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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화수월-3화 (3/161)

3화.

“하오나 전하…….”

“황성이 있는 수도 조양(兆陽)은 이곳 한수보다 남쪽이라 날이 훨씬 따뜻하다. 그러니 몸조리는 그곳에서 하는 편이 왕비에게도 좋을 것이다.”

여인의 몸조리가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더구나 왕비는 아이를 일곱 달씩이나 품고 있다가 낳았다. 비록 아이가 잘못되긴 했지만 열 달을 꽉 채워 출산한 다른 여인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뜻이다.

정엽의 의지가 어느 때보다 확고하다는 것을 깨달은 아실이 침상에 누운 연주를 난처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당신의 마음속엔 내가 없구나.’

그토록 부정하고 싶었던 현실을 마주한 연주는 모든 걸 포기한 사람처럼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정엽이 곧장 입을 열었다.

“아실, 네가 직접 왕비의 행장을 꾸리도록 해라.”

“예, 전하.”

다음 날, 연주는 실내를 양털로 감싼 마차에 올랐다. 마차 바닥에는 향로를 겸한 화로가 놓여 있어, 추위를 많이 타는 연주를 배려한 티가 역력했다. 왕은 세심한 성정이 못 되니 따로 묻지 않아도 아실의 작품일 게 분명했다.

“마마, 황성까진 금방이니 너무 심려하지 마소서.”

“금방은. 내가 황성에서 말을 타고 밤낮없이 달려와도 스무날은 족히 걸리던 거릴세.”

그때는 남편을 위해 밤새 말을 달려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지금은 두꺼운 모포로 온몸을 감싸고 있어도 한기가 뼛속까지 스몄다.

“소인을 타박하셔서 마마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풀리신다면 이런 흰소리는 얼마든지 하겠사옵니다. 자, 어서 소인에게 기대시지요.”

아실의 극진한 시중에도 불구하고, 병색이 완연한 연주는 벌써 추위를 이기지 못해 턱에서 딱딱 소리가 나도록 몸을 떨었다.

하지만 왕비씩이나 되어 이 부딪치는 소리 따위를 낼 수는 없는 노릇. 잇몸이 무르도록 어금니를 악문 연주가 아실에게 몸을 의지해 겨우 허리를 세웠다. 환기를 위해 실금처럼 열어 놓은 창 너머로 눈과 얼음이 빛나는 척박한 풍경이 보였다.

‘다시는 이곳에 올 일이 없겠구나.’

밖에서 혹한의 땅을 내달리는 야생마 울음소리가 들렸다. 연주는 그 소리를 벗 삼아 수도 조양으로 향했다.

* * *

수도로 가는 여정은 두 달 가까이 계속됐다. 이동하는 내내 화로가 내뿜는 연기 때문에 정신이 혼미했다. 그러나 차라리 쥐 죽은 듯 잠들었다가 몽롱한 정신으로 깨어나는 편이 추위와 피로를 견디는 데 도움이 되었기에 연주는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았다.

“전하, 이러다 황성에 도착하시기 전에 큰일을 치러야 할지도 모르옵니다. 마마께서 많이 힘들어하시니 하루라도 민가에서 휴식을 취하시는 것이 어떠실는지요?”

“시간이 부족하다.”

물론 드문드문 민가가 나타날 때마다 아실이 연주를 위해 나섰지만, 정엽은 단 한 번도 청을 받아 주지 않았다. 타고난 무장인 그는 마치 행군하듯 최소한의 식사와 수면 시간을 제외하고 고집스럽게 황성을 향해 나아갔다.

그렇게 해서 왕의 행렬이 황성에 닿은 것은 섣달그믐 저녁. 겨우 연회 시작 직전에 마차에서 내린 연주가 어떤 꼴로 황궁에 입성했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뻔했다.

“갑시다.”

연회 장소인 영화전에서 멀지 않은 자미성 북문. 자신을 향해 내밀어진 정엽의 손을 낯선 물건처럼 물끄러미 바라보던 연주가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아실, 나를 부축해 주게.”

