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외전 10화)
축제 인파는 새벽이 깊어서야 겨우 줄어들었다. 그제야 미미르와 일리시스는 서로 등을 맞대고 앉아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아깝습니다.”
일리시스가 불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서둘러 수습했다곤 하나 역시 축제가 엉망이 되어 아깝다는 뜻일까.
“...보기 좋았는데.”
그렇지. 예정대로였다면 지금도 저기 광장 중앙에서 타오르고 있어야 할 불꽃은 무척 보기 좋은 장관이었겠지.
“지금부터 다시 준비하면 돼.”
“몇 년은 걸릴 텐데 말입니까?"
“몇 년? 왜 몇 년씩이나 걸려?"
미미르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등을 기대고 있던 일리시스로부터 떨어져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일리시스 또한 그녀와 마찬가지로 어딘지 묘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마법사는 원래 머리도 빨리 자랍니까?”
그 말의 뜻을 알아차린 순간 미미르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가 하고 있던 건 불꽃 이야기가 아니었다. 미미르는 버릇처럼 머리카락을 손으로 잡아 돌리려다 손에 잡히는 것이 없자 머쓱하게 시선만 돌렸다.
어깨 위가 유난히 허전했다.
“그, 아. 우리도 소원 인형 불태우고 갈까?"
마침 내일 있을 축제를 대비해 지금부터 노점상을 준비하는 상인이 보였다. 그의 부지런함에 감사하며 미미르는 애써 화제를 돌렸다.
“빌고 싶은 소원이 있습니까?"
“...뭐어, 그냥. 축제니까.”
일리시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그에게 다가가 인형 두 개를 사 왔다.
“보지 마!”
“안 봅니다! 원래 소원은 이뤄지기 전에 남에게 말하면 부정 타는 법이에요.”
미미르와 일리시스는 다시 서로 등을 맞대고 인형 위에 각자 소원을 적었다.
소원을 적다 말고 미미르는 왈칵 몰려드는 설움에 몸을 둥글게 말았다. 뭐라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모든 것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미미르?”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일리시스는 미미르를 돌아봤다. 늘 당당하게 세상을 자신의 눈높이에 맞추던 그녀가 겨울 앞에 둥글게 말린 낙엽처럼 웅크린 채 고개를 처박고 앉아 있었다.
“왜, 왜 그러십니까? 나무 가시에 손이라도 찔렸어요?”
“...역시 마녀가 행복해지는 이야기 같은 건 없어.”
“예?”
갑자기 무슨 소리야. 일리시스는 좀처럼 뜻을 알 수 없는 그녀의 말에 눈만 껌뻑였다.
그 자세 그대로 나무가 되어 버리는 건 아닐까 순간 걱정이 들 정도로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미미르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아래로 살짝 처진 어깨와 가라앉은 녹색 눈동자를 제외하면 여느 때와 같은 미미르였다.
그 모습에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쉰 일리시스는 소원을 다 적었으면 가서 불태우자며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미미르는 그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미미르 님?”
“...조금 전에 힘을 너무 많이 썼나 봐. 움직이질 못하겠어.”
순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일리시스는 눈에 훤히 보이는 그녀의 거짓말에도 아무런 내색 없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일으켜 주었다.
미미르는 일리시스의 손이 유난히 뜨겁다고 생각했다. 혹은 자신의 손이 조금 전의 비구름을 부르느라 차갑게 식은 탓이거나.
두 사람의 소원이 적힌 인형은 불꽃 속에서 한 줌 재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던 일리시스는 연신 옆에 서 있는 미미르를 흘끗거리며 초조하게 마른 입술만 혀로 적시고 있었다.
“할 말 있으면 지금 해."
그것을 진작 눈치챈 미미르가 툭 내뱉듯 말했다. 일리시스는 바닥을 내려다보며 잠시 고민했다. 그러더니 미미르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미미르 님, 당신의 소원 속에 혹시 저도 있었습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며 미미르가 일리시스를 멀뚱히 쳐다봤다. 일리시스는 머뭇거리더니 눈을 질끈 감고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지금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조금 전까지 멀쩡하게 돌아가던 머리가 하얗게 굳어버리더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다시 밝아졌다,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 그의 얼굴이 너무 가까워서, 그 눈빛에 담긴 뜻이 확고해서, 훅 끼쳐오는 종이와 잉크 냄새가 너무 짙어서. 미미르는 그만 그를 뿌리쳐야 한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도 못했다.
