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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화수월-4화 (4/161)

4화.

황제의 손짓은 연회장 전체를 다시 긴장 어린 침묵으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연주는 이쯤에서 황제가 뜻을 굳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황제의 미움을 받는 황자에게 남해를 다스리는 번왕(藩王), 평해왕의 적녀가 왕비로 가당키나 한가. 돌이켜 보면 처음부터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연왕은 연왕비와 생각이 같으냐?”

“…….”

“그런 모양이군.”

이런 상황에도 남 일인 양 무표정으로 일관하는 아들을 확인한 황제가 콧방귀를 뀌었다. 파국을 예감한 황후가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다.

“폐하.”

“황후, 짐의 생각에 연왕과 연왕비의 인연은 짐과 그대의 것처럼 아름답지 못한 듯하오. 게다가 며늘아기가 저리 간청하지 않소.”

“하오나…….”

“더는 아이들을 위해 애쓰지 마오.”

아, 정녕 이렇게 되는 건가요?

먼저 세상을 떠난 언니를 향해 기도하듯 눈을 감은 황후가 눈물을 글썽였다. 하지만 황제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도 흥겨워 보였다.

“황명이다. 연왕 소정엽과 연왕비 채연주의 이혼을 허하니 과거는 여기 묻고 각자 행복한 삶을 꾸리도록 하라!”

이제 다 끝났구나.

“감읍하옵니다, 폐하.”

드디어 바라던 바를 이룬 연주가 황제를 향해 예를 올렸다. 각오는 했지만, 막상 황제의 말 한마디로 쉽게 이별이 결정되다니 이상하게 마음이 공허했다.

“새날이 밝겠구나! 풍악을 울려라!”

연왕 부부의 이혼을 선포한 황제는 대단한 경사를 기념하듯 술잔을 높이 치켜들었다. 이어 악공들의 손끝에서 흥겨운 가락이 울려 퍼지고, 붉은 옷을 입은 무희들이 연회장 가운데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휘황찬란한 연회장 가득 피어오르는 것은 희망찬 새해를 맞이하는 행복뿐. 우두커니 연회장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던 연주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무희들 사이로 자취를 감췄다.

“새날, 새날이라…….”

비틀거리며 연회장 밖으로 나선 연주는 황궁의 거대한 기둥을 짚으며 탄식했다. 연회장에서 걸어 나오는 잠깐 사이에도 기력이 바닥나 온몸에서 진땀이 흘렀다. 아이를 잃으며 몸이 가벼워졌는데도 그랬다.

“아가, 눈이 오는구나.”

바깥세상은 조용히 찾아온 함박눈으로 뒤덮여 눈부시게 희었다. 정엽과 함께 지냈던 눈과 얼음의 땅처럼, 아무것도 없어서 아름다웠다.

“그래도 나는 너를 꼭 만나고 싶었는데. 네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든 간에 반드시…….”

흩날리는 눈꽃을 바라보던 연주가 작게 중얼거렸다.

“미안하구나.”

한 번도 따듯하게 입 맞춰 주지 못해서.

물끄러미 눈 내리는 광경을 지켜보던 연주가 처마 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에 내려앉은 눈송이는 닿는 족족 순식간에 녹아 눈물처럼 고였다.

차라리 아무 기대도 하지 말걸. 아무것도 바라지 말걸.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하지 말걸.

‘하지만 이제 그 무엇도 되돌릴 수 없어.’

뎅- 데엥-.

멀리서 새해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끝과 시작을 가르는 긴 종소리를 들으며 마음을 다잡은 연주는 기둥에 의지했던 몸을 세워 천천히 걸음을 떼었다.

그렇게 차디찬 바깥세상으로 나서려던 찰나.

“왕비마마.”

“……?”

웬 궁녀인가? 자문하던 연주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제 황궁에 올 일도 없을 테니 궁녀가 어디에서 왔든 저와 하등 관계없는 일이었다.

“날이 춥사옵니다. 소인이 배웅해 드리지요. 어디로 가시옵니까?”

“나는…….”

궁녀의 질문에 무심코 연왕부를 떠올렸던 연주가 실없이 웃었다.

