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황제폐하가 시곗바늘을 되돌린 사연-129화 (129/130)

129화 (외전 9화)

사람들은 불꽃을 보며 즐거워했다. 불꽃은 그들의 웃음소리를 양분 삼아 무럭무럭 크기를 키우기 시작했다.

저마다 작은 나무 인형에 소박하거나 아주 허황해 농담거리로 삼을 법한 소원을 적어 불꽃 속으로 던져 넣었다.

불꽃은 그들의 소원을, 웃음을, 행복한 얼굴을 전부 기억하며 오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올해 불꽃은 유난히 크고 성대하다고 여길 뿐 그가 울고 있다는 것만은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설상가상, 미미르와 앨리스의 마력이 너무 강했던 탓에 시계탑의 마법사들 또한 불꽃이 위험할 정도로 넘실거리는 이유를 그들의 탓으로 돌렸다.

단 한 사람, 앨리스만이 심상찮은 불꽃의 기운을 보고 불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앨리스, 왜 그래?”

“응? 아, 아냐. 그냥...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래서? 애들은 어떻게 지내?"

앨리스는 애써 불안한 마음을 한쪽으로 밀어 놓았다. 모처럼 한자리에 모인 가족보다 소중한 얼굴들이었다. 기왕이면 웃는 모습만 보여 주고 싶었다.

그러나 앨리스의 행복한 순간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불꽃은 끝없이 자신의 입 속으로 밀려 들어오는 사람들의 소원을 다시 토해 내고 싶었다.

행복해지게 해 주세요.

사랑하는 사람과 이어지게 해 주세요.

저희에게도 황녀님과 황자님 같은 아이를 내려 주세요.

그들이 바라는 것은 마녀가 절대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한 것들이었다.

가장 간절한 소원이 심장에 닿은 순간 불꽃은 몸을 일으켰다. 사람들은 불꽃이 화르륵 소리와 함께 말 그대로 커다란 거인 모습으로 변하자 와, 하며 감탄했다.

하얗게 얼굴이 변한 앨리스가 카페를 뛰쳐나갔다.

“앨리스! 어디 가?”

“저거! 저거 저거!”

“저거...? 히익! 저게 뭐야!”

“애들 데리고 당장 피해!”

앨리스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인파를 피해 골목 사이사이 서 있을 시계탑의 마법사들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불의 거인 또한 불꽃 축제의 일부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점점 더 불꽃을 향해 몰려오는 탓에 사람을 찾기는커녕 당장 그녀 자신의 몸조차 제대로 가누기 힘들 지경이었다.

불꽃 거인은 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 끝으로 향했다. 이어서 거인의 손이 바닥을 쾅 짚었다. 돌로 된 광장 바닥이 자글자글 소리를 내며 녹아내렸다.

사람들은 혼비백산하며 마구 달아나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광장에 앨리스와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차린 마법사 몇, 그리고 술에 취해 만용만 남은 어리석은 사내 두엇만 남았다.

“너! 당장 스승님을 모셔 와!"

앨리스는 자신이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물 속성 마법을 시전하며 주위에 보이는 아는 얼굴에게 명령했다.

마법사는 불꽃 거인과 앨리스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퍼렇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텔레포트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내였던지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사람들을 대피시키는 한편 거인이 광장 밖으로 가지 못하도록 어떻게든 발을 묶어 놓아야 했다.

마법사들이 힘을 모아 물을 끼얹어 댔지만 그때마다 불꽃 거인의 몸에 치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짙은 수증기만 일어날 뿐,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누가 스승님이 만든 불꽃 아니랄까 봐! 더럽게도 활활 잘 타오르네!”

그 불꽃의 절반은 자신이 만들었다는 것을 애써 외면하며 앨리스는 빠드득 이를 갈았다.

눈치 빠른 누군가, 혹은 마침 그 자리에 있던 황궁 출입이 가능한 사람이 황실에 소식을 전달했던지 얼마 지나지 않아 빅토리아 레인을 위시한 황실 근위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레인 경!”

“앨리스 양! 이게 대체 어떻게 된... 맙소사. 일단 대피부터 끝내고 나서 이야기해야겠군요. 부디 몸조심하시길.”

빅토리아는 빠르게 할 말만 마치고 일사불란하게 사람들을 지휘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입고 있는 것은 근위대의 정복이었다.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와 믿음직스럽고 위엄 있는 얼굴은 주목을 끌기에 부족함 없는 모습이었다.

사람들은 그녀와 근위병들의 지휘에 맞춰 천천히, 그러나 질서정연하게 광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사이 마법사들은 광장에 결계를 설치했다. 하필이면 바람마저 불꽃 거인을 목조 건물이 많은 곳으로 안내하고 있었다.