“조금 전 확신했습니다. 당신은 필요하다면 자신의 몸을 재료로 삼아 실험할지도 모른다고요. 제가 당신을 보아 온 지가 10년도 훨씬 넘었는데 아니라고는 말 못 하시겠지요.”
“어, 어어....”
일리시스가 이렇게 키가 컸던가? 좁은 어깨를 두고 재킷에 보형물을 넣어야 하는 건 아니냐며 매일 놀렸는데, 품이 이렇게 넓던가? 책도 제대로 못 드는 비실비실한 체력이라며 핀잔을 줬는데, 왜 지금 나는 그를 뿌리칠 수 없는 거지?
가까스로 눈동자만 데구룩 굴려 그를 마주봤다. 그의 눈동자에 비친 세상은 완전히 넋이 나가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는 자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순간 미미르는 깨달았다. 그는 더 이상 시계탑 앞에서 자신의 할아버지를 찾아 발을 동동거리던 어린애가 아니었다.
“미미르 님.”
일리시스가 발음하는 자신의 이름은 질 좋은 깃펜이 내는 사각거림처럼 듣기 좋게 울렸다.
미미르의 소원은 일리시스가 좋은 사람을 만나 행복해지는 것이었다.
그러니 그녀는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아는 모든 마법과 학술 지식을 총동원했지만 타당한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그를 좋아하는 이유처럼, 그냥.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싶지 않았다.
대신 미미르는 그 질문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일리시스, 그러는 네 소원 속엔 나도 있니?"
일리시스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미르의 말문이 막혔다. 무슨 소원이었냐며 장난스럽게 말을 걸어야 하는데, 그럴 수조차 없었다.
일리시스의 고개가 그녀를 향해 기울어지다 말고 멈칫했다. 어느새 그의 얼굴 위로 새벽노을과 불꽃 그림자가 절반씩 서려 있었다.
“허락해 주세요.”
미미르는 눈만 깜빡였다. 그가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싫은 것은 또 아니었다.
어쩌면 자신이 정말 바란 소원은 그가 얼굴도 모르는 다른 사람과 함께 행복해지는 것이 아닌 자신을 사랑해 주길 바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순간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제 소원을 이뤄 주세요.”
“...그거, 마법사에게 부탁하는 거야?"
“아뇨.”
미미르의 입술이 작게 벌어졌다. 마법사가 아닌 인간 미미르에게 허락을 구하는 이유가 뭘까.
일리시스는 그녀의 대답을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미미르는 기어코 가설을 세우고야 말았다. 그리고 이제 그 가설이 진짜인지 확인할 차례였다.
미미르의 발뒤꿈치가 손가락 한 마디 길이만큼 높아졌다. 그녀의 손은 일리시스의 옷자락을 꽉 쥐고 있었다. 불꽃이 서로의 입 안을 넘나들었다. 밤새 꽃이 꾼 꿈으로 한껏 물들어 있던 새벽하늘이 그녀의 볼에도 물감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좋은 사람을 만나서 행복해지라 했더니, 마녀를 만났구나.”
자조 어린 목소리로 미미르는 중얼거렸다. 일리시스는 그녀의 행동에 완전히 넋이 나간 모양이었다.
이야기 속 마녀의 키스는 늘 죽음과 저주를 불러왔다. 그리고 그건 아무래도 사실인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제국의 자랑이신 재상님께서 저런 얼빠진 표정을 할 리가 있나.
한참 만에야 정신을 차린 일리시스는 어째서인지 웃고 있었다. 그는 애써 아래로 당기며 표정을 유지하려 했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일그러진 가면처럼 우스꽝스러운 얼굴로 변해 버렸다.
“마녀를 만나서 행복해질 수도 있지 않을까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말이었다. 마녀를 만나서 행복해진다고? 백일몽에 취해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는 게 아니라?
“미미르 님, 저를 봐 주세요.”
자신이 일리시스가 아닌 그의 어깨 너머에 있는 가로등만 노려보고 있던 것을 들킨 미미르의 어깨가 순간 움찔했다.
“저는 여기 있어요. 지난 십여 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늘 당신 곁에 있었고, 이젠 당신 앞에 있습니다. 그러니 미미르 님, 저를 봐 주세요.”
