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화수월-1화 (1/161)

1화.

허상은 때때로 현실을 뛰어넘었다.

응애- 응애-.

어디선가 자지러지는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부른 배를 끌어안고 선잠에 들었던 연주는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

빠르게 쿵쾅거리는 가슴을 누르며 눈을 굴려 주변을 살피던 연주가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저 꿈결이었을까. 방 안은 고요하기만 하고, 텅 빈 옆자리에는 새벽의 한기가 떠돌고 있었다.

“……연랑(燕郞)?”

남편인 연왕 소정엽의 영지 연(燕)은 척박하고 추운 땅이지만, 연주는 정엽을 가리켜 연랑이라 부르길 좋아했다. 제비는 봄을 몰고 오는 정다운 새가 아닌가. 무심한 남편을 그렇게 부르다 보면 언젠가 제게도 봄날이 올 것만 같았다.

고단한 외사랑이 끝나고 정다운 부부가 될 그날이.

‘없나……?’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어디에도 없었다. 본능적으로 침상 옆자리를 더듬어 보던 연주가 손끝을 말아 쥐었다. 침상에 놓여 있는 건 어젯밤 곁에 머물렀던 남편이 남겨 둔 미지근한 베개뿐이었다.

하지만 이거라도 어딘가. 늘 비어 있기 일쑤였던 옆자리에 정엽의 체온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 연주는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나간 지 얼마 안 되었구나.’

이제 연주는 남겨진 온기만으로도 남편이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매일 자로 잰 듯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는 무장이었고, 이곳 한수(寒水)에선 하루 대부분을 국경선과 가까운 병영에서 보냈다.

“어쩌면 잠깐이라도 얼굴을 볼 수 있을지도 몰라.”

남편이 항상 동이 트기 직전에 저택을 나선다는 것을 상기한 연주가 두꺼운 이불을 밀어내고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비단 휘장과 병풍을 지나니 침실에 딸린 곁방에서 작은 인기척이 들려왔다.

‘저기 있구나!’

소리를 따라 분주히 달려간 얼굴엔 이내 봄꽃처럼 해사한 웃음이 피었다.

“연랑!”

연주의 맑은 목소리에 홀로 묵직한 비늘 갑옷을 걸치던 정엽이 고개를 들었다.

짙게 뻗은 눈썹 아래 칼날 같은 잿빛 눈동자, 바위산처럼 오뚝 솟은 콧등과 고집스럽게 다물린 입술까지. 완벽한 비율로 조화를 이룬 그의 이목구비가 오늘도 감탄과 실없는 웃음을 불렀다.

하루아침에 황명으로 맺어진 인연이지만, 6척을 훌쩍 넘는 큰 키와 바다처럼 넓은 어깨를 가진 남편은 언제 봐도 듬직하고 근사한 사람이었다.

“먼저 가 버린 줄 알았어요. 또 얼굴도 못 보고 그냥 보내는 줄 알고…….”

“곧 가야지.”

“응, 그래야죠.”

밝게 대답하는 연주의 목소리에 물기가 어렸다. 고작 한나절일 뿐인데도 남편이 저와 아이를 두고 떠나 버린단 생각에 울적한 기분이 들었다.

“한 번만 안아 봐도 돼요?”

“뭐 하러 그래.”

무심하게 대꾸하는 정엽의 목소리에 귀찮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연주는 못 들은 척 남편의 허리를 끌어안기 위해 팔을 뻗었다.

“어…….”

그러나 마음과 달리 연주는 정엽을 제대로 안아 볼 수 없었다. 아이를 품은 지도 벌써 일곱 달. 언덕처럼 부풀어 오른 배가 두 사람 사이를 갈랐다.

“왜 그러지?”

연주 쪽은 보지도 않고 허리께에 늘어진 갑옷 끈을 조이는 데 열중하던 정엽이 뒤늦게 손을 멈추고 물었다. 감수성이 풍부한 아내는 하루에도 몇 번씩 웃었다 울었다 하는 사람이지만, 좀 전의 목소리는 무심한 그의 귀에도 조금 이상하게 들렸다.

