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유령처럼?
내가 치열하게 살아남는 동안 너는 죽어 가고 있었다고 말하는 건가? 우리의 결혼 생활이 그토록 끔찍했다고?
연주의 날 선 일갈에 할 말을 잃은 정엽이 불안하게 떨어지는 그녀의 고개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복잡한 심사를 숨길 때면 가지런히 포개지는 하얀 손등 위로 손목에서 번진 푸릇한 멍 자국이 선명했다.
“도통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물론 먼저 이혼을 요구하며 떠난 쪽은 연주였다. 자유를 얻은 지금이 너무나 행복해서 과거의 불행이 더욱 선명하게 대비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왜 이렇게까지 과거의 인연을 부정하려 든단 말인가.
한때는 매일같이 사랑한다고 속삭였으면서. 내가 돌아오면 세상을 얻은 듯 활짝 웃고, 내가 다치면 세상을 잃은 듯 눈물지었으면서.
‘설마 그 모든 게 거짓이었다고?’
정엽은 혼란스러웠지만, 어쨌거나 연주가 궁에 드나드는 일만은 여전히 그와 무관하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어떻게 무관한 일이 될 수 있겠는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벌어지는 사고처럼 마주치고, 마주칠 때마다 이렇게 불편한 기분에 휩싸이고 마는걸. 사고를 막을 방법은 사고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뿐 아닌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엉뚱한 생각은 하지 마.”
“……바쁠 텐데 시간을 너무 지체했군요. 나는 할 말을 다 했으니 이만 돌아가 볼게요.”
곽 귀비를 향한 의심은 심증에 불과하고, 심증만으로는 누구도 설득시킬 수 없다.
무어라 대꾸하려던 연주는 더 이상의 언쟁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하고 돌아섰다. 그러자 아까부터 할 말이 있는 듯 두 사람 주변을 서성이던 부관이 부리나케 정엽에게 다가가 허리를 굽혔다.
“전하, 한수에서 축조하던 저수지가 완성됐다고 하옵니다. 한수성 승격 논의에 보탬이 될 수 있도록 곧장 중앙에 보고를…….”
저수지 이야기인가.
잠시 걸음을 늦추며 먼 말소리에 귀 기울이던 연주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기대하고 저들의 대화를 엿들었단 말인가.
“그 건은 보류해 둬라.”
“예? 전하께서 친왕으로 책봉되는 데 도움이 될 텐데 어찌…….”
“…….”
이미 연무장에서 멀어진 연주와, 원체 말수가 적지만 오늘따라 더 과묵해 위압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정엽을 번갈아 보던 부관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왕비마마께서 무슨 말씀이라도 하신 겁니까?”
“…….”
“아니면 공주마마께 무슨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왕비마마께서 공주마마의 스승으로 발탁되셨다고 들었는데요.”
“…….”
“전하?”
정엽은 생각 많은 얼굴로 연주가 사라진 대숲을 바라보다 부관의 재촉에 정신을 차리고는 눈을 찌푸렸다.
역시 채연주 한 사람을 제외하면 모두가 그녀를 신경 쓰고 있지 않은가.
“누가 왕비라는 거냐.”
“아, 그게……. 송구합니다.”
채연주가 내 아내가 아니라는 현실을 부정하는 게 아니다. 이 상태로는 마음 편히 남 취급을 할 수 없다는 게 문제지.
‘서로 불편해하고 신경 쓰면서 어떻게 완벽한 타인이 될 수 있단 말인가?’
마치 자기 자신을 설득하듯 이 점을 끊임없이 되새기던 정엽이 부관을 남겨 두고 연무장을 벗어났다.
* * *
한 달이 지났다. 그사이 황궁의 단풍은 떨어지고 국화는 시들어 가면서도 짙은 향기를 뿜었다.
정엽은 연주가 연왕부를 찾아간 이후, 정말 그녀를 피해 다니기라도 하는 것인지 좀처럼 얼굴을 보기 힘들었다.
이대로 모든 것이 예전으로 되돌아가는 것일까.
공주의 손을 잡고 덕교궁을 찾은 연주가 습관처럼 주변을 살폈다. 만날 때마다 진을 빼놓는 사람이 보이지 않으니 오히려 그의 부재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어마마마, 문안드리옵니다.”
