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황제폐하가 시곗바늘을 되돌린 사연-127화 (127/130)

127화 (외전 7화)

“...거미?”

아차, 빅토리아는 뒤늦게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이미 비비안의 머릿속에선 황궁을 공격하는 거대 개미가 거대 거미로 바뀐 뒤였다.

“거미는... 거미는...”

“절대! 절대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 빅토리아 레인, 저의 모든 것을 걸고 전하를 지켜내겠습니다!”

빅토리아는 기사로서의 사명감은 물론 어린 아이를 울려선 안 된다는 마음의 소리를 듬뿍 담아 가슴을 탕탕 내리치며 맹세했다.

그 마음이 비비안에게 무사히 닿았는지 비비안은 빅토리아의 진지한 시선을 똑바로 쳐다보며 코만 훌쩍였다.

“그런데, 훌쩍. 레인 경. 크응, 흥!”

비비안은 손수건을 찾아 다시 주머니를 뒤졌다. 이럴 때를 대비해 유모가 숨겨 놓은 손수건이 분명 하나쯤은 있을 텐데...

몸 여기저기를 더듬는 사이 하얀 면 손수건이 불쑥 내밀어졌다. 비비안은 고개를 들어올렸다. 빅토리아가 자상한 웃음과 함께 그녀에게 자신의 이니셜이 새겨진 손수건을 내밀고 있었다.

"고마워요, 레인 경.”

“이 손수건은 이제 레인 가문의 가보로 보관해야겠군요.”

비비안은 머쓱한 얼굴로 갈색 실로 수놓인 빅토리아의 이니셜만 만지작거렸다.

“레인 경, 경에게 물어볼 게 있어서 왔어요.”

잠시 하늘을 보고 시간을 가늠하던 아일라가 비비안을 대신해서 상황을 정리했다.

빅토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물어볼 것? 황녀도 기사가 될 수 있냐는 질문일까?

“레인 경에게 있어 '지킨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요?”

빅토리아의 머릿속으로 스승님의 한탄이 스쳐 지나갔다. 엄마, 아빠, 하며 종알거리기 시작하던 아들이 어느새 말끝마다 '왜요?'를 붙여가며 자신을 철학자로 만들고 있다는 하소연이었다.

그 때는 그저 스승님의 아들이 귀엽고 대견해서 웃으며 이참에 인문서적도 조금 읽어보라며 넘겼는데, 그 업보가 이런 식으로 돌아올 줄이야.

비비안과 아일라는 눈을 빛내며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빅토리아는 근위대 면접관 앞에서도 느껴본 적 없는 부담감에 식은땀을 흘리며 침을 삼켰다.

“지킨다는 건...”

두 소녀의 시선이 턱 바로 아래까지 바싹 달라붙었다. 빅토리아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마음속 깊이 품어 두었던 대답을 꺼내놓았다.

“누군가가 안심하고 웃을 수 있도록 만드는 일이랍니다.”

“안심하고 웃을 수 있게?"

빅토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비비안은 물에 비친 그림자처럼 좀처럼 선명하게 다가오지 않는 의미에 인상을 찌푸렸다.

“비비안 전하께선 누가 안심하고 웃길 바라시나요?”

비비안의 작고 동그란 머릿속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바마마, 어마마마, 할마마마, 할바마마, 아일라 고모님, 미미르, 일리시스, 앨리스, 빅토리아, 유모랑 그리고 또...

누구 한 사람 콕 집어 말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아바마마. 아바마마가 다시 웃으셨으면 좋겠어.”

비비안의 머릿속에서 생글생글 웃던 얼굴들이 순간 실망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황제 폐하께서요? 이유를 여쭐 수 있을까요?”

비비안은 그들에게 착한 일을 했을 때만 먹을 수 있는 꿀 사탕을 나눠주는 상상을 하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마마마께서 동생을 가지신 이후로 아바마마께서 웃는 일이 줄어들었어. 처음에는 굉장히 기뻐하시고, 막 웃고, 막 나를 이렇게 번쩍! 들어올려 껄껄 웃으셨는데... 요즘은 매일 어마마마 손만 꼭 붙잡고 한숨만 푹푹 내쉬잖아.”

난산에 가까웠던 초산이었다. 다시 그녀가 아이를 가졌다는 말에 레온하르트는 순수하게 기뻐할 수 없었다.

그런 사실을 잘 아는 빅토리아는 이 일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며 아랫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내가 아바마마를 다시 웃으시게 할 수 있을까?"

“...전하 외에 이 황궁의 누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요.”

너무 깊이 생각한 나머지 빅토리아는 비비안의 질문에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아바마마께서 다시 웃으실까?"

딱히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는지 비비안은 구두 앞코로 바닥만 톡톡 치며 홀로 고민에 빠졌다.

“다시 아바마마랑 어마마마랑... 웃으시면 좋을 텐데...”

빅토리아는 슬쩍 아일라의 눈치를 살폈다. 아일라는 하나뿐인 조카의 고민이 자신이 해결해줄 수 없는 종류의 것이라는 것을 알고 조금 시무룩해져있었다.

그 때였다.

가장 먼저 낯선 이의 기척을 느낀 것은 빅토리아였다. 여차할 경우 두 어린아이의 눈앞에서 총을 쏠 각오를 다지던 빅토리아는 야트막한 언덕 너머 치맛자락을 꼭 붙잡고 반쯤 데굴데굴 굴러오는 황태자궁 소속 유모의 모습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아이고! 황녀님들! 여기 계셨구나, 비비안 전하! 아일라 황녀님! 지금, 아이고, 아이고 숨 차, 지금 이러고 계실 때가 아닙니다!”