“…….”

한참 말이 없던 연주는 어색하게 고개를 저으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평소 남편의 높낮이 없는 목소리가 아쉽다고 생각했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가 이성적이고 침착한 사람이라 참 다행이다 싶었다.

“그냥, 조금 무서운 꿈을 꿔서요.”

“…….”

“요즘 꿈에 자꾸 아기 우는 소리가 들려요. 너무 자지러지게 울어서 듣기만 해도 소름이 끼쳐요. 대체 아기 엄마는 어디 있는지…….”

“출산을 앞두고 있으니 그렇지.”

“하지만 그 꿈을 꾸고 나면 온종일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오늘은 안 가면 안 돼요?”

어느샌가 저를 도로 외면하고 선 남편이 서운해, 냉큼 그의 등허리에 매달린 연주가 뺨을 비비며 애원했다. 남편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줄수록 차갑고 딱딱한 미늘이 보드라운 뺨을 파고들었다.

묵묵부답이던 정엽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그의 허리를 조이는 깍짓손을 풀고 몸을 돌렸다.

“후…….”

하지만 그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애처로운 아내의 눈빛이 아니라, 잠옷 차림에 버선도 신지 않은 맨발로 침상에서 달려 나온 행색이었다.

아무리 무서운 꿈을 꿔도 그렇지. 왕비씩이나 되어선 어린애처럼 달려와 엉기는 꼴이라니. 네 살이나 어린 아내지만 그래도 평해왕(平海王)의 적녀라 왕족의 품위는 제법 갖춘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한 모양이었다.

“답지 않게 왜 이래.”

“연랑…….”

“쓸데없이 생각이 많으니 그런 꿈이나 꾸지.”

“…….”

“그러니까 머릴 비워. 일 그르치지 말고.”

별 실없는 꼴을 다 보는군.

혼잣말 끝에 쏟아지는 정엽의 얼음장 같은 시선에 연주의 어깨가 오그라들었다.

“바쁜 거 알아요. 그래도…….”

그토록 차가운 시선을 받고도 연주는 오늘따라 정엽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남편을 보내고 나면 무엇인지는 몰라도 아주 슬픈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안 되나요?”

손끝을 만지작거리던 연주가 입술까지 앙다물며 초조해하자, 그 모습을 한심하다는 듯 내려다보던 정엽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일찍 돌아오도록 애써 볼게.”

“……정말요?”

“그래. 장담은 못 하지만.”

대답은 그렇게 하면서도 연주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정엽이 투구를 옆구리에 끼고 성큼성큼 밖을 향해 걸어 나갔다. 순식간에 곁을 스쳐 간 남편을 멍하니 바라보던 연주는 정엽이 꿈처럼 사라지기 전 서둘러 인사를 건넸다.

“고마워요.”

“……추워. 나오지 마.”

꿩 깃털이 산뜻하게 휘늘어진 투구를 눌러 쓴 정엽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침실을 떠났다.

추워, 나오지 마. 남편이 남긴 말을 되새기던 연주의 입가에 물감처럼 미소가 번졌다.

‘아무리 떠들어도 따뜻한 대답 한번 듣기 힘든 사람에게서 이런 말을 듣는 날이 다 있구나. 이제 아이가 태어나면 훨씬 더 좋아질 거야. 이곳에서의 생활도, 내 사랑도.’

대수롭지 않은 말 한마디에 마음이 뭉클해진 연주는 정엽의 당부에도 기어이 겨울 창가에 붙어 섰다. 그러곤 먼 길을 떠나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늠름한 부관들을 이끌고 흑마 위에 날렵하게 오른 정엽은 연주가 서 있는 창문 쪽을 흘끗 보고는 무리를 이끌고 사라졌다.

잠깐이었지만 제게 머물렀던 정엽의 시선 한 자락에 연주는 마치 온 세상을 얻은 듯 황홀했다.

‘지금 이 기분을 그이가 돌아올 때까지 소중히 간직할 거야.’