“예? 예, 마마.”

왕비의 뒤를 말없이 따르던 아실이 연주 왼편으로 다가와 팔을 내밀었다. 아실의 팔에 의지한 연주는 정엽에게 가타부타 말도 없이 한 걸음 한 걸음 연회장을 향해 나아갔다. 두 사람을 맞이하는 황궁의 밤하늘은 잔뜩 흐려서 금방이라도 비나 눈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연왕 소정엽은 사천감이 예언한 용손. 그런 그가 황궁에 도착하자마자 용손의 증표와도 같은 눈과 비가 시작된다면, 심기가 상한 황제는 벌을 내리고도 남으리라.

어쩐지 좋지 않은 미래를 예견한 정엽이 앞서가는 연주에게 당부했다.

“부황께서 상을 내리겠다고 하셨지만 우리가 오는 사이 마음이 바뀌셨을지도 모르오. 그러니 큰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요.”

연주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나는 상이 아니라 벌을 받고 싶어요.”

긴 여정 동안 마음속에 확고한 결심 하나를 세운 연주는 뜻을 이루기 위해 거침없이 연회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기회를 잡은 순간, 망설임 없이 입을 열었다.

“폐하, 이혼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 * *

한 해의 마지막 날을 기념하는 제석 연회. 낯선 곳에 떨어진 이방인처럼 무감한 표정으로 자리를 지키던 연주의 목소리가 좌중을 갈랐다.

“지금, 이혼이라고 했느냐?”

“예, 폐하.”

오랜만에 아들 내외와 마주 앉은 황제의 표정이 심상치 않게 변했다. 상으로 원하는 것을 말해 보라 했더니 이혼이라고? 그것도 아들이 아닌 며느리가?

“다시 한번 간청드리옵니다. 1황자 소정엽과의 이혼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뭐든 처음이 어려운 법이다. 한번 이혼을 입에 담은 연주는 이제 두려울 게 없는 사람처럼 연회장 한가운데로 나아와 무릎을 꿇었다.

“흐음…….”

날벼락 같은 연주의 간청에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 모인 황실 일가는 일제히 침묵에 휩싸였다. 아무리 왕비의 친정인 채가(彩家)의 위상이 대단하다고 해도 이럴 수야 있는가.

“폐하, 아무래도 연왕비가 한수에서 지낸 1년간 마음고생이 심했나 보옵니다. 신첩이 잘 타이를 테니 너무 심려 마시옵소서.”

황제의 곁에서 눈치를 살피던 황후가 나서 상황을 수습하려 애썼다.

“아가, 네가 연왕과 추운 북녘땅에서 고생한 것은 여기 있는 모두가 알고 있느니라. 얼마 전에는 아이까지 잃었으니 네 상심이 깊겠지. 폐하께서도 이를 아시기에 너희 부부를 이제라도 불러들이신 게 아니겠느냐.”

“황후마마.”

“한데 이혼이라니. 네가 변방에서 내조한 노고를 기리겠다는 폐하의 뜻을 어찌 이리 곡해하는 것이야?”

“황후마마, 신첩은 상이 아닌 벌을 청하는 것이옵니다. 마마께서도 아시다시피 신첩은 돌아가신 선(先)황후의 영전을 지키지 않고 부군의 뒤를 쫓지 않았사옵니까.”

“그건 이미 다 지나간 일이다.”

황후는 어떻게든 연주의 입을 막아 보려 간절하게 눈짓했다. 하지만 연주는 요지부동이었다.

“신첩, 며느리가 되어 시어머니께 효를 다하지 못하고 자손도 지키지 못하였으니 더는 왕비의 자리를 보전할 면목이 없사옵니다. 그러니…….”

“대체 왜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 것이냐……!”

이리 난처할 데가 있나. 답답한 마음에 고운 미간을 찌푸린 황후가 분주한 시선으로 연회장을 훑었다. 연주는 연회장을 떠도는 황후의 눈동자가 누구를 향해 있는지 잘 알았다.

