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왕부를 정리하고 열흘 만에 입궁한 정엽이 황후에게 문안을 올리기 위해 황후의 처소인 덕교궁(德皎宮)을 찾았다.
지난번엔 정엽이 어전 앞에서 자리를 지키느라 고생을 했고, 또 오랜만에 만난 연주에게 할 말이 많아 보였으므로 변변한 인사도 없이 그를 보낸 황후였다.
“한수에서 네가 고생했다는 얘기는 들었다. 전투에서 승리하고 나서도 성곽을 쌓고 이주민을 정착시키느라 애를 많이 썼다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 짧게 대답한 정엽이 궁녀가 내온 차를 마셨다. 하지만 차가 입에 맞지 않는지 애꿎은 찻잔만 매만지는 정엽의 모습은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
“아직 여독이 풀리지 않은 모양이구나.”
“아니요. 괜찮습니다.”
황후의 근심 가득한 표정을 보고 그제야 자신이 황후를 걱정시켰다는 것을 눈치챈 정엽이 고개를 바로 했다.
“마마의 탓이 아닙니다. 오래 변방을 전전했더니 차 맛은 통 모르겠더군요.”
잔 속에서 빙글빙글 도는 연두색 물을 바라보던 정엽이 차 대신 어려서 즐겨 먹던 간식을 집어 들었다.
“아직도 어린애처럼 단 과자를 좋아하는구나.”
나무라는 투였지만 과자를 베어 무는 정엽을 바라보는 황후의 얼굴에는 안도가 깃들어 있었다.
오랫동안 보지 못해도 너는 그대로구나. 너는 여전히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야.
“정엽아.”
“예, 마마.”
“며칠 후 한수를 성(省)으로 승격시키자는 상주문이 올라갈 거란다.”
“…….”
뜻밖의 이야기에 멈칫한 정엽이 황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 짧은 사이에 억지로 입 안으로 밀어 넣은 강정이 이에 끈적하게 달라붙어, 불쾌한 감정이 밀려왔다.
“잘된 일이다. 네가 공들여 일군 한수가 드디어 대화국의 정식 영토로 인정받는 셈이니 말이야.”
“쓸데없는 일을 하셨습니다.”
한수는 정엽이 백융과의 오랜 전쟁 끝에 얻은 땅이었다. 그 땅을 지키는 동안 정엽은 친모인 선황후를 잃었고, 연주와의 첫 아이를 잃었으며, 아내였던 연주와도 남남이 된 상황이었다.
사욕을 뒤로하고 공을 세웠으면 당연히 영예로 받아들일 일인 것을. 정엽을 안쓰럽게 바라보던 황후가 입을 열었다.
“아니, 쓸데없는 일이 아니다.”
그렇게 말하는 황후의 표정은 얼핏 선봉에 선 장수처럼 비장해 보였다.
“너는 조만간 한수성을 일군 공적을 인정받아 친왕의 자리에 오르게 될 게다.”
“……설마 성국공께서 이 일에 동참하신 겁니까?”
“그렇단다.”
성국공 교서형은 정엽의 외숙으로, 세상을 떠난 선황후 교 씨와 지금 마주 앉아 있는 계황후 교 씨의 오라비였다. 그리고 교씨 가문은 화서 지역에서 가장 막강한 세력을 자랑하는 대귀족으로, 당대 황제의 반정을 승리로 이끈 주역이기도 했다.
“이모님.”
“어마마마.”
“…….”
“이제는 내가 네 어머니이지 않더냐.”
“……예.”
답답함에 인상을 조금 구기던 정엽이 황후의 완강한 태도에 말을 아꼈다.
“폐하께서는 진즉 너를 수도로 불러 공적을 치하하셨어야 했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야.”
“하지만 부황께서는 그리 생각하지 않으실 겁니다. 교씨 가문이 저를 위해 천자를 겁박한다 여기시겠지요.”
불현듯 정엽은 자신을 박대하던 황제의 태도와, 연왕부 궁인이 모두 교체됐던 일을 떠올렸다. 황제가 그를 푸대접하는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지만, 이번만큼은 그럴싸한 이유가 있는 모양이었다.
