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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폐하가 시곗바늘을 되돌린 사연-128화 (128/130)

128화 마녀가 행복해지는 이야기 (외전 8화)

마녀가 행복해지는 이야기 따윈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어느 동화책을 펼쳐도, 마녀는 늘 죄 없는 아름다운 공주님을 미워하고 질투할 뿐이다.

용과 함께 자신을 구하러 오는 왕자님을 시험하는 공주님 이야기나 스스로 용을 물리치고 왕자님을 찾으러 가는 공주님 이야기는 간간이 들리기 시작했어도 마녀와 함께 살았다는 이야기는 아직까지 들어 본 적 없었다.

할아버지는 왜 마녀가 행복해지는 이야기는 없냐던 내 질문에 웃으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마녀가 될 거고, 여긴 탑이니까, 내가 행복해진다면 내 이야기는 분명 행복한 마녀 이야기일 거라고.

...그래서 나는 과연 행복한가?

“하아아....”

“한숨 좀 그만 쉬세요! 아니면 혹시 한숨도 재료 중 하나였나요?”

앨리스의 말에 미미르는 눈만 깜빡이며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아주 깊고 천천히. 그 모습을 보던 앨리스의 얼굴에 이제 분노를 넘어 황당한 기색마저 보이고 있었다.

“스승님, 무슨 일 있으셨어요? 혹시 쌍둥이... 황자님들이 사고라도 치셨나요?"

“태어난 지 아직 한 살도 안 된 아기들이 사고를 쳐 봤자 뭘 치겠니....”

“...비비안 전하께선 그러셨잖아요.”

“으음.”

미미르는 애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 자리에 비비안이 없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반, 대체 태어난 지 반년밖에 지나지 않은, 꼬맹이라는 말보단 부스러기에 가까웠던 황녀님이 그런 사고는 어떻게 친 건지 하는 호기심이 반이었다.

“역시 봄이라서 그런가? 다른 사람들도 영 실험에 집중을 못 하고 창밖만 바라보고. 그런다고 어디서 운명의 상대가 나타나는 줄 아나?"

앨리스는 시니컬한 어조로 종알거리며 연신 커다란 솥을 휘휘 저어 댔다. 사랑은 바보나 하는 것. 그것이 너무 일찍 세상을 알아 버린 그녀의 신조였다.

“...나타날지도 몰라.”

“네?”

이게 무슨 시계탑의 주인이 갑자기 사제가 되어 신전의 주인이 되겠다는 소리야. 깜짝 놀란 얼굴로 미미르를 돌아본 앨리스는 속으로 경악했다.

미미르는 창밖을 보고 있었다. 정확하겐, 창문 너머로 보이는 하얀 정수리를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앨리스는 바보를 스승으로 삼게 생겼다며 속으로 가슴을 치기 시작했다.

손으로 허공을 한 번 휘젓기만 해도 달큰한 꽃향기가 손가락 사이마다 감긴다는 무르익은 봄, 따사로운 햇살 아래 턱을 괴고 창밖을 보고 있던 미미르의 옆모습은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사람의 얼굴이었다.

앨리스와 미미르는 얼마 뒤에 있을 불꽃 축제 준비에 한창이었다.

해안가 도시의 불꽃 축제와 달리 내륙의 불꽃 축제는 폭죽을 쏘아 올리는 대신 커다란 모닥불이 주인공이었다.

달까지 닿을 만큼 높고 환하게 타오르는 불꽃 속으로 사람들은 소원을 적은 인형을 던져 넣으며 소원을 빌거나 삼삼오오 모여 원을 그리며 춤을 춘다.

달콤한 봄, 어둑한 하늘 아래 은은한 불꽃, 축제랍시고 잔뜩 차려입은 사람들 사이에서 유난히 눈에 들어오던 너.

...따위 노래가 불꽃 축제에서 맺어진 연인들은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소문과 함께 음유시인의 입을 타고 퍼지기 시작했다.

미미르와 앨리스는 그렇게 중요한 모닥불이 안전하게, 오래오래, 아주 환하게 축제 기간 내내 유지될 수 있도록 특수한 장작을 만들고 있었다.

“스승님, 이거 얼마나 넣으면 되나요?”

앨리스는 밀가루처럼 하얀 가루가 들어 있는 자루를 들어 올리며 물었다.

여전히 창밖만 보고 있던 미미르는 건성건성, 대충대충. '적당히 알아서 잘' 넣으라는 말과 함께 손을 내저었다.

앨리스는 미간을 잔뜩 좁히며 완전히 넋이 나간 자신의 스승과 포대 자루를 번갈아 쳐다봤다.