데굴데굴 굴러가는 바위 앞에 계란으로 울타리를 세운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없는 것보단 나았다.

“앨리스!”

“스승님?”

자신의 몸이 감당할 수 있는 마나는 물론, 필요하다면 마나 대신 수명을 깎아 내서라도 저것만은 막아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버티고 있던 앨리스는 미미르를 보는 순간 그만 긴장을 놓치고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 * *

시계탑 꼭대기에서 멍하니 불꽃이 타오르는 것을 망원경으로 지켜보고 있던 미미르는 이내 망원경에서 눈을 떼고 바닥에 드러누웠다.

지금쯤 일리시스는 내일 있을 연회의 마지막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테고, 사람들은 한창 즐거울 테고, 그리고 나는....

그런 감상에 빠지느니 차라리 잠이나 자자는 생각으로 막 팔베개를 하고 눈을 감으려던 찰나, 누군가 방문을 쾅쾅쾅 두드려 댔다.

그리고 소식을 듣자마자 미미르는 광장으로 이동했다. 원인은 확신할 수 없었지만, 짚이는 것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었다.

'설마 그 문장이 정말로 마법의 일부인 건 아니겠지?'

미미르는 자신이 만들어 낸 (걸지도 모르는) 불꽃 거인을 올려다보며 입을 쩍 벌렸다.

“누가 만들었는지 정말 활활 잘도 타오르네!"

“그게 지금 하실 말씀이세요? 시계탑의 주인이잖아요! 뭐라도 하셔야죠!”

앨리스가 빽 고함을 질렀다. 미미르는 손깍지를 끼고 손목을 탈탈 털더니 소매를 걷어 올렸다.

역시 마녀가 행복해지는 이야기 따윈 세상에 없다. 아니, 그런 이야기가 있다 한들 그 주인공이 자신이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미미르는 조금 서글픈 심정으로 불꽃 거인을 대적하기 시작했다. 불꽃은 그녀의 검은 속마음을 대변하듯 더욱 거세게 타올랐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승자는 미미르였다.

그녀는 어중간하게 불꽃을 향해 물을 끼얹는 대신 아예 비구름을 만들어 냈다.

짙푸른 하늘은 순식간에 검게 물들었고, 계절을 조금 앞당기기라도 한 듯 억수 같은 장대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차갑고 커다란 빗방울은 천천히 불꽃을 다독이고 진정시켰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것이 종료되었을 때, 사람들이 환호성을 울리기도 전에 미미르는 다시 불꽃 거인이 있던 곳으로 뛰어갔다.

비 따위론 꺼지지 않는 마지막 불꽃이 아직 남아 있었다.

불꽃 축제 기간 동안 비가 오더라도 불씨만큼은 지킬 수 있도록 걸어 놓은 마법 덕분이었다.

미미르는 주저 없이 불꽃 위로 몸을 내던졌다.

등 뒤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앨리스의 목소리가 들렸던 것 같기도 했다.

불꽃은 하늘로 떠나는 대가로 그녀의 머리칼을 요구했다.

비록 아주 잠깐이었지만 자신이 얼마나 아름다운 불꽃이었는지 기억하고 싶다는 말에 미미르는 주저 없이 자신의 머리칼을 내어 주었다.

그렇게 불꽃은 물도, 두꺼운 천도 아닌 마녀의 붉은 머리칼을 덮고서야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미미르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광장 곳곳이 불에 녹고 검게 그을린 자국으로 가득했다.

불씨가 다른 곳으로 옮겨붙거나 사람이 다치지 않은 게 말 그대로 기적이나 다름없는 수준이었다.

불꽃 축제를 준비한 장본인이자 불꽃 거인을 만들어 낸 당사자인 미미르는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미미르!”

저 멀리서 일리시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마 상황이 상황인지라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온 것이겠지.

절대 내가 걱정되어서 온 건 아닐 테니까, 혹시 모른다는 기대 따윈 하지 말자. 미미르.

미미르는 그렇게 생각하며 일리시스를 향해 몸을 돌렸다. 누가 토끼 공작님 아니랄까 봐 위험한 일이 다 끝난 뒤에야 온다며 한바탕 놀려 줄 생각이었다.

“뭐야, 이제 오는... 일스?”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지 못했다. 아니, 몸으로는 알고 있지만 머리까지, 이성까지 닿지 못했다.

“미미르! 다친 곳은, 어디 다친 건... 맙소사! 당신 머리카락이... 어디, 화상 입은 곳은 없습니까? 없는 것 맞죠? 예?”

“...너 지금 나 걱정하니?”

허둥지둥 미미르의 얼굴에서 그을음을 지워 내고 어디 다친 곳은 없는지 손가락 사이사이까지 꼼꼼하게 살펴보던 일리시스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그녀를 쳐다봤다.