홀로 남은 연주는 가지런히 두 손을 모으고 어쩐지 간질거리는 가슴을 내리눌렀다. 요 며칠 계속되는 사나운 꿈 때문에 마음 한구석의 불안감은 여전했지만, 오늘만큼은 즐겁게 하루를 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가, 너도 좋지?”

하지만 부푼 배를 쓰다듬으며 행복한 표정을 짓던 것도 잠시, 하복부를 중심으로 퍼지는 싸한 통증에 연주의 얼굴이 조금씩 일그러졌다.

“……아가?”

“마마? 마마!”

“아!”

왜, 어째서 지금이니. 지금은 안 되는데. 네 아버지께서 오늘은 일찍 돌아온다고 하셨어.

“마마, 정신을 차리소서!”

먼저 나와서 인사라도 하려고? 아니야, 아가 안 돼. 너는 착하고 순한 아이였잖니. 입덧으로 나를 힘들게 하지도 않고, 태동으로 잠을 깨우거나 아프게 하지도 않고.

그런데. 왜?

“아악!”

칼날 같은 고통이 아랫배를 후비고 지나갈 때마다 연주는 잘 움직여지지도 않는 몸을 바둥거리며 울부짖었다. 사지를 바르작거릴 때마다 산파들은 행여 황손이 잘못되지는 않을까 염려하며 그녀의 몸을 멋대로 이리저리 돌려 놓곤 했다.

“마마, 힘을 주소서!”

진통을 견디느라 온몸을 동그랗게 말고 있던 연주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마치 오장육부가 한 덩어리로 엉켜 배 속에서 굴러다니는 것만 같았다.

아, 어째서 내게 이런 끔찍한 고통이 있으리란 걸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지?

몇 시진째 명주 수건을 입에 물고 숨을 헐떡이는 사이, 연주는 아이가 그녀의 다리 사이에서 발버둥 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했다.

살려 주세요. 여길 나갈 수가 없어. 손끝부터 발끝까지 온몸에서 쿵쿵거리는 절박한 심장 소리가 아이의 절규처럼 들렸다.

“마마, 이제 거의 다 됐습니다!”

“거의 다라면 얼마나……. 얼마나 더……!”

산파에게 되묻던 연주가 불현듯 목을 비트는 듯한 고통에 눈을 질끈 감고 이를 악물었다. 그 순간, 연주는 이 고통이 아이를 만나기 위한 마지막 고비임을 직감했다.

“아기씨께서 나오셨습니다!”

“하…….”

산고 끝에 간신히 자궁을 비워 내자, 전신의 뼈마디가 일시에 부러진 것처럼 몸이 푹 꺼졌다. 성난 파도 위에 누운 듯 온 세상이 빙빙 돌았다.

“마마!”

연주의 몸이 늘어지기 시작하자 노련한 산파들은 그녀의 입 안으로 정체 모를 약물을 부어 넣었다.

“콜록! 콜록!”

목구멍으로 쓴 약물이 쏟아지자 역한 기운에 코와 목이 매웠다. 겨울의 찬 공기가 다리 사이로 밀려드는데도, 역한 피 냄새와 뜨거운 것이 끊임없이 쏟아지는 감각이 생생했다.

“허억!”

“이, 이게 어찌 된…….”

하지만 그보다 강렬한 것은 경악과 당혹감으로 얼룩진 산파들의 목소리였다.

“무슨 일이냐. 아이는……?”

몽롱한 정신에도 등골 저릿한 섬뜩함을 감지한 연주가 허리를 곧추세웠다. 산파들은 연주를 등진 채 저들끼리 황손을 살피고 있었고, 자신의 몸에서 흘러나왔음이 분명한 검붉은 피는 비단 이불에 얕은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아이, 아이는……!”

되묻는 목소리가 절박해졌다. 오래 기다려 온 황손이 태어났는데 산모와 아이에게 쏟아져야 할 축하 인사가 어디에도 없었다.

아, 무언가 잘못됐어.

‘안 돼!’

차마 내지르지 못한 절규가 가슴에 고였다. 밝았던 세상이 순식간에 밤을 맞은 듯 깜깜하게 닫히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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