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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화수월-5화 (5/161)

5화.

연주는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은 풍경이 외려 낯설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황제와 연왕에 관한 일은 무엇 하나 그녀의 뜻대로 흘러간 적이 없었다.

갑작스러운 황명으로 성사된 혼인. 황제에게 미움받는 연왕과 혼인했다는 이유만으로 등 뒤에서 아무렇지 않게 쏟아지던 멸시와 조롱. 아내를 타인 대하듯 보던 냉담한 연왕의 태도까지.

하지만 이제는 황실과 인연이 다한 마당이다. 저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에 있겠는가. 더구나 연주가 여기 남아 있는 이유는 마음에 생긴 병 때문에 하루하루 말라 가던 그녀를 구해 준 선량한 황후와 어린 공주 때문이지, 황제나 소정엽 때문이 아니었다.

갑갑함에 입술을 짓이기던 연주가 입을 열었다.

“허 상궁, 황후마마께 우산을 가져다 드리게. 저러다 병이라도 나시면 연왕 전하께서 더 큰 곤욕을 치러야 하실 걸세.”

“아! 그렇지요. 우산, 우산이…….”

황후와 연왕의 기구한 처지를 생각하며 남몰래 눈물을 찍어 내던 허 상궁이 허둥지둥 우산을 챙겨 나섰다. 저 처량한 모습이 어딜 봐서 일국의 국모와 전공을 세우고 돌아온 장수의 모습이란 말인가.

“마마, 소인이 우산을 받쳐 드리겠사옵니다.”

“나는 됐다. 우산은 연왕에게 씌워 주어라.”

“나도 됐으니 치워라.”

“하오나 전하, 이렇게 계속 비를 맞으시다가는 필시 큰 병이 나실 것이옵니다.”

“나보다 황후마마의 용태가 걱정이니 어서 처소로 모셔라. 공주, 너도 황후마마와 함께 처소로 돌아가라.”

상궁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황후와 공주를 모시라 명령하는 정엽의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수도의 날씨가 북방만큼 매섭진 않다지만 지금은 풀잎에 이슬이 맺히는 백로(白露)가 지난 때. 사흘 내리 비에 젖은 몸이 멀쩡할 리 없었다.

황후가 입을 열었다.

“상궁은 공주를 데리고 처소로 돌아가라. 오늘은 공주의 스승이 입궁하는 날 아니더냐.”

“그것이…….”

“왜 말을 하다 말아. 설마 오늘도 승설군주가 입궁하지 못한다더냐?”

“아니옵니다. 군주마마께서는 공주마마와 함께 이곳으로 오셨사옵니다. 저기 저쪽에…….”

한 손에 우산을 든 허 상궁이 연주가 서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표정 없이 황후와 연왕을 지켜보고 있던 연주가 익숙한 시선을 받고 고개를 살포시 돌렸다.

연주를 안타깝게 여기는 황후의 눈길이 그녀의 옆얼굴을 따라 흐르다 사라졌다. 하지만 정엽의 서슬 푸른 시선은 계속해서 그녀를 따라왔다.

그대가 무슨 자격으로 이 자리에 와 있지? 누굴 위해서?

“…….”

정엽은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지만, 연주는 그의 눈빛과 호흡만으로 그에게 부는 감정의 방향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었다. 부부로 사는 동안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또 어떤 마음인지 알고 싶어 노력한 결과였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소정엽의 기분에 맞추기 위해 애쓸 이유가 없었다.

“……!”

연주는 평온한 얼굴로 정엽과 담담히 눈을 맞추었다. 마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듯 무심한 태도에 외려 정엽의 눈매가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그사이, 황후는 막 편전에서 나온 어전 태감을 향해 말문을 열었다.

“이 공공, 폐하께서는 아직도 정사를 돌보는 중이신가? 폐하께서 드실 간식을 가져왔네. 음식이 식기 전에 뵈어야 할 텐데…….”

“송구하옵니다, 황후마마. 폐하께 다시 한번 여쭈겠사옵니다.”

황후의 재촉에 종종걸음 쳐 다시 어전으로 들어간 태감은 시간이 꽤 흐른 뒤에야 돌아와 소식을 전했다.

“황후마마, 폐하께서 공주마마를 데리고 안으로 들라 하시옵니다.”

“연왕은?”

“그것이…….”