“마마?”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일단 가마를 부를까요?”

“됐다. 마침 눈이 내리니 좀 걷고 싶구나. 그 우산을 내게 내주련?”

“예, 마마.”

의아한 표정을 짓기도 잠시, 궁녀는 냉큼 손에 쥐고 있던 우산을 건네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홀로 남은 연주는 위태로운 걸음으로 정처 없이 눈밭을 걸었다. 연주가 지나간 자리에는 그녀의 발자국만 남아 피가 터진 상처처럼 선명한 흔적을 남겼다.

“하아…….”

보는 사람이 없으니 우산 속에서는 실컷 울어도 좋으련만. 한참을 걷던 연주는 가쁜 숨을 뱉으며 이마를 짚었다. 눈가의 열기가 솟구쳐 머리가 지끈거리는데도 더는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오히려 슬픔의 열기가 온몸을 태워 금세 재 가루처럼 부서질 것만 같았다.

‘그래. 차라리 이대로 사라지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아무것도 없는 순백의 땅. 그 위에 선 연주는 단 하나의 소망을 품은 채 다시 쉼 없이 걷기 시작했다.

‘발길이 멎을 땐 부디 내 마음도 이 눈길처럼 하얗게 지워져 있기를. 물에 뜬 달을 내 것이라 믿던 순진한 과거와 이별할 수 있도록…….’

* * *

그로부터 두 번째 가을.

부슬비 내리는 아침, 황궁 자미성 북문 앞으로 마차 한 대가 다가왔다. 오늘 처음으로 궁문을 지키는 임무를 부여받은 군사는 마른침을 삼키며 마차의 외관을 천천히 살폈다.

검은 바탕에 푸른 물결을 노니는 붉은 용. 마차에는 말로만 듣던 평해왕부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으음……?”

평해왕은 대륙의 남쪽 끝 해광성(海廣省)과 남해 일대를 다스리는 번왕. 그는 분명 영지인 해광성에 있을 텐데?

군사가 당황하는 사이, 함께 궁문을 지키던 다른 군사가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자네 왜 이렇게 얼이 빠졌어? 정신 차려!”

“아니, 그게 아니라……. 평해왕은 해광성에 머무르고 있지 않습니까? 한데 저 마차는 대체 뭐죠?”

“멍청하긴. 평해왕의 아들과 딸이 아침저녁으로 황궁을 드나드는데 무슨 소리야?”

평해왕의 아들과 딸이 황궁을 드나들어? 왜?

군사는 여전히 궁금한 것이 많았으나 동료의 성화에 턱을 당기고 허리를 곧추세웠다. 잠시 후 마차가 멈춰 서고, 안에서 스무 살 남짓한 젊은 여인이 시녀의 부축을 받아 내려섰다.

‘저 여인이 바로 평해왕의 딸이로구나.’

군사는 평해왕의 딸, 승설군주(勝雪郡主)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평해왕 채건은 오로지 전공을 세워 왕작을 받은 입지전적인 인물. 설령 황족이 아니라 해도 평해왕의 하나뿐인 적녀를 향해 극진한 예를 갖출 이유는 차고 넘쳤다.

“이른 아침부터 노고가 많네.”

군사들을 향해 짧은 인사를 건넨 연주가 그들의 앞을 스쳐 지나갔다.

미인도에서 튀어나온 듯한 청아한 얼굴. 구름 위를 노닐 듯 느긋하고 우아한 걸음. 사람을 향한 존중이 깃든 온화한 목소리까지.

저도 모르게 연주에게 매혹돼 시선을 빼앗긴 군사가 당황하여 입을 벙긋거렸다. 저토록 완전무결한 여인이 소문 속의 추녀 연왕비라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거, 소문이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것 아닙니까?”

“뭐가. 연왕에게 시집간 평해왕의 딸이 두 번은 못 볼 천하의 박색이라는 얘기 말인가?”

“그것도 그렇고…….”

“그런 헛소문에 귀 기울일 시간에 일이나 하게.”

동료의 잔소리에도 연주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던 군사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때, 저 멀리서 황제의 막내딸 시양공주의 목소리가 애처롭게 울려 퍼졌다.