“폐하께서는 결국 널 친왕에 봉하실 것이다. 너는 천자의 아들이기 전에 선황후의 아들이고 내 조카야.”
교씨 가문에서 배출한 두 명의 황후, 화서이교(華西二喬). 이 별칭은 단순히 화서의 이름난 미인이었던 자매의 미모를 칭송하는 말이 아니었다.
황제의 반정을 함께한 교씨 가문에 대한 황제의 맹약, 그 이상. 옥좌에 올라 권세를 누리는 것은 소씨이지만 실상 교씨 자매가 대화국의 천자를 선택했음은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그래도 저는 친왕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네가 쌓은 공적은 제대로 인정받아야지. 이제라도 논공행상을 제대로 하자는데 무슨 문제가 있겠느냐?”
“저 하나 때문에 교씨 일가를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폐하께서는 저를 정적으로 여기고 계십니다. 제가 용손이라는 예언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대체 왜 이러십니까.”
그간 교씨 가문은 대화국의 충신을 자처하며 황제를 향해 단 한 번도 반기를 든 적이 없었다. 그것이 성국공의 뜻이자 황제를 사랑한 선황후의 바람이었기 때문이다.
“널 다시는 북방으로 보내지 않을 것이다. 처음부터 너를 그곳으로 보내는 게 아니었어.”
“저는 대화국의 황자로서 책임을 다했을 뿐입니다.”
“황자로서의 책임은 충분히 졌다. 그러니 앞으로 수도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지도록 하거라.”
황후는 분명 조카인 정엽을 사랑했지만 더는 물러설 수 없었다. 정엽의 나이도 이제 스물여섯. 황제는 지천명을 앞두고 있었고, 조정에선 후계 논의가 본격화될 게 불 보듯 뻔했다.
“…….”
황후와 교씨 가문의 강경한 의지를 읽은 정엽의 고개가 꺾였다.
“네 뜻대로 연왕부 식솔들은 모두 돌려보내 두었다. 하지만 그들 중에는 이제 더는 네 편이 아닌 자들도 있을 게야.”
“……예.”
“조심해야 한다.”
“명심하겠습니다.”
더는 어디서도 안심하고 지낼 수 없다. 심지어 내 집에서조차도. 하지만 이제는 북방으로 도망칠 수조차 없게 되어 버렸으니…….
정엽이 착잡한 얼굴로 다 식은 찻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좀 전까지 맹물처럼 느껴지던 액체에서 소태처럼 쓴맛이 느껴졌다.
“공주가 너를 많이 그리워했단다. 돌아가는 길에 꼭 얼굴을 비춰 주려무나.”
“예, 그리하겠습니다.”
“그래. 하면 일어나 보거라. 덕교궁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 폐하께서 역정을 내실 테니.”
황후는 이제 정엽이 부친에게 어떠한 기대도 품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주변에서 아무리 손가락질을 해도 황후에게는 반드시 지켜야 할 약속이 있었다.
* * *
응접실에서 나온 정엽은 곧장 공주의 처소인 소성궁(昭盛宮)으로 향했다. 그가 길을 걷는 동안, 무수한 궁녀들이 저마다 얼굴을 붉히거나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지르며 곁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지금 정엽에게 궁녀들의 은밀한 관심이나 환호 따위는 중요치 않았다. 공주의 처소가 코앞이라는 사실 역시 마찬가지였다.
‘친왕, 친왕이라니…….’
물론 지난 2년 동안 정엽은 그야말로 미친 사람처럼 백융을 쓸어 내고 한수 땅을 일구는 데 집중했다. 거기 매달린 이유는 황후에게 말했듯 황자로서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였을 뿐, 쓸데없이 황제를 자극하거나 후계 쟁탈전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려는 의도는 손톱만큼도 없었다.
한데 외숙인 성국공까지 가세해 이런 일을 벌이다니. 누구보다 아끼는 공주를 보러 가면서도 심란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와아, 저기 있다!”
한숨을 삼킨 정엽이 걸음을 멈춘 때였다. 소성궁의 높은 담장 너머로 공주의 해맑은 함성과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시양이 뭐 재밌는 거라도 하나?’
짧은 순간 근심을 잊은 정엽이 천진난만한 목소리를 따라 소성궁 안으로 발을 들였다.
