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잠시만요.”
연주는 옷깃을 다급하게 정리한 뒤 옷소매를 끌어 내려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들어오세요.”
당황하는 연주를 보고 복도에서 딴청을 피우던 신이 그제야 안으로 들어섰다.
“너랑 같이 궁에서 나오려고 했는데. 왜 먼저 갔어?”
“오라버니 일정은 제멋대로잖아요.”
연주의 타박에 서글서글하게 웃던 신이 겸연쩍은 듯 뒷덜미를 문질렀다.
평해왕의 후계자인 왕세자 채신은 황제의 명으로 기린전에서 10년 넘게 황자들과 수학하고 있었다. 하필 황자들과 어울리다 보니 어느 날 갑자기 주연(酒宴)에 불려 가기도 하고, 또 어느 날은 강학 후 갑자기 사냥을 나가 세자부로 돌아오지 못하는 일이 빈번했다.
“그래도 오늘은 네게 맞추려고 애썼는데…….”
“왜요?”
“걱정돼서.”
“걱정할 게 뭐 있어요.”
대수롭지 않다는 듯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넘기던 연주가 작게 웃었다. 하지만 연주의 태평한 모습을 보고도 신은 좀처럼 마음을 놓지 못하는 눈치였다.
“정엽이 돌아왔잖아.”
“……참 빨리도 말씀하시네요.”
아무렇지 않게 전남편의 이름을 부르며 자신을 걱정하는 오라비를 마주한 연주는 어쩐지 마음이 불편해졌다. 정엽과 동갑인 신은 아주 어릴 때부터 연왕 소정엽의 벗을 자청하며 그와 가깝게 지내고 있었다.
이혼한 연주가 세자부에 머물며 두 남자의 관계 역시 예전 같지는 못하게 됐지만, 그녀는 여전히 오라비에게 이혼의 이유를 밝히지 않고 있었다. 그게 모두를 위한 길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지금 저를 걱정하는 거예요, 아니면 연왕을 걱정하는 거예요?”
“당연히 너지.”
연주는 당연한 것처럼 되돌아오는 오라비의 대답이 미심쩍다는 듯 곱게 눈을 흘겼다.
하지만 신은 진심이었다. 그는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온 누이를 누구보다 염려했지만, 연주가 상처를 끌어안고 침묵하기를 선택했기에 그녀가 스스로 상처를 딛고 일어설 날만을 아무 말 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도 연왕을 살갑게 정엽이라고 부르시면서.”
“투기는 나쁜 거야.”
언제쯤 너와 나의 연극이 끝날 수 있을까.
말도 안 되는 농담으로 연주의 입을 틀어막은 신이 착잡함을 숨긴 채 누이의 어깨를 두드렸다. 연주는 여전히 저를 어린애 취급 하는 오라비가 좋기도 하고 얄밉기도 해서 볼멘소리를 숨기지 않았다.
“사실은 좋아 죽겠죠? 그렇게 기다리던 벗이 돌아왔잖아요.”
“네가 불편해하는 것 알아.”
“입술에 침이나 바르고 말하세요.”
“음, 침만 바르면 될까?”
“정말이지…….”
입술에 침이나 바르랬다고 정말로 입술을 축이고 있다니. 오라비를 향해 뾰로통하게 눈을 흘긴 연주가 몸을 돌려 입을 다물었다.
“화내지 말고 저녁 먹자. 주방에 네가 좋아하는 새우살 수정교 준비하라고 해 놨어. 응?”
제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애꿎은 거울만 바라보는 연주의 팔을 부드럽게 그러쥔 신이 그녀를 식탁 앞으로 이끌었다. 어쩜 이렇게 수더분한 사람이 그 무뚝뚝한 소정엽과 막역한 사이가 될 수 있는 건지. 오라비에게 떠밀려 못마땅한 표정으로 식탁 의자에 앉은 연주가 고개를 저었다.
‘초록은 동색이라고. 사람은 끼리끼리 모이는 법인데.’
어영부영 신과 마주 앉아 밥을 먹게 된 연주가 먹음직스러운 수정교를 앞에 두고 젓가락을 튕겼다. 어쩐지 오늘도 오라비의 꿍꿍이에 휘말린 기분이지만 아무것도 모른 채 저를 위해 애쓰는 사람을 앞에 두고 계속 심통을 부릴 필요는 없었다.