“새언니! 왜 이제야 왔어요!”

연주가 입궁하기 전부터 궁문 앞을 서성이던 공주가 울먹이며 달려와 품에 안겼다.

“비가 오는데 어찌 여기까지 나오셨어요.”

“당연히 기다려야죠. 연왕 오라버니가, 오라버니가…….”

시양공주는 이제 겨우 여섯 살. 한창 응석 부리기 좋아하는 나이라 대수롭지 않게 공주를 안아 어르던 연주의 안색이 어둡게 변했다.

그 사람은 사흘 전에 황궁에 도착했다고 했는데?

“연왕 전하께서, 왜요?”

“일단 얼른 가요. 여기서 이럴 시간이 없단 말이야. 우리 오라버니 병나면 어떻게 하지?”

횡설수설하던 공주는 연주의 비단 치마를 잡아끌며 무작정 뛰기 시작했다. 공주의 고집에 함께 끌려 나온 듯한 보모상궁이 난처한 얼굴로 두 사람의 뒤를 쫓았다.

“어서 어마마마께 가야 해요. 어마마마가 우리 오라버니를 구해 주실 거야. 얼른 가요!”

“공주마마, 대체 어딜요? 어디로 가시는 거예요?”

“아바마마의 처소요!”

어전으로 간다고?

경황없는 와중에도 또 정엽이 황제에게 문전박대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연주가 한숨을 삼켰다. 하지만 어린 공주는 아직 연주와 정엽이 남남이 되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유독 연주와 정엽을 잘 따르는 공주를 위해 모두가 거짓말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마, 연왕 전하는 무사하실 것입니다. 황후마마께서 계시질 않습니까.”

공주가 이혼 사실을 알든 모르든 이제 연주는 정엽과 부부가 아니었다. 정엽이 황제로부터 어떤 대우를 받건 관여할 위치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새언니, 나 무서워요. 오라버니께 가고 싶은데 나 혼자는 못 가겠단 말이야. 그러니까 같이 가요. 응?”

“하지만…….”

저는 거기 있으면 안 돼요. 그 사람은 저를 싫어하거든요.

마음 같아서는 공주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싶었지만, 정엽을 걱정하는 황후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황후의 권유로 공주에게 예법과 서화를 가르치게 된 지 반년. 그사이에 황후 모녀와 대단한 정이 들기라도 한 것인지, 이혼하겠다며 연회장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을 때도 깊이 생각한 적 없던 얼굴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그래요. 가요.”

어전을 코앞에 두고 머뭇거리던 연주가 공주의 손을 잡았다. 전남편과 황궁에서 마주치는 일쯤이야. 입궁을 결심할 때부터 각오한 바였다.

그래, 2년이 다 되어 가는걸. 살갑게 인사를 나눌 사이는 아니지만 피해 다닐 이유도 없지. 피해 다녀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건 내가 아니라 그 사람일 테니까.

“오라버니!”

상념에 빠진 사이, 공주는 연주의 손을 놓고 어전 앞에 꿇어앉아 있는 정엽을 향해 뛰어갔다. 공주의 작은 손을 잡아 주는 정엽은 여전히 갑주 차림이었다.

‘설마 사흘 내내 저 자리에 꿇어앉아 있었던 건가?’

사실 연주는 정엽이 황궁으로 돌아오리란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이혼 후 곧장 한수로 떠난 정엽이 올여름 한북(寒北) 전투를 마지막으로 백융을 완전히 궤멸시켰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주는 때맞춰 있지도 않은 병을 핑계로 입궁을 한 차례 미루기까지 한 터였다.

“폐하께서도 참 무심하시지. 아무리 그래도 연왕 전하께서는 폐하의 친아들이신데…….”

“개선장군이 어전에 들어 인사 올리는 건 오랜 예법인데 말이에요…….”

한데 위풍당당한 적장자가 모두의 이목이 쏠린 어전에서 고작 이런 소리나 듣고 있다니. 마당 한가운데 죄인처럼 꿇어앉아 있는 정엽을 피해 궁인들 틈새에 섞인 연주가 한숨을 쉬었다.

‘하나도 바뀌지 않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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