뒷말은 듣지 않아도 뻔했다. 한때 정엽을 향한 연주의 사랑이 그랬듯, 황제를 향한 황후의 간청도 쓸모없기 때문이었다.

슬픔에 잠긴 얼굴로 조카를 내려다보던 황후는 어린 딸의 손을 잡고 어전 안으로 들어갔다. 홀로 남겨진 정엽의 어깨에서 밤새 말을 몰고 달려오는 동안 묻은 흙먼지가 빗방울과 엉겨 흘러내렸다.

“…….”

“…….”

연주는 그 모습을 한참 지켜보았다. 아버지의 부름을 기다리는 정엽은 왕비였던 자신이 밤낮으로 그를 기다리던 때처럼 지치고 외로워 보였다.

이제 정엽은 텅 빈 집에서 하염없이 그를 기다리던 내 마음을 조금은 알까.

어전 안으로 들어가는 공주를 따라 정엽의 바로 옆까지 온 연주는 무심코 그가 외딴섬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예나 지금이나 강건하기 그지없는 사내를 보면서 어째서 이런 나약한 감상이 들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우릉-. 우르릉-.

하지만 모든 건 착각에 불과하다고 일갈하듯, 멀리서 요란한 소리와 함께 큰 비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아, 당신은 나와 다르지.’

그래서 끝내는 갈라섰고.

새삼 정엽의 과거를 떠올린 연주가 속으로 실소를 터뜨렸다. 정엽은 외로움을 알 리 없는 사내였고, 설령 안다고 해도 그것을 괴롭게 여길 인사가 아니었다.

고통조차 익숙해지면 아무렇지 않아지는 법. 게다가 황궁 안에서 외롭지 않은 자가 어디 있겠는가. 이곳에서는 천하를 다스리는 황제조차 외롭다.

“한바탕 비가 쏟아질 모양이구나.”

정엽에게서 눈을 뗀 연주는 옆에서 유독 안절부절못하는 태감에게 관심을 돌렸다. 인중이 매끈한 그는 심란한 얼굴로 손바닥을 비비며 대답했다.

“아, 예. 그럴 모양이옵니다.”

황제는 비나 눈을 반기지 않아서 오늘처럼 날씨가 쾌청하지 않은 날이면 궁인들에게도 으레 날벼락이 떨어졌다. 그런 성향은 특히 정엽이 황성에 있을 때 두드러졌는데, 이는 연왕 소정엽이 태어난 지 백 일째 되던 날, 천기를 살피는 사천감(司天監)에서 황제에게 고한 말 때문이었다.

‘폐하, 1황자께서 가시는 곳마다 비가 내리고, 싫은 기색을 비치면 금세 그치니, 이는 심상치 않은 징조이옵니다.’

‘어린아이가 비구름을 부리니 이는 황자께서 용의 자손, 즉 용손임을 나타내는 길조이옵니다. 하나 용손은 타고난 기운이 너무나 강해 부모를 해치고 천지개벽을 일으키기도 하니 이에 대비하셔야 하옵니다.’

요약하자면 반흉반길의 계시라. 이런 예언을 전한 사천감조차 후에 이어질 비극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용을 신성한 동물로 여기는 대화국에서 용손의 탄생은 곧 성군의 탄생이라 대다수가 경사로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정으로 어렵사리 옥새를 손에 넣은 황제의 눈에 용손인 제 아들은 그저 분란의 씨앗에 불과하여서.

‘1황자 소정엽을 대장군으로 봉하니 금천 땅에 남아 있는 옛 장영국의 잔당을 소탕하라.’

‘달족의 반란으로 서부 국경이 혼란하니 연왕은 군사를 이끌고 장군 석청과 함께하라.’

‘백융의 복속은 우리 대화국의 오랜 숙원이다. 반드시 백융을 무찌르도록 하라.’

그래서 남쪽에서 서쪽으로, 다시 서쪽에서 북쪽으로. 정엽이 열 살 무렵부터 말 등에 매달려 치른 전투가 셀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처럼 황제가 어린 아들을 전장으로 등 떠밀며 바란 것은 단 하나.

‘전장에서 영화롭게 전사하여 역당이 아닌 짐의 아들로 남아라.’

그러니 몇 번이고 살아 돌아와 불사왕이 된 아들이 달가울 리 없었다.

