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화수월-10화 (10/161)

10화.

“우리 사이에 예의 차릴 것 없습니다. 어서 일어나세요.”

‘우리 사이에’라니. 살갑기 이를 데 없는 말씨에 당황하기도 잠시, 곽 귀비가 내민 손을 잡은 연주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소싯적 조양을 주름잡는 뛰어난 무희였던 곽 귀비는 오랜 세월 황제의 총애를 독차지해 온 총비이자, 3황자인 헌왕과 다른 두 명의 황자, 세 명의 공주를 낳은 복 많은 어머니이기도 했다.

누군가에게는 선망의 대상, 또 누군가에게는 황제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요사스러운 여자. 연주 역시 한때는 황제의 며느리였고, 평해왕의 유일한 딸이라지만 결코 마음 편히 대할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오랜만이로군요. 본 궁의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2년 전 제석 연회에서 본 것이 마지막인 듯한데?”

“마마의 말씀이 맞사옵니다.”

“괜찮다면 본 궁과 함께 저쪽 정자에서 담소라도 나누지 않겠어요?”

“……따르겠사옵니다.”

콕 집어 연주가 이혼을 선언한 ‘2년 전 제석 연회’를 언급한 귀비가 연주를 앞질러 정자로 향했다. 연주는 곽 귀비와의 만남이 내키지 않았지만 귀비의 제안을 거절할 마땅한 명분이 없어 그녀를 따라 정자에 올랐다.

붉은 단풍잎과 향긋한 자색 국화가 손짓하는 정자에 도착한 두 사람은 대리석 원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귀비의 눈짓을 받은 궁인들은 하나같이 정교하고 화려하게 세공된 옥그릇에 다과를 담아 늘어놓았다.

‘이쯤 되면 다과를 맛보라는 건지, 진귀한 옥기를 감상하라는 건지.’

옥배에 든 찻물을 한 모금 음미한 연주가 말없이 원탁 모서리를 응시하고 있으려니, 곽 귀비가 연주의 관심을 끌기 위해 입을 열었다.

“자, 이건 본 궁의 처소인 영방궁(永芳宮)에서만 맛볼 수 있는 하미과랍니다. 하미국에서 진상한 아주 귀한 과일이지요.”

곽 귀비는 궁녀가 마지막으로 내려놓은 하미과 접시를 가리키며, 근래 자신이 누리는 황제의 총애가 얼마나 대단한지 자랑했다. 그러고는 은근슬쩍 연주의 곁으로 다가와 앉았다. 그녀가 연주를 붙잡은 용건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라는 뜻이었다.

“시양공주에게 서화를 가르치기 위해 자주 입궁한다고 들었어요. 앞으로 종종 영방궁에도 들러 주지 그래요?”

“소녀가 어찌 황후마마의 허락도 없이 후궁을 드나들 수 있겠사옵니까.”

“저런. 본 궁을 찾아오는 일에도 황후마마의 허락이 필요한가요? 군주가 본 궁을 생각하는 마음이 중요한 거지요. 우리 군주께서는 너무 예법을 중시하셔서 탈이라니까.”

“과찬이시옵니다.”

“우리 공주들도 군주에게 기품 있는 언행을 배울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혹시 영방궁을 오가며 세 공주를 가르칠 생각은 없나요? 그렇게만 해 준다면 사례는 톡톡히 하겠어요.”

지금 사례가 문제인가? 제 할 말만 늘어놓으며 부담스럽게 다가오는 곽 귀비를 난처하게 보던 연주가 입을 다물었다. 곽 귀비 본인은 까맣게 잊어버렸는지 몰라도, 선황후가 훙서한 당시 그녀가 정엽을 음해하기 위해 연주에게 덫을 놓았단 사실은 궁중에 모르는 이가 없었다.

“갖고 싶은 것이 있다면 뭐든 말만 해요. 내가…….”