[인화성 물질: 위험도 극상]

자루에 적혀 있는 글씨가 무안함을 견디지 못한 나머지 거꾸로 뒤집어질 노릇이었다.

앨리스의 따끔한 잔소리가 한바탕 이어졌다. 미미르는 사람들에게 있어 불꽃이 가지는 의미와 그 중요성을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그대로 흘리며 반사적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앨리스는 영 못 미더운 얼굴로 자신의 스승이 장작에 사용할 재료를 마저 조합하는 것을 바로 곁에서 지켜봤다.

실험이나 연구를 할 때만큼은 누구보다 진지해지는 미미르는 먼지 한 톨 수준의 오차도 허투루 넘기는 법 없이 꼼꼼하게 시료를 배합하고 순서대로 섞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 불꽃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행복해지길 바라는 마음을 가득 담아 젓는다...?"

참고용으로 곁에 펼쳐 둔 책을 소리 내어 읽던 앨리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둥글게 젓는다, 8자로 젓는다, 지그재그로 젓는다, 같은 젓는 방법이 아니라 마음을 담아 저으라니?

“그거, 그냥 무시하고 대충 저어도 상관없어.”

“네?”

심드렁한 미미르의 말에 앨리스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옛날부터 축제용 장작을 만드는 건 우리 몫이었거든. 다른 사람들은 축제라고 새 옷을 만드네 뭘 하네 잔뜩 들떠 있는데 우리는 탑에 처박혀서 일이나 하고 있잖아. 성격 고약한 애들이 혹시라도 못된 마음을 먹을까 봐 경고의 의미로 적어 놓은 거야. 방금 너, '혹시 이것도 마법의 일종은 아닐까?'라며 은근히 긴장했지?"

“...그걸 어떻게 아세요?"

미미르는 대답을 거부했다. 앨리스는 의심스럽다는 표정으로 미미르를 빤히 쳐다봤다. 그녀가 어물어물 말꼬리를 흐리며 대답했다.

“...전부 다는 말고 나만 행복하게 해 주세요, 하는 생각으로 만들었는데, 뭐. 모두 행복하게 잘만 놀더라.”

미미르는 슬쩍 입술을 내밀었다. 앨리스가 뭐 이런 애매하게 나쁜 사람이 다 있냐는 시선으로 그녀를 다시 쳐다봤다.

쌍둥이 황자들의 탄생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이번 불꽃 축제는 여느 때보다 훨씬 성대하게 열린다고 했다. 덕분에 시계탑에서 마법 좀 한다는 사람들은 전부 불꽃 축제에 매달린 상태였다.

그래도 모처럼 열리는 축제에 흥미가 아주 없던 건 아니었던지 앨리스가 은근한 목소리로 미미르에게 물어 왔다.

“스승님, 불꽃 축제에는 저도 갈 수 있나요?"

제자의 속마음을 단번에 알아차린 미미르는 시원시원하게 웃으며 가서 새 옷이라도 하나 사 입으라며 금화 하나를 내밀었다.

“여기는 내가 보고 있을 테니 걱정 말고 다녀와.”

앨리스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시계탑을 빠져나갔다. 미미르는 웃으며 의자 하나를 더 빼내 발을 걸치고 앉아 책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녀의 곁에선 온갖 재료가 들어간 솥이 부글부글 소리를 내며 끓고 있었다.

이대로 열 시간 동안 꼬박 끓여 내면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끔찍한 초록색을 띠고 있던 액체는 물엿처럼 투명하게 변해 쫀쫀한 점성을 가지게 된다.

그 액을 모닥불의 씨앗이 될 장작에 골고루 바르는 걸로 불꽃 축제 장작 준비는 끝난다.

조금 전까지 앨리스가 하고 있던 일은 솥이 넘치거나 이상 현상이 일어나진 않는지 10시간 동안 지켜보는 일이었다.

현장에서 폭발 방지 마법, 화재 대비용 물 속성 마도구 설치 등등 몸이 두 개여도 모자라게 움직이던 사람들이 알면 부러워 넘어갈 정도로 간단한 일이었지만 동시에 그만큼 지루한 일도 없었다.

미미르는 가져온 책을 읽다 말고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쭉 켰다.

'불꽃 축제라....’

평소엔 마법 외엔 관심 없는 척 행동하면서도 역시 아직 그런 일에 가슴이 두근거릴 나이인 제자와 달리 자신은 아무런 감흥도 없었다.

이게 다 일리시스 때문이었다.

그 망할 하얀 토끼 공작이 축제에 같이 가자는 부탁을 거절만 안 했어도 아마 지금쯤 솥은 끓든 녹든 내버려 두고 앨리스와 함께 밖으로 뛰쳐나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미미르는 북북 이를 가는 대신 한숨만 내쉬었다.

