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정엽에게 붙들려 후원 깊은 곳까지 딸려 온 연주는 손목을 빼내려 거세게 비틀었다. 하지만 정엽의 억센 손아귀는 어찌해도 빠져나올 수 없는 덫과 같았다.
“이거 놔요!”
연주가 소리치자 정엽의 발걸음이 멈췄다. 하지만 연주를 돌아보는 정엽의 감상은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소릴 지른다고? 여기서? 내게?
별일이다. 정엽이 아는 채연주는 목소리 한번 제대로 높이지 않는 여자였다. 성정이 워낙 무른 탓도 있지만, 그에게 사랑을 속삭일 때를 제외하면 예법이나 귀족의 소양 따위를 목숨보다 귀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벌건 대낮에, 그것도 벽에 눈과 귀가 붙어 있다는 황궁에서 소릴 다 지르다니.
“누가 들으면 내가 대단한 잘못이라도 한 줄 알겠군.”
내동댕이치듯 연주의 팔목을 놓은 정엽이 사납게 말했다.
“아앗!”
정엽이 팔목을 거칠게 놓는 바람에 그대로 석가산 바위에 어깨를 부딪친 연주가 찌르르 퍼지는 통증에 몸을 웅크렸다. 그렇지 않아도 정엽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몸이 웅크리기까지 하니 더욱 왜소해 보였다.
‘이렇게 나와 마주치는 게 싫으면 입궁을 그만둘 것이지. 내 경고를 무시하고 입궁을 강행하고 있는 건 너잖아.’
부딪친 자리가 꽤 아픈 모양인지 잔뜩 일그러진 연주의 얼굴을 내려다보는 정엽의 미간이 처참하게 구겨졌다. 꼭 나쁜 사람이 된 것만 같아 그의 기분은 점점 더 엉망으로 변했다. 하지만 연주가 그런 정엽의 속내를 알 리 만무했다.
“이게 무슨 짓이죠?”
“그대야말로 지금 이게 무슨 짓이야.”
“제 대답이 부족했나요?”
“궁에 드나들지 말라고. 내 눈에 띄지 말라고 했잖아.”
어느새 바위에 의지해 몸을 곧게 세운 연주는 정엽의 위협적인 말씨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분을 삭이지 못하고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정엽의 어깨를 밀어 세우며 대꾸했다.
“제 말을 이해하지 못하신 듯하니 다시 말씀드리죠. 저는 입궁을 그만두지 않을 거예요.”
“뭐?”
“입궁을 그만두지 않을 거라고요.”
정엽과 눈을 맞춘 연주가 또박또박 힘주어 말했다. 늘 제멋대로에 아내가 죽어 가든 말든 신경조차 쓰지 않던 냉혈한이 왜 이제 와 사람을 귀찮게 구는지 모를 일이었다.
“정말이지…….”
돌아 버리겠군.
저를 밀어내는 것도 모자라 거침없이 항명하는 연주 덕에 정신이 얼얼해진 정엽이 이마를 짚었다.
고작 2년 사이에 사람이 다시 태어나기라도 했나? 아니면 원래 이런 사람이었나? 순하고 얌전하던 연주의 모습만 기억하는 정엽으로서는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연주의 행동이 아니더라도 이미 황후궁에서 심란한 이야기를 듣고 온 터였다. 기어이 언성을 높인 정엽이 이죽거렸다.
“황실을 떠나니까 아쉬워? 바깥세상이 생각처럼 아름답지 않아? 아니면 왕비로 사는 데 익숙해져서 황궁을 기웃거려서라도 군주 대접을 받고 싶은 건가?”
“함부로 말하지 말아요.”
“그럼 대답해. 무슨 생각으로 황궁에 얼쩡거리는 건지.”
지금 이 자리에서 입궁을 그만둔다고만 하면 다 해결되는 걸까. 자신의 입궁을 두고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화를 내는 정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연주가 한숨을 쉬었다.
“나는 공주의 스승으로 궁에 드나드는 것뿐이에요.”
“공주를 가르칠 사람은 네가 아니어도 많아.”
“네, 맞아요. 그런데도 황후마마께서는 내게 공주의 스승이 되어 달라고 부탁하시더군요.”