연주는 어색한 미소와 함께 차분하게 곽 귀비의 손을 밀어냈다. 데일 듯 뜨거운 찻잔을 쥐고 있으려니 한동안 잊고 지내던 3년 전의 기억이 뭉게뭉게 떠올랐다.

‘너는 어찌하여 짐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황궁으로 돌아왔느냐? 이 순간에도 우리 대화국 군사들이 차디찬 북방에서 백융의 창칼에 맞서고 있음을 모르는 것이냐? 그러고도 네놈이 대장군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야!’

다른 일도 아니고 친어머니의 임종을 지키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황제는 승전고를 울리자마자 눈보라를 헤치며 달려온 아들을 다시 북방으로 내쫓았다.

그날, 정엽은 어머니의 침전 앞에서 처절하게 절규했고, 연주는 사랑하는 남편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탓하며 눈물지어야만 했다. 그게 다 누구의 농간인가? 황제의 베갯머리를 차지한 곽 귀비가 벌인 짓이었다.

‘이를 어쩌나. 한수로 돌아간 연왕이 심병을 얻어 앓아누웠다는군요. 그 건장한 연왕이 쓰러지다니 충격이 큰 모양이에요. 아들이 아무리 미워도 천륜이라는 게 있지요. 연왕비, 여긴 내게 맡기고 어서 가 봐요.’

다시 생각해도 당신에게 속아 넘어간 것이 한스럽다.

내가 당신의 말만 믿고 밤새 한수로 달려가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정엽이 나를 미워하게 되지 않았더라면. 내가 정엽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임신에 매달리지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과거의 불행은 아무렇지 않게 나를 스치고 지나갈 수 있었을까?

‘고작 곽 귀비의 말을 믿고 모후의 영전을 비워 둔 채 여기로 왔다고?’

‘그게 아니라…….’

‘대단한 아내 덕분에 나는 불충한 신하도 모자라 불효한 아들이 됐군.’

일개 병졸 앞에서 당하는 따끔한 모욕보다, 사랑하는 당신의 경멸 어린 시선이 나를 무너뜨렸다는 걸 알까?

아, 가슴이 울렁거린다.

시간이 흘러도 좀처럼 회복되지 않는 상처를 돌아본 연주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옥배를 움켜쥔 손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군주?”

잠시 후 연주는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홀로 쉼 없이 이야기를 쏟아 내던 곽 귀비는 어느새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애써 마음을 진정시킨 연주가 입을 열었다.

“영방궁의 세 공주께선 이미 훌륭한 귀부인들에게 예절을 배우고 있다고 들었사옵니다. 또 마마의 며느리이신 헌왕비 역시 명문가 출신이라 품행이 단정한 분 아닙니까.”

“그야 그렇지만…….”

“소녀가 세 분 공주께 가르칠 것은 없을 듯합니다.”

“아쉽게 됐군요.”

연주의 완곡한 거절에 고운 이마를 찌푸리던 곽 귀비가 한숨을 쉬었다. 끈질기게 틈을 파고들며 유들유들하게 설득하던 좀 전과는 영 딴판이었다.

“듣자니 세자부에서 오라비와 함께 지내고 있다던데. 얼굴이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는군요.”

“폐하의 성은으로 오라비와 함께 지낼 수 있는 것만으로도 큰 복이지요.”

“그건 아직 군주가 뭘 몰라서 그래요. 아무리 젊어도 사내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여자는 철 지난 꽃처럼 생기가 없답니다. 본 궁의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영방궁으로 찾아와요.”

“……예.”

철 지난 꽃이라.

‘당신이 그럼 그렇지.’

악담에 가까운 귀비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연주가 소매 안으로 주먹을 말아 쥘 때였다.

“귀비마마, 헌왕 전하께서 영방궁에 도착하셨다 하옵니다.”

고요하게 분기를 삭이는 연주를 먼발치에서 바라보던 궁녀가 귀비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이런, 본 궁이 군주를 너무 오래 붙잡아 두었군요. 이만 물러가도 좋아요.”

“예, 마마.”