* * *
공주의 처소에서 연주를 만난 뒤 왕부로 돌아온 정엽은 처소에 틀어박혀 보름 넘게 칩거했다.
무엇을 하든 이미 황제의 눈 밖에 난 처지. 문안을 거른다고 해서 특별히 달라질 것도 없었다. 게다가 궁에 들어가지 않으면 우연히라도 채연주를 만날 일이 없으니 일거양득 아닌가.
“전하, 전하.”
하지만 왕을 모시는 궁인들은 좌불안석이었다. 전쟁터를 누비느라 얼굴 한번 보기 어렵던 전과 달리, 지금은 그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매일 술만 찾고 있으니 그랬다.
“식사를 들이겠사옵니다.”
안에서 무얼 하는지 주안상마저 찾지 않은 지도 나흘째. 황후 덕분에 연왕부로 돌아온 양해가 발을 동동 구르며 목소리를 높였다.
“전하, 전하?”
이러다 사람 잡지.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는 침소 앞을 연신 기웃대던 양해가 눈을 질끈 감고 방문을 열었다.
“콜록, 콜록! 전하, 이게 다 무슨 연기이옵니까?”
방문을 열자마자 훅 끼치는 연초 냄새에 질겁한 양해가 서둘러 침실에 난 창을 모두 열었다. 양해가 무엇을 하든 깊은 고민에 빠진 정엽은 자욱한 연기 속에 앉아 조금도 움직일 생각을 않았다.
“전하, 자꾸 식사를 거르시면 몸이 상하시옵니다. 여기 팔보죽(八寶粥)을 가져왔으니 제발 한 술이라도 뜨옵소서.”
“됐다. 술이나 더 가져와라.”
“전하, 또 술을…….”
“시끄럽다. 안 본 사이에 말수가 늘었구나.”
금세 울상이 된 양해를 내보낸 정엽은 등받이에 나른히 몸을 기댔다. 창을 있는 대로 다 열어 놓은 덕분인지 정신이 조금은 맑아지는 듯했다.
“무슨 고집이 그렇게 센지…….”
당당하게 사람을 몰아붙이기까지 하던 연주를 떠올린 정엽이 콧등을 찡그렸다.
‘내가 오해를 하고 있다고?’
보름 넘게 답을 구하지 못한 질문을 되새겨 보기도 잠시, 정엽은 실소를 터뜨리곤 눈을 감았다.
설령 연주의 말이 사실이라 해도 감히 황제의 적장자 앞에서 그리 당당한 자는 드물었다. 연주가 자신의 처지를 깨닫지 못하고 날뛰는 거라 해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제아무리 평해왕의 하나뿐인 딸이라 한들 이미 한 번 혼인했던 여자가, 그것도 스스로 왕비의 자리를 내던진 여자가 다시 황궁을 드나든다고 하면 속으로는 다들 비웃지 않겠는가?
황후가 무슨 생각으로 연주를 공주의 스승으로 정했는지 몰라도 이렇게 상황을 지켜보기만 해서는 안 됐다. 채연주가 우스워질수록 그에게 미칠 불명예 또한 막대할 게 자명했다.
“뭘 어떻게 하면 좋을까…….”
정엽은 찬찬히 연주가 했던 말을 되짚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필요한 단서를 찾은 그의 입꼬리가 흡족하게 올라갔다.
‘……공주는 예법이나 서화 외에도 한창 황족의 소양을 익힐 시기라 내 도움이 많이 필요해요. 공주를 황실의 천덕꾸러기로 자라게 둘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요?’
입궁하는 이유가 순전히 공주 때문이라고 했지?
‘그럼 공주가 궁에 없으면 되겠군.’
생각을 정리한 정엽이 곧장 먹을 갈고 붓을 들었다. 서신이 향할 곳은 외가인 성국부. 수신인은 외숙모인 성국공 부인이었다.
* * *
연주는 정엽과 언쟁을 벌인 후에도 아랑곳없이 공주의 서화 수업을 계속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입궁과 출궁을 여러 번 반복하는 동안 정엽과는 단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
“……?”
하지만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은 연주와 생각이 다른 모양이다. 늘 그렇듯 수업을 위해 공주의 처소로 향하던 연주가 어디선가 날아드는 따가운 시선을 느끼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대로 괜찮은 걸까?’