“연왕 전하?”
“쉿.”
궁인들의 입을 단속한 정엽은 조용히 회랑을 지나 너른 중정으로 들어섰다. 공주는 정엽이 온 줄도 모르고 제 키보다 긴 잠자리채를 허공에 휘두르며 폴짝거리고 있었다.
“잠자리야! 이리 와!”
잠자리라니. 귀엽기도 하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공주가 잠자리를 잡기 위해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모습을 지켜보던 정엽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어? 잠자리 저기 있다! 헙……!”
이번에는 바위에 올라앉은 잠자리가 공주의 표적이 된 모양이다. 잠자리채를 들고 바위를 향해 까치발로 다가가는 공주의 걸음걸이가 무척 깜찍스러웠다.
“잡았다!”
주변을 살금살금 돌며 기회를 엿보던 공주가 날쌔게 잠자리채를 휘둘렀다. 기특하게도 수확이 있는 모양이었다.
“녀석, 언제 저렇게 커서 혼자 잠자리까지 잡는담.”
공주의 잠자리 채집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정엽이 꽃나무 사이에 몸을 숨긴 채 슬금슬금 공주와의 거리를 좁혔다. 그런데…….
“새언니, 이것 봐요! 새언니가 가르쳐 준 대로 했더니 정말 잠자리가 잡혔어!”
새언니라니. 설마 연주가 여기 와 있는 건가?
정엽은 어디론가 신나게 달려가는 공주를 따라 분주하게 시선을 옮겼다. 그 끝에는 불행하게도 정말 연주가 서 있었다.
“자, 이제 잠자리를 이 병 안에 넣으세요.”
“응? 그러면 잠자리가 불쌍하잖아.”
“그렇긴 하지만 병에 넣어 놓지 않으면 잠자리가 날아가고 말 거예요.”
“우웅, 그건 싫은데…….”
잠시 망설이던 공주는 연주가 건넨 작은 유리병 속으로 조심조심 잠자리를 밀어 넣었다. 연주는 공주가 잠자리 날개에서 손을 떼자마자 무명천으로 병 입구를 덮고 끈으로 칭칭 동여맨 뒤, 공주의 손목에 병을 걸어 주었다. 공주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유리병을 요리조리 들여다보았고.
“어? 오라버니! 언제 오셨어요?”
잠자리를 관찰하다 유리병 너머로 정엽을 발견한 공주가 반색했다.
“아…….”
손목에 달린 유리병을 달랑달랑 흔들며 달려온 공주가 냅다 정엽의 품에 안겼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연주는 무척이나 당황스러운 표정이었다.
‘공주의 처소에서 한가하게 잠자리나 잡으며 놀아?’
정엽은 내심 기가 막혔으나 제 목에 매달려 떨어질 줄 모르는 공주 때문에 차마 따져 묻지 못했다.
“새언니가 여기 있어서 오신 거예요?”
“아니, 시양 너를 보러 왔단다.”
“정말요?”
“그럼.”
정엽의 대답에 기분이 좋아진 공주가 두 손으로 앙증맞은 입술을 가리며 까르륵 웃었다. 오라비 입에서 제 이름이 나온 게 퍽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하지만 이를 지켜보는 보모상궁은 그야말로 좌불안석이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은 알았지만 그게 오늘일 줄이야!
“공주마마, 이제 연왕 전하께 그만 매달리시고 이리 오시옵소서.”
“왜에? 난 오라버니가 좋은데!”
“전하께 깨끗한 모습만 보여 드리기로 약속하셨지 않사옵니까. 소인이 예쁜 새 옷을 준비해 두었으니 갈아입으시는 게 어떠실는지요?”
“예쁜 옷?”
보모상궁의 말에 혹한 공주는 곧장 처소 안으로 팔랑팔랑 사라졌다. 홀로 남은 연주는 아까부터 따갑게 쏟아지는 정엽의 시선을 감내하며 말을 아꼈다.
“잠깐 얘기 좀 하지.”
“저는 할 얘기 없어요.”
“그래도 따라와.”
일촉즉발. 날 선 신경전 끝에 연주의 손목을 낚아챈 정엽이 인적 드문 후원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