황후의 언니가 세상에 남기고 간 유일한 혈육. 선황후가 낳은 황제의 적장자. 연왕, 소정엽.

‘모두 부질없는 일인 것을…….’

그러나 어쩔 줄 모르는 황후를 바라보는 연주의 감상은 그뿐. 황후가 애타게 찾는 소정엽은 이제 자신의 남편이 아니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무표정한 얼굴이겠지.’

3년. 오로지 사랑으로 외면해 온 사실이지만, 아내로서 지켜본 소정엽은 자신의 심장에 독화살이 날아와 박힌다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만큼 무정한 위인이었다.

북방을 혼란스럽게 하는 백융에게는 잔혹한 악마의 화신. 이 나라 대화국(大華國) 백성에게는 백전백승의 명장이자 영원히 죽지 않을 불사왕.

하지만 그의 이름을 수식하는 무수한 영예는 그저 아버지의 인정을 얻기 위해 발버둥 친 결과물일 뿐, 그의 본질은 무정하다 못해 인간성을 상실한 듯한 잔인성에 있었다.

‘아이는 더 이상 찾지 마. 태어나자마자 부모를 떠난 불효자식이니까. 아니, 그건 사람의 형상도 아니었으니 자식도 아니지.’

아무리 평범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한들 그 아이는 당신과 나의 아이인 것을.

‘알려 주면. 가서 파내기라도 하게?’

그 가여운 핏덩이에게 어미 품에 안겨 볼 기회조차 주지 않고 언 땅에 묻어 버릴 것까지는 없지 않은가.

일말의 슬픔도, 좌절도 느껴지지 않던 정엽의 얼굴을 다시금 떠올린 연주가 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미련하게도 그런 당신에게 첫눈에 빠져들었으니…….’

모두 나의 잘못이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새 영토를 일구어 부황의 사랑을 받는 것만이 삶의 목적인 사내에게 마음을 준 것. 만년설보다 차가운 사람에게 애정과 관심을 기대한 것. 황실과 정략적 인연을 맺은 몸으로 언젠가 우리가 여염의 평범한 부부처럼 서로를 아끼며 백년해로할 수 있으리란 희망을 품은 것.

이런 내가 어찌 계속 당신 곁을 지킬 수 있겠는가? 그러니 나는 이제 내가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야겠다. 연왕비가 아닌 채연주로.

“폐하, 답을 주시옵소서.”

연주는 비답을 청하는 조정의 신료처럼 바닥에 이마를 조아렸다. 황제의 결단을 촉구하는 음성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

“폐하.”

며느리의 재촉에 난처한 듯 턱밑을 쓰다듬던 황제의 눈이 오묘하게 빛났다.

언제고 이런 날을 기다려 왔지만 그게 오늘일 줄이야!

“짐이 오늘 너를 벌하면 네 부친인 평해왕이 마음 아파하지 않겠느냐?”

“폐하의 말씀이 옳다. 그러니 연왕비는 어서 자리로 돌아가거라.”

어떻게든 연왕 부부의 이혼을 막기 위해 끼어든 황후가 짐짓 엄한 목소리를 냈다. 그러곤 부드러운 손길로 황제의 팔을 쓸어내리며 설득하기 시작했다.

“폐하, 예부터 부부의 연은 하늘이 내린다고 하였사옵니다. 곧 새해가 밝을 텐데 불상사와 함께 새해를 맞이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지요.”

“소제의 생각도 그러하옵니다. 지금 보니 한수에서 돌아오는 길이 멀고 험해 잠시 연왕 내외의 의가 상한 모양이니 형님 폐하께서 아이들에게 화해할 시간을 좀 주시지요.”

황후가 간청하자 그녀의 의도를 간파한 황제의 아우 유친왕이 눈치 빠르게 말을 보탰다. 하지만 황제는 아우를 향해 조용히 오른손을 들어 보일 뿐이었다.

더는 혀를 놀리지 말라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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