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익숙하지만, 그래서 더 듣고 싶지 않았던 목소리에 온 신경이 곤두섰다.
“도망이라니요?”
무시하고 지나가기엔 말꼬리에 묻은 적개심이 거슬렸다. 연주가 발길을 멈추고 정엽을 향해 돌아섰다. 예나 지금이나 환상적인 미모를 자랑하는 얼굴이 연주의 두 눈 가득 들어찼다.
“…….”
전보다 조금 말라 더 날카로운 인상을 주긴 해도, 못 본 사이에 짙고 굵은 선으로 다듬어진 얼굴에선 남성미가 물씬 풍겼다. 하지만 아무리 훌륭한 외양인들, 연주는 이제 연왕 소정엽에 관한 거라면 그게 무엇이든 달갑지 않았다. 그리고 정엽은 연주의 그런 태도가 영 못마땅한 눈치였다.
“영락없이 쥐구멍으로 도망가는 생쥐 꼴이었는데. 아닌가?”
“말씀이 지나치시군요. 도망은 죄를 지은 사람이나 치는 것 아닙니까.”
묘한 신경전을 벌이던 두 사람은 이내 기다렸다는 듯 가시 박힌 말들을 쏟아 냈다. 오가는 말만 들으면 그들이 한때 부부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죄를 지은 사람이라…….”
연주의 말을 곱씹던 정엽의 입꼬리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지은 죄가 커서 왕비의 자리를 감당할 수 없으니 이혼하게 해 달라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 지은 죄가 없다?
“예전 일은 조금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투로군.”
“기억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연주는 이제 연왕비가 아니고, 소정엽의 아내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럼에도 마주 선 정엽의 표정은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다. 너 따위는 말끔하게 잊었다는 듯 어느새 평정심을 되찾은 연주와는 대비되는 얼굴이었다.
“잊고 있는 것 같으니 알려 주지. 그대는 선황후의 영전도, 아이도 지키지 못했다고 스스로가 인정한 죄인이야. 그러니까.”
“…….”
“황궁에 함부로 드나들지 마. 하루아침에 왕비 자리를 내팽개치고 뛰쳐나갈 땐 그만한 각오 정도는 했어야지.”
화가 났는지 전에 없이 냉담한 목소리로 경고를 쏟아 낸 정엽이 연주를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기가 막힌 건 도리어 연주 쪽이었다. 내 입으로 뱉은 말을 부정할 생각은 없지만 어떻게 내 앞에서 죽은 아이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꺼낼 수 있단 말인가?
“싫어요.”
들끓는 화를 애써 가라앉힌 연주가 멀어지는 정엽에게 대꾸했다.
“……뭐라고?”
연주의 단호한 반응에 잠시 멈칫한 정엽이 살벌하게 되물었다. 잘 벼린 비수처럼 날카로운 시선이 연주의 눈동자에 정확히 꽂혔다.
“싫다고요.”
연주는 정엽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 내며 초연하게 답했다. 한때는 정엽을 위해 기꺼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를 이해하려 애썼지만 더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황당하군.”
한 걸음, 또 한 걸음. 성큼성큼 되돌아온 정엽이 큰 키를 숙여 연주의 표정을 살폈다. 코끝이 맞닿을 듯 가까이 다가온 얼굴에선 한여름 소나기처럼 맹렬한 기세가 느껴졌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그건 제가 묻고 싶은 말이에요. 전하께서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제게 이런 말씀을 하시나요?”
되묻는 연주의 목소리가 사늘했다. 연주를 이글거리는 눈으로 들여다보던 정엽은 이내 기막힌 듯 실소했다.
“명령에 이유가 필요한가?”
“…….”
“다시는 내 눈에 띄지 마. 본 왕은 평해왕이나 그대의 오라비처럼 선량하질 못해서.”
높낮이 없는 단조로운 목소리. 여린 어깨를 적장의 목을 조르듯 단단하게 움켜쥐는 손. 어느새 웃음기를 거둔 정엽의 표정은 숨이 끊어져 가는 사냥감을 지켜보는 포식자처럼 여유로웠다.
‘일이 성가셔지겠구나.’
뜻하지 않은 역경을 직감한 연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입궁을 결정한 순간부터 어느 정도 각오한 일이었지만, 정엽이 이토록 적개심을 드러내는 건 예상 밖의 일이었다.
“…….”
연주의 침묵을 수긍으로 받아들인 정엽은 빠른 걸음으로 궁문을 넘어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흑마 위에 올랐다. 곧이어 말 머리를 돌린 그가 번개처럼 튀어 나가자, 그를 따르는 부관들 역시 금세 흙탕물을 튀기며 사라졌다.
“후…….”
모두가 자리를 떠난 뒤에야 긴장이 풀린 연주가 길게 숨을 내쉬며 문간을 짚었다.
“당신이 조금이라도 선량한 사람이었다면 내가 왕비 자리를 내팽개칠 필요도 없었겠지.”
정엽의 말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아 그가 떠난 방향을 한참 쏘아보던 연주가 뒤늦게 마차에 올랐다. 그러나 연주가 무슨 말을 하건 바람처럼 사라진 정엽에게는 닿지 않았다.
* * *
쉬지 않고 말을 몰아 왕부에 도착한 정엽은 낯선 태감의 마중을 받았다.
“연왕 전하를 뵙습니다.”
“양해는?”
“양 태감은 전하께서 수도를 떠나 계신 동안 황궁에서 부름을 받았사옵니다.”
태감의 인도를 받으며 왕부로 들어선 정엽의 미간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양해는 정엽이 아주 어릴 때부터 그의 시중을 들던 심복으로, 그를 대신해 텅 빈 왕부를 지켜 오던 자였다.