“거절할 수도 있었잖아.”
“황후의 부탁을, 일개 왕부의 군주가요?”
두 사람의 대화는 마치 평행선을 내달리듯 접점 없이 이어졌다.
“부탁은 형식에 불과해요. 당신도 알지 않나요?”
“…….”
“내가 황실의 명을 어기고 입궁하지 말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황궁에서는 모두가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듣기 좋은 말에는 독이 있고 호의에는 대가가 따르니, 이는 일평생을 황실의 자제로 살아온 정엽이 가장 잘 알았다.
하지만 왜 하필 채연주인가? 멋대로 떠난 사람이야 아무렇지 않을지 몰라도 남겨진 사람은 그렇지 못한 법이다.
“할 말이 없는 모양이군요.”
“…….”
정엽은 답답한 얼굴로 연주를 내려다보았다. 정답은 정해져 있는데, 거기까지 몰아세울 길이 보이지 않았다. 심란해진 정엽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입궁을 계속하겠다는 뜻인가?”
“네. 그리고 아무래도 당신은 무언가 큰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뭐?”
“나는 당신 때문에 입궁하는 게 아니에요. 당신과 일부러 궁에서 마주칠 생각이 조금도 없는 사람이라고요.”
“…….”
“게다가 공주는 예법이나 서화 외에도 한창 황족의 소양을 익힐 시기라 내 도움이 많이 필요해요. 공주를 황실의 천덕꾸러기로 자라게 둘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요?”
연주의 말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황실의 공주는 대체로 어린 나이에 혼인했고, 대부분 정략혼으로 진행되는 만큼 모후의 신분이 존귀할수록 혼약도 빨라졌다.
정치가의 아내가 되거나, 타국의 왕비가 되거나.
이것은 황실에서 태어난 딸들의 의무이자 숙명이었다. 정해진 길에서 벗어난 공주들의 말로는, 부황의 비호가 없는 한 대개 끔찍하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아버지이기 전에 제왕인 남자의 부성애는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신기루와 같았다. 이런 이치 역시 누구보다 정엽이 가장 잘 알았다.
“나는 사흘에 한 번 입궁하고 오늘처럼 대중없이 드나들기도 해요.”
“그래서?”
“당신이 공주를 지켜 줄 수 없다면 내 입궁을 막지 말아요. 그리고…….”
쉴 새 없이 정엽을 몰아붙이던 연주의 눈빛이 오묘하게 변했다. 하지만 그게 좋은 신호라는 뜻은 아니었다.
“열흘에 한 번 입궁하는 사람이 사흘에 한 번 입궁하는 사람을 피하는 게 더 수월하지 않겠어요?”
“별 볼 일 없는 황자 주제에 훼방 놓을 생각 말아라?”
“네, 제대로 알아들으셨네요.”
조곤조곤한 말투로 정엽을 쏘아붙이는 연주의 표정은 이제 무료해 보일 만큼 초연했다.
“하!”
“나는 스스로 당신 곁을 떠났어요. 그런 내가 당신과 황실에 더 무슨 미련이 남아 있겠어요?”
“…….”
“당신만 나를 귀찮게 하지 않으면 돼요. 그럼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정엽이 무어라 대꾸하려는 찰나, 현재 두 사람의 관계를 확인시켜 주기라도 하듯 담백하게 옛일을 언급한 연주가 차분히 두 손을 포갰다.
“무슨 대답이 듣고 싶은 건지 모르겠군.”
숫제 저를 무뢰한 취급 하는 연주의 태도에 얼빠진 정엽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나만 너를 귀찮게 하지 않으면 된다니. 내가 언제 너를 귀찮게 했지? 아무리 남남이 되었다고 해도 한때 부부로 살던 남녀가 마주치면 불쾌한 게 정상이잖아. 너처럼 멀쩡한 게 이상한 거라고.
정엽은 형용할 수 없이 복잡한 기분으로 연주를 쏘아보았다. 나중에는 혼란스럽다 못해 울화가 치밀었다.
“그럼 이만.”
하지만 연주는 지금 정엽이 어떤 기분이건, 또 무슨 생각을 하건 조금도 알고 싶지 않았다. 그저 정엽이 또 허튼소리를 하기 전에 어서 이 자리를 떠날 궁리만 할 뿐이었다.