눈을 마주치는 사람마다 돌로 만들어 버린다는 마물을 마주한다 한들 지금처럼 떨릴까. 미미르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서야 일리시스의 눈을 마주 볼 수 있었다.
하얀 머리칼, 혈색 없는 창백한 얼굴, 가지고 있는 색이라곤 붉은 눈과 새빨간 입술이 전부인 토끼 공작님.
그의 눈동자에 비친 세상엔 미미르의 모습이 가득 차 있었다.
“당신의 곁에 있고 싶습니다. 재상이나 공작 같은 이름 말고, 그냥 저 자신으로.”
“...그거 지금 고백하는 거니?"
조금 전 불꽃 거인에게 퍼부은 물로 부족했니? 왜 이런 심각한 분위기에 다시 물을 끼얹고 그래? 미미르, 너 미쳤니?
“고백하는 것 맞습니다.”
일리시스, 미친 건 내가 아니라 너였구나. 아니, 둘 다 미친 게 분명해. 미쳐 날뛰는 내 심장까지 아주 사이 좋게 미쳐 돌아가는구나!
“미미르. 내가 당신의 곁에서 행복해질 수 있게 허락해 주세요.”
이럴 땐 어떤 대답을 해야 하지? 왜 나는 이런 순간 얼굴과 옷은 다 그을렸고, 머리는 어깨 위로 쥐가 파먹은 듯 마구 잘려 나갔고, 아무튼 엉망인 모습을 하고 있지?
왜 세상은 마녀가 행복해지는 걸 이렇게 방해하는 거지?
“당신을 행복하게 해 주고 싶습니다. 미미르 님, 그러니 허락해 주세요. 제가 당신의 행복에 있어 가장 중요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그제야 미미르는 왜 자신이 행복해질 수 없었는지 깨달았다. 가장 큰 방해물이 평생 그녀의 곁에 있었다.
자신이 그 그림자 속에 있다는 것마저 인식하지 못할 만큼 커다랗고 기꺼운 방해물이었다.
“...나는 어쩌고 공작 부인 따위로 불리고 싶지 않아.”
“당연하지요! 어딜 감히 시계탑의 주인과 무슨 무슨 공작 부인을 비교합니까?"
“그럼 너랑 결혼 못 하는데?"
“...법전을 찾아보겠습니다. 분명 써먹을 수 있는 구절이 있을 거예요.”
“만약 없으면?”
“까짓거, 만들면 되는 일입니다.”
“권력 남용 아니니?”
“제가 그동안 해 온 일이 얼마인데 고작 이런 것 하나 못 하면 당장 사표 내야지요.”
“한마디도 지는 법이 없구나.”
“지는 건 체스만으로 충분하니까요.”
결국 미미르는 울음을 터트렸다. 일리시스는 울먹이는 얼굴로 애써 미소를 짓는 미미르의 모습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해했다.
광장 중앙, 작은 모닥불 하나만이 전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증명하는 가운데 사람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들은 엉망이 된 붉은 머리칼의 여자와 마찬가지로 새빨개진 얼굴을 한 채 서툰 동작으로 그녀의 등을 토닥이는 사내의 모습에 눈치껏 고개를 돌리며 그 주위를 지나쳤다.
긴장이 풀리자 피로와 졸음이 쏟아져 내렸다. 미미르는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 졸려. 가서 잘래.”
“그래요. 저도 사흘 밤을 철야로 보냈더니 슬슬 지치는군요.”
“시계탑에서 가장 조용하고 안락한 곳을 내어 줄게.”
“그런 곳이 있었나요?”
"시계탑의 주인이 가지 못하는 곳은 없어....”
그 말을 마지막으로 미미르는 휘청거리는 몸에서 남은 마나를 짜내어 시계탑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
일리시스는 완전히 축 늘어진 미미르를 가까스로 부축하며 시계탑으로 향했다.
익숙한 마나와 머리맡에 말려 걸어 놓은 약초 향기로 가득 찬 공간, 등 뒤에 닿는 푹신하고 따스한 감촉에 파묻히며 미미르는 생각했다.
할아버지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자신은 마녀에, 탑 속에 있고, 하얀 말을 탄 기사님은 아니어도 하얀 머리칼과 검보다 매서운 혀를 가진 친구가 있었다.
그러니 자신의 이야기는 세상에서 누구보다 행복한 마녀 이야기였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