연주는 곽 귀비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정자를 벗어났다. 하지만 아들인 헌왕이 왔다며 금세 자리를 뜰 것처럼 굴던 곽 귀비는 조금도 비워지지 않은 연주의 찻잔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군주가 마마께 너무 무례합니다. 아직도 저가 연왕비라도 되는 줄 아는 모양이지요.”

“소씨 천하인 이 나라에서 평해왕 일가만이 유일하게 소씨가 아니다. 일개 귀비 따위가 두렵겠느냐?”

“아무리 그래도…….”

연주를 비난하며 목소리를 높이던 궁녀가 당장이라도 제 뺨을 후려칠 것처럼 사나운 표정을 짓는 귀비를 보고 혀를 깨물었다.

“한데 연왕과 승설군주가 함께 있는 걸 본 것은 확실하더냐?”

“예, 연왕이 승설군주를 인적 드문 후원으로 끌고 가 같이 시간을 보내고 나오는 걸 본 궁녀가 있사옵니다.”

“조만간 연왕이 친왕에 책봉되면 세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이다. 하니 그 전에 반드시 평해왕부와 연왕의 인연을 끊어 놓아야 해. 한수에도 사람을 풀어 승설군주에 대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알아 오너라.”

“예, 마마.”

촤악-!

궁녀의 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바닥에 흩뿌려진 찻물이 귀비의 발끝을 적셨다. 그러나 정작 소동이 벌어진 정자에서는 놀라는 소리는커녕 궁녀들의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 * *

곽 귀비와 마주친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 마차 안에서 곽 귀비와 나눈 대화를 곱씹어 보는 연주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과거의 악연은 둘째 치고, 연주가 공주의 스승으로 입궁한 지도 벌써 반년. 그간 인사는커녕 말 한마디 붙여 본 적 없는 곽 귀비가 아닌가.

‘분명 뭔가가 있어.’

고작 몇 마디 나눈 것으로 곽 귀비의 의도를 전부 파악할 순 없지만, 황후의 딸을 돌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연주는 곽 귀비에게 좋은 먹잇감이었다. 그녀를 통하면 평해왕부와 황후는 물론, 공주와 정엽에게까지 마수를 뻗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더는 빌미를 주어선 안 돼.’

가장 간편한 방법은 역시 공주의 스승 자체를 그만두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아직 곽 귀비의 목적이 무엇인지 불분명했고, 오히려 곽 귀비가 제 딸들을 이용해 접근할 구실을 주는 꼴이 될 수 있었다.

“대체 무엇이 곽 귀비를 자극한 거지?”

이 시점에서 확실한 것은 정엽이 환궁한 후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뿐.

하지만 정엽의 귀환은 알고 보면 그리 특별한 사건이 아니었다. 그는 수도에 머물다가도 금세 온갖 이유에 치여 변방으로 떠났기 때문이다.

차창에 기대어 생각에 잠겼던 연주가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왕비이던 시절과 달리 지금은 조정 일에 귀를 세우고 있지 않다 보니 아무리 궁리를 해 봐도 당장 그럴싸한 이유를 찾기 어려웠다.

“그렇담 우선은…….”

정엽을 구워삶든, 협박하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의 관심사를 돌려 이전의 평화를 회복해야 한다.

“아가씨, 도착했습니다.”

집에 도착할 즈음에야 생각을 정리한 연주가 마차에서 내리는 마부를 발견하고 황급히 차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자네, 미안하지만 마편을 다시 잡아 주게.”

“예?”

“연왕부로 가려던 걸 깜빡했네.”

“연왕부요?”

“그래. 공주마마께서 그곳에 계시다 해서 말일세.”

“아아…….”

혹시 헤어진 부부 사이에 봄바람이 불기라도 했나? 연왕부라는 말에 귀를 쫑긋 세웠던 마부의 말꼬리가 묘하게 흐려졌다.

“예, 그리합지요.”

세자부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말을 몰게 된 마부가 힘없이 대답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지금 연주는 한시가 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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