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어어? 세자께서 오시나? 그런 얘긴 못 들었는데…….”
멀리에서 연왕부를 향해 달려오는 평해왕부의 마차를 발견한 시위가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왕세자는 어린 시절부터 예고 없이 연왕부로 들이닥치곤 했기에, 나이 든 시위는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전하께서는 왕부에 계시는가?”
하지만 마차에서 내린 사람은 뜻밖에도 왕세자의 누이인 승설군주. 한때 연왕의 아내였던 사람이었다.
‘아니, 왕비께서 이곳에 왜?’
시위는 얼떨떨한 얼굴로 서둘러 무릎을 꿇고 예를 갖췄다.
2년 전 제석 연회에서 이혼을 선언한 뒤 단 한 번도 왕래가 없었던 연왕비였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나 연왕을 찾으니 당황할 수밖에.
“저, 전하께서는 안에 계시옵니다…….”
“그렇군.”
왕부의 붉은 대문을 넘어선 연주는 누구의 안내도 받지 않고 곧장 정엽이 공주와 함께 있을 경수당으로 향했다. 하지만 합문이 열려 있는 경수당은 활달한 손님의 흔적은커녕, 평소 주인조차 머무르지 않는 것처럼 휑하기만 했다.
‘여기가 아니라면 정엽은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연주가 텅 빈 경수당을 낭패한 낯빛으로 둘러볼 때였다.
“왕비마마?”
“……아실? 자네가 어찌 여기에?”
익숙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본 연주가 반색했다. 아실은 연주의 혼인부터 이혼까지 모든 순간을 함께하며 그녀를 보필해 준 고마운 사람이었다.
“황궁으로 돌아갔다가 황후마마의 명을 받고 얼마 전에 다시 왕부로 오게 되었사옵니다.”
“그랬는가?”
그사이 연왕부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잠시 생각 많은 표정을 짓던 연주가 이어지는 아실의 이야기에 정신을 차렸다.
“예. 한데 이렇게 다시 마마를 뵙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사옵니다. 소인, 그때 마마께서 인사 한마디 없이 떠나신 게 어찌나 서운하던지…….”
“미안하네. 내가 자네나 다른 사람들은 생각하지 못했어.”
“아니옵니다. 지금이라도 마마께서 건강하신 모습을 뵈었으니 소인도 안심이옵니다. 그런데 왕부에는 어쩐 일로 오신 건지요?”
눈물까지 글썽이며 반가움을 표현하던 아실이 뒤늦게 연주를 챙기고 나섰다.
사람이 무슨 눈물이 이리도 많은지. 연주는 예나 지금이나 너무 정이 많아서 탈인 아실의 모습에 오랜만에 따뜻하게 웃었다.
“연왕 전하를 뵈러 왔네. 전하께서는 지금 어디 계시는가?”
“아, 전하께서는 연무장에 계시옵니다.”
“연무장? 공주마마와 함께 계신 게 아니었는가?”
소성궁의 궁인은 분명 공주가 연왕부에서 시간을 보낼 거라고 했는데?
“공주마마께서는 성국부에서 데려온 강아지와 실컷 노시다가 잠이 드셨고, 전하께서는 연무장에서 사병들의 훈련을 지켜보고 계시옵니다.”
“아…….”
“소인이 모시겠사옵니다. 함께 가시지요.”
“고맙네.”
연주는 아실의 안내를 따라 연왕부 북쪽에 위치한 연무장으로 향했다.
연무장은 후원 뒤편으로 광활하게 펼쳐진 대숲에 숨겨져 있어서, 그곳에 닿으려면 미로 같은 어두컴컴한 오솔길을 통과해야만 했다.
“항상 연무장이 있다는 말만 들었지 정작 가 본 적은 없었었는데. 못 본 새 대숲이 더 울창해진 것 같구나.”
“예, 덕분에 전하께서 귀환하시자마자 내리신 명령이 북동쪽 정자를 허물어 대숲을 더 넓히라는 것이었지요.”