앙증맞게 무릎을 굽히며 인사를 올린 공주가 칭찬을 바라는 얼굴로 헤헤 웃으며 연주를 올려다보았다.
황후의 시선 역시 어린 딸을 따라 자연스럽게 연주에게 닿았다.
“……아, 아주 잘하셨사옵니다.”
“정말요?”
“우리 공주가 스승의 말을 믿지 못하는구나. 어미가 보기에도 인사하는 자세가 많이 좋아졌는걸?”
연주의 정신이 다른 곳에 가 있다는 걸 눈치챈 황후가 그녀를 대신해 공주를 칭찬했다. 칭찬에 마냥 신이 난 공주는 그간 연주와 있었던 일을 종알거리며 황후와 대화를 이어 나갔다.
“새언니가 성국부에서 보낸 시간만큼 더 열심히 배워야 한다고 해서 글씨를 많이 많이 연습했어요!”
“그래?”
“네, 이것 보세요!”
공주는 궁녀가 들고 있던 종이 뭉치를 받아 자랑스럽게 황후에게 내밀었다. 한 달 동안 서화를 연습한 흔적이었다.
“공주마마께서 글씨 연습을 무척 열심히 하셨사옵니다.”
공주의 소란에 정신을 차린 연주가 공주의 진척을 살피는 황후를 향해 한마디 덧붙였다.
사락사락 종이를 넘겨 보다, 공주가 종이 한 귀퉁이에 그려 놓은 강아지에 시선이 멈춘 황후가 온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다행이지. 한데 내 눈엔 공주가 글씨보다 그림에 더 소질이 있는 것 같구나.”
“아, 그 그림도 소녀가 그렸어요! 근데에 실은 성국부에 있는 강아지가 훨씬 더 귀여워요!”
“그래? 우리 공주가 혼자서 이 그림을 그렸단 말이지?”
“네! 새언니, 맞죠오? 시양이가 그린 거 맞죠오?”
공주가 연주의 동의를 구하듯 치맛자락을 잡고 흔들었다.
귀엽기도 하지. 공주의 행동에 함빡 미소를 머금은 연주가 입을 열었다.
“공주께서 글씨보다 그림에 더 흥미를 보이시어 우선은 붓을 다루는 것에 익숙해지도록 그리고 싶은 게 있으면 뭐든 그리게 하고 있사옵니다.”
“공주가 아직 어리니 그것도 나쁘지 않지.”
“바른 글씨는 바른 자세에서 나오는 법이라, 자세가 흐트러지면 즉시 교정해 드리고 있으니 심려 마시옵소서.”
그림을 그리는 동안 공주는 붓을 가지고 놀며 자연스럽게 팔 힘을 기르고, 사물을 표현하기 위해 붓끝에 실리는 힘을 조절하며 필압을 익히게 될 것이다.
귀족이 붓을 다루는 일은 지극히 일상적인 행위. 도구를 다루는 방법이 완전히 몸에 배야 훗날 공주가 글이나 그림으로 제 뜻을 표현하는 일에 어려움을 겪지 않으리라.
“그럼 앞으로도 공주를 잘 부탁하느니. 우리 공주 역시 배움을 게을리해서는 아니 된다. 알겠느냐?”
“네, 어마마마.”
“한 달 동안 열심히 공부했으니 상으로 네가 좋아하는 부용고(芙蓉糕)를 주마.”
황후의 눈짓을 받은 궁녀가 공주가 좋아하는 간식을 들고 등장했다. 신이 나 냉큼 황후의 무릎 위에 올라앉은 공주가 달고 바삭한 과자를 베어 물며 행복하게 웃었다.
“역시 어마마마께서 주시는 간식이 제일 맛있어요!”
“그래?”
그러나 공주가 간식 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황후의 얼굴엔 점차 먹구름이 드리웠다. 이를 알아챈 연주가 입을 열었다.
“황후마마, 무슨 근심이라도 있으시옵니까?”
“그리 보이느냐?”
연주가 걱정스레 묻자 별일 아니라는 듯 애써 웃던 황후가 한숨지었다. 연주의 태도를 보면 정엽과의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게 분명한데 함부로 물을 수 없으니 난처했다.
