”
궁녀가 궁에서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연주는 재빨리 마차에 올랐다.
목적지는 당연히 연왕부였다.
“정말 괜찮으시겠사옵니까?”
“괜찮지 않을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정작 차창 밖을 내다보는 연주의 표정은 근심으로 가득했다.
‘내가 쓸데없는 일을 하는 게 아닐까. 아니야, 그래도…….’
지금 정엽은 그 자신뿐만 아니라 황후, 나아가 교씨 가문에까지 폐를 끼치고 있었다.
‘혹여 잘못된 것이 있다면 바로잡아야지. 이대로 두면 황후마마의 부탁을 받고 내 입궁을 추진한 오라버니나, 공주의 스승으로 궁에 드나드는 나까지 곤란에 처하고 말 거야.’
애써 생각을 합리화하는 동안 마차는 연왕부에 다다랐다. 그런데 막상 도착한 연왕부는 이리로 오는 동안 갑자기 흐려진 하늘만큼이나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자네, 어찌 대문 앞에 서 있는가?”
연주는 초조한 얼굴로 붉은 대문 앞을 서성이는 양해를 발견하고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아, 왕비마마!”
연주를 발견하고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반가워하기도 잠시, 양해는 안절부절못하며 사정을 고하기 시작했다.
“전하께서 사흘 전 밤에 홀로 출타하신 뒤 지금까지 돌아오시지 않고 있사옵니다.”
“뭐라?”
이런 낭패가 있나.
잠시 당황하던 연주가 정신 사납게 손바닥을 비비대는 양해를 붙들어 세웠다.
“전하께서 어디로 간다는 말씀은 없으셨는가?”
“예, 마마. 며칠 동안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으시고 술만 드시다가 홀로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셨사옵니다.”
“부관조차 대동하지 않으셨다는 말인가?”
“예, 야심한 밤에 술에 취해 말에 오르셨으니 혹시 무슨 변이라도 당하시어 여태 돌아오지 못하시는 건 아닌지 걱정이옵니다.”
“이런…….”
장성한 사내가 집 밖을 좀 돌아다닌다고 무슨 일이 생기겠느냐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연주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다.
건장한 사내도 낙마 한 번에 평생 불구가 되거나 목숨을 잃는 일이 다반사였다. 게다가 불사왕이라고 불리는 정엽이라도 만취 상태로 길을 나섰다면 얘기가 다르지 않은가.
“전하께서 가실 만한 곳은 모두 찾아본 것이냐?”
“그렇사옵니다. 어제부터 궁인들과 왕부의 사병들이 뿔뿔이 흩어져 전하를 찾아다니고 있지만 여태 감감무소식이옵니다.”
땅으로 꺼졌는가. 하늘로 솟았는가.
갑자기 종적을 감춰 버린 정엽 때문에 긴장으로 꽉 메어 오는 가슴을 부여잡은 연주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왕부와 황궁을 제외하고 전하께서 가장 오래 머무시던 곳이 어디냐?”
“글쎄요. 어리실 때를 제외하면 조양에 머무시는 날이 많지는 않으셨기에…….”
“어릴 때 자주 가시던 곳이라도 좋으니 우선 생각나는 대로 말해 보아라.”
우물쭈물하던 양해가 연주의 눈치를 살피며 대답했다.
“전하께서 가실 만한 곳이……. 세자부가 아니면 향산에 있는 별궁일 것이옵니다.”
향산? 거기다!
세자부에는 벗이 있지만 보기 싫은 사람도 함께 있을 터. 정엽이 인적 드문 향산 별궁으로 숨어 버렸을 거라 판단한 연주가 마부를 재촉해 별궁으로 출발했다.
사람이 다쳤을지도 모른다는데 옛일이 다 뭔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연주의 머릿속은 온갖 불운한 일들로 가득 찼다.
혹시 만취한 채로 산길을 오르다 산비탈을 구른 것은 아닐까. 양해의 말대로 낙마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후드득, 후드득.
연주의 마음을 대변하듯 기어코 먹구름이 짙게 낀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전하, 어디 계십니까. 전하!”
연주를 따라 산 입구에 도착한 궁인과 사병들은 별궁으로 향하는 산길과 그 주변을 이 잡듯 수색했다.
하지만 정엽의 흔적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고, 그들은 완전히 날이 저문 후에야 별궁이 있는 산 중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혹 연왕 전하께서 이곳에 오지 않으셨는가?”
“여기 향산 별궁은 황족의 걸음이 끊긴 지 한참 되었사옵니다. 사람보다 산짐승이 더 자주 별궁을 찾는데 무슨 말씀을 드리겠사옵니까.”
오밤중에 소식을 듣고 황망하게 뛰쳐나온 별궁의 관리인이 연주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이를 어찌한다.”
설마 향산 전체를 샅샅이 뒤져야 하는 건가? 그러려면 황궁에 소식을 알려 근위병을 동원해야 할 텐데…….
한참을 고민하던 연주가 고개를 저었다. 섣불리 정엽의 실종 사실을 전했다간 황후가 염려하던 대로 친왕 책봉이 물 건너갈 수도 있었다.
“마마, 어쩌지요?”