그래도 장장 16년. 이만큼 공을 세웠으면 한 번쯤 돌아보고 귀히 여겨 줄 법도 하건만, 황제는 여전히 아들에게 그럴싸한 죽음의 명분을 안겨 주기 위해 고심했다.

‘당신은 벌을 받고 있는 거야.’

연주는 확신했다. 아내를 뒤로하고 갓 태어난 자식을 겨울 땅에 파묻어 가며 부황의 인정을 갈구한 결과가 고작 이것이라니. 이게 벌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동정도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에게 해야 하는 법이지.’

연민 가득한 주변의 눈길과 달리 정엽을 내려다보는 연주의 눈빛에 애석함이라곤 없었다. 정엽에 대해 생각하기를 그만둔 연주는 한층 짙어진 비 냄새를 맡으며 시간을 가늠했다. 곧 황후가 어전을 나설 시간이었다.

“황후마마, 조심하시옵소서.”

먹구름 낀 하늘을 올려다보던 연주는 상궁의 근심 가득한 목소리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 조금 지친 기색의 황후가 상궁의 부축을 받으며 어전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어린 공주만큼은 들어갈 때와 달리 천진난만한 얼굴이었다.

“공주마마, 손을 잡아 드릴까요?”

공주를 맞이하기 위해 앞으로 나아간 연주가 다정히 손을 내밀었다. 배시시 웃으며 연주의 검지를 움켜쥔 공주는 높은 문턱을 폴짝 뛰어넘었다.

이윽고 황후와 공주를 따라 나온 어전 태감이 정엽을 향해 종종걸음 쳤다.

“폐하께서 인사는 그만하면 충분하니 인제 그만 돌아가 보라 하시옵니다.”

“정엽아, 가자.”

어전 태감이 돌아서기 무섭게 정엽에게 다가간 황후가 타이르듯 말했다.

“모두 마마의 덕입니다.”

정엽이 굳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꼭 남 대하듯 하니 듣기 거북하구나. 네가 황궁에 얼마 만에 오는 것인지 알기는 하느냐?”

황후의 타박에도 정엽은 물끄러미 그녀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6척이 넘는 시커먼 장신이 예고 없이 솟아나자, 연주는 오랜만에 경험하는 위압감에 놀라 짐짓 뒤로 물러났다.

“…….”

이를 눈치챈 듯 자세를 가다듬던 정엽의 시선이 연주에게 닿았다.

말이 없다고 모를까. 정수리에 꽂히는 부담스러운 눈길을 감지한 연주는 과연 오늘 평소처럼 공주의 수업을 진행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아도 답은 명확했다.

‘공주가 정엽에게서 떨어질 리 없겠지.’

그리고 공주에게만은 애틋한 정엽 역시.

판단을 마친 연주는 공주의 손을 놓고 황후를 향해 예를 갖추었다.

“황후마마, 아무래도 오늘은 서화 수업을 진행하기 어려울 듯하니 소녀는 먼저 물러날까 하옵니다.”

“……그래, 그리하거라.”

“우웅? 새언니 가요?”

연주는 아쉬움 가득한 황후와 공주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어전을 벗어났다. 뜻하지 않게 일과가 어그러지니 심사가 복잡했다.

한데 심란해하는 그녀를 놀리듯, 궁문이 있는 북쪽 정원으로 들어서자마자 갑자기 주변이 밝아졌다. 손바닥으로 그늘을 만들어 올려다보니 좀 전의 먹구름은 온데간데없고 쨍쨍하게 내리쬐는 햇빛이 보였다.

“비구름이…… 그새 걷혔나?”

어서 황궁을 떠나라는 하늘의 계시인 건지, 아니면 용의 자손이라는 정엽이 어전을 떠났기 때문인 건지. 변덕스럽기 이를 데 없는 하늘을 한참 노려보던 연주가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재촉했다.

‘차라리 얼른 돌아가는 게 낫겠어.’

찝찝한 기분을 털어 버리려 부지런히 정원을 가로지르니, 어느새 정원의 끝을 알리는 문이 보였다. 그 너머에는 그녀가 타고 온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그래, 집으로 가는 거야.’

집이란 단어가 주는 안도감을 품고 연주가 정원의 문턱을 넘은 순간이었다.

“도망가는 건가?”

날 선 목소리가 연주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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