“황후마마의 명이냐?”
“그분이 아니면 누가 왕부의 태감을 궁으로 불러들일 수 있겠사옵니까.”
정엽은 양해를 데려간 사람이 황후냐고 물었는데, 돌아오는 대답은 모호하기 짝이 없었다.
“폐하의 명이로군.”
“소인은 어전에서 황제 폐하를 모시던 복해라 하옵니다. 앞으로 소인이 전하를 잘 모실 것이옵니다.”
복해가 허리를 숙이자 그를 곁눈질로 훑은 정엽은 이내 큰 보폭으로 처소인 경수당(鏡水堂)으로 향했다. 인사조차 받아 주지 않는 정엽의 냉랭한 태도에 당황한 복해가 서둘러 그 뒤를 따랐다.
정엽이 걸음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어전에서 쓰시던 사람을 내게 보내 주시다니. 과분하여 받을 수 없으니 본디 왕부에서 나를 시중들던 궁인이나 데려와라.”
“예? 폐하께서 연왕 전하를 모시는 데 부족함이 없게 하라시며 연왕부의 궁인들을 모두 바꾸셨사옵니다. 예전 궁인은 단 한 명도…….”
이제 대놓고 감시라도 하시겠다는 것인가?
황제의 노골적인 경계에 기가 찬 정엽이 걸음을 멈추고 복해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냉큼 흙바닥에 무릎을 꿇은 복해가 사정하기 시작했다.
“전하, 소인은 이대로 돌아가면 죽을지도 모르옵니다!”
“지금 여기서 내 손에 죽는 것보다 폐하의 손에 죽는 쪽이 더 영광스러운 일 아니냐. 당장 양해를 비롯해 왕부를 돌보던 궁인들을 데려와라.”
할 말을 마친 정엽은 늘 하던 대로 경수당에 딸린 욕실로 향했다. 하지만 부리나케 달려온 복해가 이번에도 그 앞을 막아섰다.
“송구하옵니다, 전하. 아직 목욕물이 준비되지 않았사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시오면……!”
“…….”
돌아오자마자 아내였던 연주와 말다툼을 벌인 것도 모자라, 먼 길을 달려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를 위해 준비된 것이 아무것도 없다니. 더는 화를 낼 기운조차 남지 않은 정엽이 복해의 말을 무시하고 침실로 들어섰다.
“전하…….”
방 안은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듯 곳곳에 뽀얗게 먼지가 앉아 있었다. 아직 겨울이 오려면 멀었는데도 한기가 돌아 냉골이나 다름이 없었다.
‘곧 있으면 부황께서 나를 죽이실 모양이군.’
하지만 지금 정엽에게는 미래에 대한 걱정보다 당장의 휴식이 간절했다. 대충 갑주를 벗어 던진 정엽은 젖은 몸 그대로 차디찬 침상에 누웠다.
수도의 연왕부는 혼례 후 연주와 함께 살던 곳이었고, 이혼 뒤엔 다시 북방을 전전하며 지금까지 돌아온 적 없었기에, 여전히 침실 곳곳엔 연주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원앙을 수놓은 붉은 베개, 연주가 새벽마다 몰래 들여다보던 경대, 언제 어디서든 온화한 향기를 풍기던 향로 따위가 그것이었다.
“돌아와도 돌아온 것 같지가 않군.”
전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무심코 연주와 함께 지내던 때를 떠올린 정엽의 한숨이 깊어졌다.
‘싫어요.’
난데없이 이혼을 선언할 때도 그랬지만 연주는 예나 지금이나 좀처럼 속을 알 수가 없었다.
싫다니. 마지막 인사도 없이 떠날 만큼 나를 경멸했으면서. 백년해로는 고사하고, 서로를 원수 보듯 하는 지경이 되었는데 황궁에서 마주쳐 좋을 게 뭐가 있다고.
“대체 무슨 생각인지…….”
게다가 아무리 권세가 하늘을 찌르는 평해왕부라도 황후는 무슨 생각으로 연주를 다시 황궁으로 불러들였단 말인가? 그걸 받아들인 연주의 속내는 또 무엇이고?
생각하면 할수록 이해되지 않는 상황 때문에 절로 심사가 꼬였다. 한동안 전쟁에 골몰하며 잊고 지냈던 두통이 다시 도지는 것 같았다. 정엽은 신경질적으로 원앙 베개를 낚아채 머리를 괴었다.
“뒤늦게 미련이 생긴 건 아닐 테고…….”
오늘 황궁에서 본 연주의 무례한 태도를 상기한 정엽이 고개를 저었다. 그 고집스러운 자세도, 무심한 눈빛도 모두 예전에는 보지 못한 것들이었다. 무엇보다 그를 밀어내는 말은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하필 그 여자 앞에서…….”
대역죄인처럼 꿇어앉아 있는 모습이나 보였다니.
정신이 산란해진 정엽이 손등으로 이마를 짚었다. 다 끝난 인연이라지만 제 우스운 꼴을 지켜보고 있었을 연주를 생각하니 도저히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그래도 곧이곧대로 입궁하지 않겠지. 이치에는 밝은 사람이니까.’
어찌 보면 황족인 그보다 더 황족의 삶이 어울리던 여자였다. 황제에게 이혼을 청하는 마지막까지 구차함이라고는 한 점 없지 않았던가.
“그래, 채연주라면 그런 짓은 하지 않지.”
공주의 스승이라니.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생각을 정리하고 애써 잠을 청해 보던 정엽이 몸을 뒤척였다.
‘시중드는 사람이 없으니 꽤 불편하군.’
생사가 오가는 전장에서는 생각조차 나지 않던 것들이 뒤늦게 마음을 어지럽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