보통의 대저택이라면 왕부 안쪽은 온갖 기화요초와 절경이 넘쳐 나야 할 공간이지만, 정엽은 정원을 가꾸는 대신 숲과 연무장을 확장하는 일에 열중했다.
반평생을 전장에서 보낸 만큼 왕부에 머무를 때조차 긴장 상태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는 그의 지론 때문이었다.
“대체 연무장이 뭐라고…….”
“전하께선 풍류라고는 모르시는 분이니까요.”
“어쩌면 꼭꼭 숨겨 둔 연무장에서 군사들과 대단한 풍류를 즐기시는 건지도 모르지.”
연주가 하늘을 찌를 만큼 높게 뻗은 대나무 우듬지를 올려다보며 작게 웃었다.
사실 연주는 정엽이 애지중지하는 연무장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정엽은 그녀의 연무장 출입을 절대 허락하지 않아서, 이 거대하고 복잡한 대숲을 볼 때마다 그와의 거리를 영영 좁힐 수 없을 것 같은 예감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정 궁금하시면 자주 들러 확인해 보시는 건 어떠시옵니까?”
“전하께서 허락하시겠는가?”
“어쩌면요. 이제는 부부 사이도 아니지 않사옵니까.”
“지금은 부부보다 더 껄끄러운 사이가 됐잖은가.”
연주는 근래 정엽이 보였던 행동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아실은 뜻 모를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소인은 남녀 간의 일에 대해선 잘 모르니 마마께서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요. 자, 이제 저기 단상 쪽으로 가 보시지요.”
곧이어 캄캄한 대숲의 끝이 보이고 밝은 햇살이 머리 위로 쏟아졌다. 연주는 눈앞에 펼쳐진 의외의 광경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대숲으로 둥그렇게 둘러싸인 넓은 공터에는 숙소와 식당으로 보이는 야전 시설은 물론, 마장(馬場)까지 갖춘 제법 그럴싸한 병영이 서 있었다.
‘말이 연무장이지, 실은 병영을 세워 놓고 들키지 않기 위해 이곳에 숨긴 거로구나.’
멀리서부터 연무장 가장자리를 구보하는 군사들이 일으키는 흙먼지와 우렁찬 기합 소리가 연주를 반겼다.
“흙먼지 때문에 잘 안 보이는군. 단상이 저쪽인가?”
“예. 소인이 같이 가 드릴까요?”
“아니, 괜찮네. 할 일이 많을 테니 이만 물러가 보게.”
머뭇거리며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아실을 향해 안심시키듯 손을 흔들어 보인 연주가 어렴풋이 보이는 단상으로 향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단상 위에는 정엽이 팔짱을 낀 채 홀로 우뚝 서서 아래를 굽어보고 있었다.
“…….”
한 올 한 올 빈틈없이 빗어 올려 청옥 관을 씌우고 은동곳을 지른 머리. 떡 벌어진 어깨와 너른 등을 감싸느라 날갯죽지 쪽이 팽팽하게 가로 주름진 새카만 연무복. 보기만 해도 힘이 느껴지는 곧은 허리와 굵고 탄탄한 허벅지, 그 옆으로 비스듬히 드리워진 묵직한 장검까지.
예전 같으면 넋을 잃고 바라봤을 멋진 모습이건만, 이상하게도 오늘은 정엽의 뒷모습에서 꺾을 수 없는 고집과 외로움이 읽혔다.
한때 가장 사랑했던 남자에게서 외로움이 읽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생각에 잠긴 연주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하지만 그게 무엇이든 결코 사랑은 아니리라.
“연왕 전하.”
연무장에서 들릴 리 없는 맑은 미성에 정엽의 고개가 옆으로 움직였다. 지극히 감정적이던 이전의 만남과 달리 정엽의 반응은 제법 태연했다.
“무슨 일이지?”