“……젠장.”
정엽은 눈 깜짝할 새에 무릎을 굽혀 보이는 것으로 예를 갖추고 정원에서 벗어나는 연주를 눈으로 좇으며 이를 악물었다.
전장에서조차 모르고 지내던 패배감이 온몸을 감쌌다.
* * *
정엽을 만난 후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공주에게 돌아간 연주는 아쉬워하는 공주를 달래고 곧장 집으로 향하는 마차에 올랐다.
“후우…….”
귀가한 연주를 기다리고 있는 건 익숙한 필체의 서찰. 침실의 경대 앞에 앉자마자 부왕의 선 굵은 글씨를 오래 들여다보던 연주가 봉투의 입구를 비틀었다.
[사랑하는 나의 딸에게.
네 오라비에게 연왕의 귀환 소식을 들었다. 요즘도 송씨 부인이 네 어머니를 자주 찾아오고 있으니 마음 불편한 일이 생기거든 언제든 해광성으로 돌아오너라.
네 어머니가 너를 많이 염려하고 있단다. 언제나 너를 기다리고 있으니 염려하지 말고 돌아오너라.]
여전히 힘이 넘치는 필획에서 아버지의 건강을 확인한 연주가 맥없이 서찰을 내려놓았다.
“……언제든 돌아오라고요.”
아버지 평해왕은 매번 같은 말로 편지를 맺었다.
송씨 부인은 해광성에서 가장 유명한 매파. 매파가 집을 자주 드나들고 있다는 말은 아직도 그녀에게 구혼하는 사내가 적지 않으니 재혼을 고려해 보라는 뜻이었다.
“아버지도 참. 혼인을 두 번씩이나 하라고 하시다니…….”
그게 다 딸을 아끼는 마음에서 나오는 말이라는 건 알지만 아버지가 재혼을 종용할 때마다 연주의 마음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전남편과 얼굴을 마주하는 것만도 이렇게 피곤한데 새 남편이 될 사내는 또 어찌 본단 말인가?
“재혼은 말도 안 돼.”
연주는 이미 한 차례 연왕부를 떠나 오라비가 있는 이곳 세자부로 왔다. 한데 또다시 정엽을 피해 본가인 평해왕부로 간다는 건 아예 인생의 도망자로 전락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평해왕부로 내려간 뒤엔 마음에도 없는 혼인을 하고 또다시 남편을 따라 낯선 곳으로 떠나야 하겠지.’
연주는 자신의 인생이 점점 궁지에 몰리고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모두가 너를 위해서란 말로 평해왕부로의 귀환이나 재혼을 입에 올리지만, 누구 하나도 그녀의 가슴이 거멓게 죽어 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그러나 더욱 연주를 괴롭게 하는 것은 이미 마음이 메말라서 어떤 일을 겪고도 마음껏 울 수조차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점이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정엽 때문에 바위에 부딪친 어깨가 뒤늦게 욱신거렸다. 경대 앞에 돌아앉아 목깃을 헤치고 거울로 환부의 상태를 확인한 연주가 한숨을 쉬었다. 부딪친 어깨와, 어깨를 살피는 손목 부근에 붉은 멍 자국이 선명했다.
“더는 마주칠 일이 없겠지.”
한순간 정엽의 사나운 표정을 떠올린 연주가 고개를 저었다. 흔들리는 고개를 따라 작은 진주 귀걸이가 맑은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하…….”
거울 속에서 흔들리는 진주 귀걸이를 바라보던 연주가 귀걸이를 빼 작은 함에 넣었다. 그러고 나니 틀어 올린 머리카락을 장식한 은제 장신구가 눈에 들어왔다. 섬세한 나비 형상 아래 꽃잎 같은 영락을 늘어뜨린 머리 장식은 혼인 예물로 선황후가 연주에게 준 것이었다.
일국의 황후가 준 것이라기엔 너무 소박해서 정작 연왕부에서 지낼 때는 한 번도 꺼낸 적이 없는 물건이었는데…….
“연주야.”
“오라버니?”
나비 장식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던 연주가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몸을 틀었다. 돌아본 자리에는 오라비 채신이 문틈에서 고개를 반쯤 내민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