“오늘 하루만 더 지켜보는 것이 좋겠다.”
“하지만 이리 비가 쏟아지는데…….”
양해가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세차게 쏟아붓는 가을비를 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날씨가 궂어 걱정이긴 하지만 전하께서는 북방에서 오랜 세월을 보낸 분이시다. 큰일이야 있겠느냐.”
“정말 괜찮을까요?”
“그럼. 숱한 전쟁에서도 반드시 살아 돌아오시던 분이지 않으냐. 내 오라비와 상의해 내일 황실에 소식을 알려도 늦지 않을 것이다.”
“하오면 소인은 사병들과 함께 전하를 좀 더 찾아보고 돌아가겠사옵니다. 마마께선 먼저 산에서 내려가시지요.”
연주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주인을 향한 걱정을 내려놓지 못한 양해가 사병을 이끌고 산속으로 사라졌다.
결국 연주는 종일 정엽을 찾아 헤매느라 지친 몸을 이끌고 세자부로 돌아왔다. 정엽에게 사고가 생겼을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불안한 예감이 가시지 않았다.
그렇게 후원을 가로질러 처소인 별당으로 향하던 찰나, 낯선 그림자를 발견한 연주의 발걸음이 멈췄다.
“오라버니?”
한적한 후원. 오라비 신이 솔향기 가득한 정자에서 누군가와 술상을 낀 채 술잔을 주고받고 있었다.
“빗방울도 떨어지는데 왜 이렇게 늦었느냐?”
“아, 그게…….”
아직은 정엽이 사라졌다는 이야길 털어놓을 때가 아니라 판단한 연주가 둘러댈 핑계를 찾기 위해 말끝을 흐렸다.
그사이 오라비 신과 동석한 사내는 고개를 돌려 이쪽을 빤히 바라보았다.
설마…….
이내 낯익은 얼굴이 연주의 눈동자에 들어차고, 사내의 정체를 확인한 연주의 눈이 커졌다.
“당신, 당신이 왜 여기…….”
몇 걸음만 가면 닿을 거리. 오라비와 마주 앉은 정엽을 발견한 연주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가까운 곳에 뻗은 꽃가지를 쥔 채 비틀거렸다.
당혹감과 안도감이 교차하는 연주의 모습을 지켜보던 정엽이 순식간에 연주의 허리를 받아 안았다.
“왜, 아니…….”
다행이다.
예나 지금이나 바윗돌처럼 단단한 팔과 너른 품이 주는 안정감이 옛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그래, 예전엔 이 품에서 잠드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는데.’
반면 정엽은 그의 팔에 실리는 연주의 무게가 비정상적으로 가벼워서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원체 호리호리한 미인이긴 하다만, 대체 어떻게 하면 전장에서 고생하다 돌아온 그보다 더 초췌해질 수 있단 말인가?
“옷이 젖었군. 비라도 맞고 돌아다닌 건가?”
“……고작 그게 궁금해요?”
걱정인지, 핀잔인지. 그것도 아니면 정말로 궁금한 건지.
기억 속의 어느 날처럼 감정이 실리지 않은 목소리를 곱씹던 연주가 실소를 터뜨렸다.
아무리 이 남자 품이 따스했기로서니 이제 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별일 아니에요.”
“왜 이 꼴로 집에 돌아온 거지?”
“어쩌다 보니 사고에 휘말렸을 뿐이에요. 아, 이젠 사고가 아닌가…….”
애써 자신을 감싼 정엽의 품을 밀어낸 연주가 몸을 일으키기 위해 거친 나무 밑동을 짚었다. 밤비로 축축하게 젖은 나무껍질은 과거의 감정을 털어 버리기에 딱 알맞은 온도였다.
“…….”
텅 비어 버린 손. 더는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는 팔. 비바람에 사늘해진 옷깃을 여미며 앞서가는 연주를 따라 일어선 정엽이 한 박자 느리게 밀려드는 공허감에 주먹을 말아 쥐었다.
“연주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
“네.”
아까부터 휘청이는 누이 때문에 놀라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 있던 신이 연주를 부축했다.
“전하께서도 안으로 드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잠깐 사이에 옷이 다 젖으셨군요.”
신은 안으로 들어가길 꺼리는 정엽과, 왜인지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는 누이를 서재 안으로 떠밀었다.
“여기서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시녀에게 차를 내오라 하겠습니다.”
그러고는 두 사람을 남겨 둔 채 눈치껏 자리를 피했다. 맞은편에 앉아 가지런히 모아진 연주의 손끝을 묵묵히 보던 정엽이 시선을 들었다.
“흠…….”
밝은 등불 아래 빛나는 작고 뽀얀 얼굴이 예나 지금이나 흠 없이 아름다웠다.
그런데 대체 무슨 사고에 휘말렸기에?
연주의 날카로운 반응을 상기하던 정엽이 비뚜름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이 상황에도 청아한 얼굴이 수심에 잠긴 듯 처연해서 도무지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이제 말해. 궁에서 또 무슨 일이 있었어?”
“…….”
“귀찮게 하지 말라기에 알아서 피해 줬는데. 또 뭐가 문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