본의 아니게 사람들의 시선을 독차지하는 상황이 조금은 껄끄러웠다.
‘그래도 그 사람이 돌아오기 전엔 이렇지 않았는데.’
한숨과 함께 잡념을 떨친 연주가 소성궁으로 들어섰다. 항상 활기 넘치던 궁전은 웬일인지 기묘한 적막에 휩싸여 있었다. 평소라면 해맑게 웃으며 달려 나와야 할 공주도 보이지 않고, 궁인들의 흔한 인기척마저 느껴지지 않았다.
연주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사방을 살폈다. 잠시 후 연주를 발견한 궁녀 하나가 황급히 달려와 허리를 숙였다.
“군주마마 오셨사옵니까?”
“그래. 한데 오늘은 공주마마의 수업이 있는 날이거늘 소성궁이 어찌 이리 조용한 것이냐? 공주마마께선 어디 계시고?”
연주의 물음에 궁녀의 얼굴색이 눈에 띄게 흐려졌다.
“송구하오나 마마께서 헛걸음하시지 않도록 세자부로 사람을 보냈사온데 무슨 문제가 생긴 모양이옵니다. 공주마마께서는 지금 소성궁에 계시지 않사옵니다.”
“안 계신다? 하면 황후마마와 함께 계신 것이냐?”
“아니옵니다. 공주마마께서는 그저께 외가인 성국부로 출궁하시어 그곳에서 머물고 계시옵니다. 오늘은 연왕부에 들러 시간을 보내신다는 전갈을 받았사옵니다.”
성국부에 이어 연왕부라. 누군가 농간을 부렸음을 직감한 연주의 눈매가 설핏 가늘어졌다.
“성국부에는 갑자기 왜……?”
“며칠 전 성국공 부인께서 황후마마와 담소를 나누시다 성국부에서 태어난 강아지 이야기를 올리셨사온데, 공주마마께서 관심을 보이셔서요.”
“강아지?”
“예. 공주마마께서는 그날로 성국공 부인과 함께 출궁하시어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사옵니다.”
나이 어린 시양공주는 평소 강아지, 고양이를 무척 좋아했다. 어디 강아지와 고양이뿐이겠는가. 공주는 토끼, 다람쥐 같은 작고 귀여운 동물이라면 사족을 못 썼다. 그 애정의 깊이가 어느 정도냐 하면 후원에서 뛰노는 토끼를 몰래 침소로 데려와 함께 잠을 청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성국부에 갓 태어난 강아지가 있다니. 황후가 아무리 공주를 말려도 고집을 부렸을 게 뻔했다.
그리고 한번 고삐 풀린 공주의 일탈은 하루가 이틀이 되고, 이틀이 사흘이 되었겠지. 이대로 두면 사흘이 닷새, 닷새가 열흘로 불어나고 말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별수 없는 일이로구나.”
“송구하옵니다, 군주마마.”
심각한 표정을 짓는 연주를 보고 안절부절못하던 궁녀가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괜찮다. 네 잘못이 아니지 않으냐.”
“공주마마께서 돌아오시면 반드시 세자부로 기별을 넣겠사옵니다.”
“고맙구나. 하면 부탁하마.”
궁녀를 다독이고 소성궁에서 돌아 나온 연주는 이번 일의 배후가 정엽일 거라 확신했다.
‘그 사람이 아니면 누가 이런 일을 벌이겠어.’
성국부는 공주의 외가인 동시에 정엽의 외가이기도 했다. 정엽이 가장 손쉽게 움직일 수 있는 존재라는 뜻이었다. 어쨌거나 덕분에 뜻밖의 휴가를 얻게 된 연주는 출궁하기 위해 서둘러 걸었다.
계속 이런 식으로 공주를 빼돌린다면야 곤란하겠지만, 제아무리 정엽이라도 공주를 빼돌릴 만한 명분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바람이 불 땐 바람이 지나가길 기다릴 수밖에.’
생각을 갈무리하며 후원의 초입으로 들어선 순간이었다.
“어머, 이게 누구야. 평해왕부의 승설군주가 아니신가.”
농염하게 흐드러진 작약처럼 간드러진 목소리가 연주의 발목을 잡아 세웠다. 목소리의 주인을 발견한 연주는 곧장 무릎을 굽히며 예를 갖추었다.
“곽 귀비마마를 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