“실은 정엽 때문에 걱정이 되어서 말이다.”
“연왕 전하께서…… 왜?”
얼굴을 보지 못한 사이에 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연주가 의아한 눈으로 황후를 바라보았다.
“정엽이 한 달 넘게 입궁하지 않고 있단다. 심지어는 어전 문안도 여러 차례 걸렀지. 그 탓에 폐하께서 진노하시어 친왕 책봉마저 없던 일로 만들려 하시는구나.”
“……친왕 책봉이라고요?”
“그래. 한수가 정식으로 우리 대화국 영토가 되었으니 응당 그 땅을 보살펴 온 정엽이 보상을 받아야 하지 않겠느냐. 한데 경사를 앞두고 일을 그르치고 있으니…….”
그제야 정엽이 친왕 책봉을 앞두고 있었단 사실을 알게 된 연주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곽 귀비가 갑자기 접근해 딸들에게 가르침을 달라 청한 이유가 이것이었구나.’
정엽이 친왕 책봉을 받으면 조정에서 헌왕의 입지가 좁아질 테니까. 나를 이용해 정엽의 세를 견제하려던 거였어.
“그런 일이 있었는지는 몰랐사옵니다.”
난처한 듯 손끝을 매만지던 연주가 지난번 연왕부에서 있었던 일들을 차근차근 되짚었다.
‘공주의 스승을 결정할 권한은 황후마마께 있지, 전하께 있지 않아요.’
‘불만이 있다면 황후마마께 직접 이야기하세요. 엉뚱하게 공주의 수업을 방해하지 마시고요.’
아무리 전처가 껄끄러운들 그의 앞날을 위해 밤낮으로 애쓰는 황후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날따라 굳은 표정으로 말이 없던 정엽을 떠올리던 연주는 황후와 시선이 마주치자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정엽과 네가 황궁에서 오며 가며 인사를 나누더라는 얘기가 있던데. 혹시 연왕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이더냐?”
“그저 우연히 마주쳤을 뿐, 소녀는 연왕 전하에 대해서는 잘 모르옵니다.”
“……그렇구나.”
정엽과의 일을 묻자 급히 얼버무리는 연주를 보고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음을 직감한 황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가 아프기라도 한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게 몸이든, 마음이든.
“응? 오라버니가 아파요?”
황후의 품에서 천진난만한 얼굴로 과자를 와삭거리던 공주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아프면 약을 먹으면 되지요!”
“약……? 그렇지. 아프면 약을 먹어야지. 우리 공주가 무척 똑똑하구나.”
공주의 말에서 묘책을 떠올린 황후가 다급히 상궁을 찾았다.
“허 상궁, 지금 당장 태의원으로 가서 연왕을 위한 보약을 지어 올리라고 해라.”
황후가 직접 연왕에게 약을 지어 보내면 사람들은 연왕이 몸이 좋지 않아 문안을 들지 못했던 거라고 여길 것이다.
“예, 마마.”
단박에 황후의 의도를 알아차린 허 상궁이 급히 덕교궁을 빠져나갔다.
연왕의 신변을 두고 황후가 애쓰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연주는 덕교궁을 나서기 위해 예를 갖췄다.
“하면 소녀도 이만 물러나겠사옵니다.”
“그래, 조심히 가거라.”
연주를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던 황후가 공주와 함께 그녀를 배웅했다.
“군주마마, 소인이 북문까지 모시겠사옵니다.”
“고맙구나.”
궁녀를 앞세운 연주가 그 뒤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하지만 머릿속은 온통 정엽에 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그이는 본래 제멋대로인 사람이야. 오랫동안 고대했을 친왕 책봉을 앞두고 나 때문에 문안도 거르고 입궁을 멈출 리 없지. 하지만…….’
혹시라도, 정말 만에 하나 내가 한 말 때문에 바보 같은 짓을 벌이는 거라면?
‘어찌해야 하나…….’
안내를 마친 궁녀가 덕교궁으로 돌아간 지 한참이 지났건만 연주는 좀처럼 마차에 오를 수 없었다.
“아가씨, 인제 그만 가셔야죠.”
“조금만 기다리거라.”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잠시 후 황후의 명을 받은 궁녀가 연왕부로 가기 위해 북문을 나서는 모습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