미미르는 그가 세 번쯤 눈을 깜빡인 뒤에야 그 침묵이 긍정을 뜻하는 것을 알고 입을 쩍 벌렸다 다시 다물기를 반복했다.

“그럼 당연히 당신을 걱정하지, 누굴 걱정합니까? 막말로 광장은 새로 만들면 된다지만 당신은... 당신은 하나밖에 없는 시계탑의 주인 아닙니까!”

아, 역시나. 미미르는 순간 피가 싸늘하게 식는 것을 느꼈다. 조금 전까지 불꽃을 상대로 뜨겁게 끓어오르던 피가 식자 온몸이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그는 자신을 걱정하고 있었다. 왜? 그야 자신이 하나뿐인 시계탑의 주인이니까.

아직 앨리스는 주인 자리에 앉기 부족하고, 다른 사람들 또한 고만고만했다. 이미 현역에서 물러난 사람을 다시 부르기에도 애매한 상황에서 자신이 죽기라도 한다면... 재상으로서 상당히 곤란해지겠지.

그런 와중에도 살아 있어서 다행이라고, 그래서 그가 해야 할 일이 하나라도 줄어들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미미르?”

“그래도 불꽃 축제인데 임시 불꽃이라도 만들어 놔야지.”

일리시스의 품에서 벗어난 미미르는 부러 차갑게 말하며 광장 중앙으로 돌아갔다.

그녀의 입을 타고 마나가 움직였다. 녹아내리고 그대로 흉하게 굳어 버린 돌조각이 다시 아름다운 꽃문양이 새겨진 벽돌로 돌아갔다.

엉망이 된 광장이 다시 새로 길을 낸 곳처럼 돌아오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마법을 해낸 미미르의 모습은 사람들에게 무척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어서 미미르는 근처에서 사람들을 몸으로 막고 있던 근위병의 허리에서 검을 뽑아내더니 광장 중앙으로 향했다.

일리시스는 그녀가 뭘 하려는 건지 몰라 눈만 깜빡이며 우선 지켜보았다.

미미르는 주저 없이 자신의 팔을 그어 냈다.

“미미르!”

"괜찮아. 다른 것도 아니고 내 피가 매개체니까, 언제든지 내가 끌 수 있어.”

미미르는 검을 쥐고 있던 팔을 뻗어 일리시스를 제지했다. 그녀가 몇 마디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자 다시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런 게 아니라, 미, 미, 미. 미... 쳤습니까?"

“으잉?”

대체 무슨 말을 하려나 싶더니 갑자기 생사람에게 미쳤냐는 시비를 걸어오네? 미미르의 미간이 순식간에 좁혀졌다.

"야, 나 아직 손에 칼 들고 있거든?"

"마, 마법사의 칼 따위! 하나도 무섭지 않습니다! 아니, 무슨 도축장에서 짐승 피 뽑는 것도 아니고 대체 무슨 짓이에요!"

"그럼 마법사의 마법은? 나 다른 손은 멀쩡하다? 그리고 그 비유는 뭔데! 지금 나한테 시비 거니? 광장 다시 녹여 줄까?"

"어차피 제 돈으로 수리하는 거 아니니 상관없습니다! 그보다 상처, 빨리 상처 치료나... 다 나았네?"

"그럼 내가 피 질질 흐르는 팔로 다시 시계탑에 돌아갈까 봐? 치료 마법은 뒀다가 어디다 쓸래?"

일리시스는 입을 쩍 벌렸다. 미미르는 조금 통쾌한 기분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검을 주인에게 돌려주고 사람들을 향해 웃으며 손짓했다.

"시계탑의 주인, 미미르가 보증하는 안전한! 불꽃이니 다시 축제를 즐기세요!"

내 몫까지. 이어지는 환호성이 뒷말은 굳이 숨기지 않아도 아무도 듣지 못했을 것이다.

미미르는 생글생글 웃으며 행복해지는 마법을 걸어달라는 사람들에게 적당히 반짝이는 나비나 꽃을 허공에 만들어 보이며 상대했다.

미미르의 '안전한' 불꽃 속으로 다시 소원을 적은 인형이 하나둘 들어가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조금 전과 같은 일이 벌어지면 안 된다는 이유로 일리시스와 미미르는 마지막까지 자리에 남기로 했다.

"내가 여기 있는 건 당연한 일인데, 너는 도움도 안 될게 뻔한데 왜 여기 있니?"

일리시스는 어딘지 굉장히 불편한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고 대답을 거부했다.

미미르 또한 딱히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던지 어깨를 으쓱이고 다시 몰려든 사람들에게 간단한 환영 마법을 걸어 주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