그래, 매년 돌아오는 축제가 뭐 그리 대수라고. 황자가 태어났건 누가 하나 죽었건 불꽃은 활활 피어오를 거고, 황제 폐하와 그 일가를 비롯한 귀족들 또한 연회에 참여할 거고, 그럼 그 준비며 기타 자잘한 사안들까지 모두 제국의 재상이자 황제의 비서이기도 한 일리시스가 한 번은 살펴봐야 한다.

그렇지 않아도 그런 이유로 자신의 부탁을 거절하게 되어 미안함과 황송함에 어쩔 줄 몰라 하던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차라리 미안해하지나 말지. 처음부터 축제 따윈 생각 없었다는 듯 굴든가, 아니면 차라리 같이 갈 사람이 있다고... 이건 싫어. 그냥 일에 치여서 축제에 못 간다고 하는 게 나아.

어느 쪽이 더 비참한지 잠시 고민하던 미미르는 어느 쪽이든 지금보단 나았을 거라며 애써 마음을 달래 보았다.

자그마치 십 년이 넘은 우정이었다. 그러는 사이 친구 둘은 이미 아이까지 낳았다.

연회에 마땅히 함께 갈 만한 파트너가 없어서, 또는 아직까지 결혼하고 싶지 않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로 종종 연회에서 파트너로 입장하긴 했지만 여전히 그와 그녀는 친구였다.

적어도 그는 그럴 것이라고 미미르는 생각했다.

저딴 토끼 공작님이 대체 어디가 그리 좋냐고 몇 번이고 자신에게 물었지만 그때마다 돌아오는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그냥.

그냥 좋았다. 보고 있으면 연신 입을 오물거리는 토끼처럼 꼼질거리는 모습이 좋았고, 감히 마녀를 상대로 체스에서 밀리지 않는 똘똘한 머리도 좋았고, 자그마한 일에도 화들짝 놀라는 주제에 작정하고 일을 터트리면 상대방이 모두 아연실색하게 하는 일 처리 능력도 전부 좋았다.

이유 없는 사랑에는 답도 없다던데. 처음 자신의 감정을 자각한 미미르는 한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체스마저 잠시 멈추고 일리시스를 피해 다녀야 했다.

그렇게 가까스로 갈무리한 감정이었다. 그냥 이대로, 홀로. 바닥이 타 버린 설탕시럽처럼 쓰고 달콤한 감정을 끌어안고 지내면 될 일이었다.

어차피 마녀가 행복해지는 이야기 따윈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미미르는 애써 그렇게 생각하며 억지로 머릿속에서 일리시스를 지워 냈다. 봄이라서, 축제라서,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던 일리시스의 표정이 유난히 안타까워 보여서 조금 흔들렸을 뿐이었다. 그래야 했다.

마녀가 자신의 감정 앞에서 눈을 감고 거짓말을 하는 사이 솥에는 들어가선 안 될 것이 들어갔다.

그러나 미미르는 한숨을 내쉬며 눈두덩이를 꾹꾹 누르느라 그 장면을 미처 보지 못했고, 그렇게 마녀의 가장 밑바닥에 고여 있던 새까만 마음은 솥 속으로 스멀스멀 기어 들어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른 재료와 함께 녹아들었다.

* * *

“이걸로 끝! 고생 많았어, 앨리스.”

“와아! 이제 저 놀러 가도 되는 거죠?"

미미르의 허락이 떨어졌다. 앨리스는 반쯤 허공을 날다시피 해 밖으로 뛰쳐나가더니 들꽃 자수가 사랑스러운 푸른 원피스 차림으로 돌아왔다.

“어때요?”

미미르는 제 앞에서 그럴듯하게 한 바퀴 돌아 보이는 앨리스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너 혹시 누구 만나기로 했니?"

“고아원 친구들이랑 모여서 놀기로 했는데요?”

“...그래. 즐겁게 놀다 오고, 적당한 선에선 내 이름 대고 외상 해도 돼."

"...스승님, 혹시 어디 아프세요? 혹시 조만간 유산 상속을 하신다거나...."

갑작스러운 미미르의 배려에 앨리스는 당황해하며 그녀의 안색을 살피기 시작했다.

미미르는 그런 말 할 틈이 있으면 빨리 가거나 하라며 앨리스의 등을 떠밀었고, 그렇게 불꽃 축제는 무사히 시작되는 듯 싶었다.

붉은 노을이 지고 한 발짝 떨어져 걷던 예비 연인들이 그리 번잡하지도 않은 길에 사람이 너무 많다며 은근슬쩍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기 시작할 무렵.

드디어 준비된 장작 속으로 이야기의 씨앗이 될 마법 장작이 들어가고 불이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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