과거에는 절대로 대숲에 발을 들이지 말라며 신신당부하던 정엽이었다. 그런데 대숲에 들어온 것도 모자라 연무장의 존재까지 알아 버린 자신을 보고도 이렇게나 싱거운 반응일 수 있는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 예상대로 모두 정엽이 의도한 것이었음을 확신한 연주가 단상에서 내려오는 그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제가 무슨 일로 찾아왔는지는 전하께서 더 잘 아실 텐데요.”
“무슨 뜻인지 모르겠군.”
“오늘은 공주의 서화 수업이 있는 날이에요. 한데 어째서 공주가 연왕부에 있는 거죠?”
“공주는 이곳에 잠시 놀러 왔을 뿐이야. 지금은 놀다 지쳐 잠들었을 뿐이고.”
“그럼 제가 오늘 겪은 일들이 전부 우연이라고요?”
“우연이 아니면?”
여유롭게 되묻는 정엽의 짙은 눈썹 하나가 얄밉게 치켜 올라갔다. 공주를 빼돌린 걸 알면 연주가 어떤 식으로든 행동에 나설 것은 예상했지만, 반응이 생각했던 것과 조금 달랐다.
오늘 겪은 일‘들’이라니. 나는 그저 성국공 부인을 이용해 공주를 잠시 궁 밖으로 나오게 했을 뿐인데. 그것 말고 또 무슨 일이 있었기에?
“무슨 일을 겪었는지 모르겠지만 누구에게든 기분 나쁜 일을 당하고 싶지 않으면 공주의 스승을 그만두면 돼.”
그냥 공주를 궁 밖으로 나오게 한 것 말고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나?
혹시 곽 귀비의 동태에 관해 무언가 알고 있을까 싶어 정엽을 떠보던 연주가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왜 그렇게 보지? 뭐 찔리는 거라도 있나?”
“찔리는 거라뇨?”
“그대는 공주에게 황족으로서의 소양과 서화를 가르친다고 했지만, 내가 본 건 잠자리 잡는 법이나 가르치는 모습뿐이었으니까.”
“제가 공주와 함께 있는 모습을 몇 번이나 보셨다고 그런 말씀을 하는지 모르겠군요.”
사람은 때때로 좋고 싫음의 문제를 옳고 그름의 문제와 혼동하곤 한다. 내가 좋은 것은 옳은 것이고, 싫은 것은 그른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이런 경향은 부정적인 상황에서 더 두드러지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좋은 감정이 털끝만큼도 남아 있지 않은 사람과의 대화에서.
‘정말이지 예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어.’
정엽이 또 쓸데없는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고 생각한 연주가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정엽의 시비는 계속됐다.
“스승이라면 공주에게 필요한 걸 가르쳐. 잠자리나 잡아 줄 스승은 공주의 곁을 지킬 자격이 없으니까.”
“공주의 스승을 결정할 권한은 황후마마께 있지, 전하께 있지 않아요.”
이쯤에서 용무를 마쳐야겠다고 생각한 연주가 의도적으로 황후를 언급했다. 내가 공주의 스승으로 황궁에 드나드는 것이 그리 불만이라면 설득해야 할 사람은 공주의 보호자인 황후가 아닌가?
연주는 그만 이 의미 없는 싸움에서 퇴장하고 싶었다. 그러자면 정엽에게 그가 투지를 불태울 상대는 자신이 아님을 인식시키는 게 중요했다.
“불만이 있다면 황후마마께 직접 이야기하세요. 엉뚱하게 공주의 수업을 방해하지 마시고요.”
“지금 나더러 황후마마와 언쟁이라도 벌이라는 건가?”
황실의 법도를 굳이 상기하지 않아도 황후는 심정적으로 그의 어머니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정작 이 사태의 원인인 채연주는 뒤로 물러나 모자지간에 싸움을 붙이고 구경만 하시겠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들어나 보자는 심정으로 잠자코 있던 정엽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폐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나요? 헤어져 각자의 삶을 꾸리라고요. 나는 당신이 더 이상 내 삶에 끼어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
“당신 때문에 자꾸 귀찮은 일이 생기잖아요. 기어이 내가 다시 침실에만 틀어박혀 유령처럼 사는 모습을 보고 싶은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