“유모?”

“레인 경, 황후마마께서... 마마께서...!”

“진통이 오신 겁니까?”

빅토리아는 차가운 물 한 컵을 건네며 물었다. 유모는 그 자리에서 물을 전부 마시고 깊은 숨을 내뱉은 뒤에야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진통이 뭐야?”

비비안의 말에 유모는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

분명 이럴 때를 대비해서 몇 번이고 '비비안 전하,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을 꼭 기억하세요’로 시작하는 교육을 했던 것 같은데.

심상찮은 유모의 말과 갑자기 덩달아 갑자기 심각해진 빅토리아의 얼굴에 비비안은 덜컥 겁부터 집어먹었다.

뒤늦게 아일라가 그녀에게 이제 곧 동생을 만날 수 있다고 둘러 설명했지만 비비안의 얼굴은 이미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이럴 때가 아니지! 비비안 전하, 황녀님. 이만 가셔야 합니다. 레인 경, 황궁에 개미 한 마리도 얼씬거리지 못하도록 부탁드립니다!”

자신이 할 말만 장대비처럼 와르륵 쏟아낸 유모는 그 길로 비비안과 아일라를 양 손에 붙잡고 사라졌다.

작별 인사를 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빅토리아는 멍한 얼굴로 뒤늦게 인사를 하려다, 그녀가 부탁한 일이자 지금부터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떠올리고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어마마마는? 아바마마는? 할바마마랑, 할마마마랑, 다 괜찮으신 거지?”

황태자궁으로 돌아온 두 소녀는 유모에게 등을 떠밀려 곧바로 욕실로 들어가야 했다.

“황후 마마는 황제 폐하가 곁에 계시니 괜찮지만, 다른 분들은 전하께서 지켜주셔야 해요.”

“내, 내가?”

평소보다 조금 거친 손길로 유모는 비비안의 손을 벅벅 씻겼다. 곁에서 함께 손을 씻던 아일라도 그 말에 깜짝 놀란 얼굴로 비비안을 돌아보았다.

“그래도 아일라 황녀님이 계시니 너무 걱정하실 필요는 없을 겁니다. 처음도 아니구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만일을 대비하여. 유모는 목구멍 위로 튀어나오려던 불길한 말들을 꾸역꾸역 삼켜냈다.

깨끗한 새 옷으로 갈아입고 손은 물론 세수까지 깔끔하게 한 뒤에야 비비안과 아일라는 엘리자베스가 있는 곳으로 갈 수 있었다.

“할마마마!”

"비비안!”

좀처럼 가만있질 못하고 제자리에서 서성거리던 프레이야가 비비안을 발견하고 몸을 낮췄다.

그녀의 품으로 한달음에 달려가 안긴 비비안은 이미 반쯤 울먹이고 있었다.

“할마마마, 어마마마는 괜찮으신 거죠?"

“암, 괜찮고말고. 비비안이 있는걸요. 황후께선 강인한 분이시니 분명 괜찮으실 겁니다.”

프레이야는 비비안을 달래며 동시에 자신을 다그쳤다. 지금 이 자리에서 누구보다 두렵고 걱정스러운 사람은 어린 비비안일 터였다.

이시도어의 곁을 차지하고 앉은 아일라 또한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은 마찬가지였던지 연신 주먹을 쥐었다 펴길 반복하고 있었다.

부녀가 나란히 자리에 앉아 손만 움찔거리는 모습이 우습게 보일 법도 했지만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선뜻 웃지 못했다.

본격적인 진통이 시작된 건지 두꺼운 벽 너머로 듣는 이의 창자가 녹아내리는 비명소리가 들렸다.

비비안의 얼굴은 더욱 하얗게 질렸다. 프레이야는 그녀를 꼭 끌어안고 속으로 기도문을 외웠다.

비비안은 그만 울고 싶은 기분으로 프레이야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어마마마께 나쁜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간간히 아바마마의 악 소리도 들리는 것으로 보아 어쩌면 두 분께서 함께 싸우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가서 도와드리고 싶은데, 유모는 그것만은 절대 안 된다며, 몇 번이고 약속을 받아냈다.

레인 경이 그랬다. 지킨다는 것은 누군가가 안심하고 웃을 수 있게 만드는 일이라고.

비비안은 어마마마와 아바마마가 다시 웃길 바랐다. 그렇게 만들고 싶었다. 정확한 이유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지만, 그러기 위해선 지금 울음을 터트리면 안 될 것 같았다.

듣는 이가 더 괴로운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문 너머로 다급한 소리가 이어지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비비안은 물론 프레이야와 이시도어 또한 선뜻 그 침묵을 깨지 못하고 미간만 좁히고 있던 그 순간.

비비안은 분명히 아기 울음소리를 들었다.

다시 문 너머로 목욕물을 가져오라느니, 부드러운 수건을 준비하라느니 하는 말이 우렁찬 아기 울음소리에 묻혀 저 멀리서 들려오는듯했다.

“비비안, 동생이 태어났나 봅니다.”

“어... 어... 어어...”

프레이야는 그제야 한숨 놓았다는 표정으로 비비안과 이마를 맞댔다.

이시도어와 아일라 역시 마찬가지로 서로 어깨와 머리를 기대며 몸에서 긴장을 풀었다.

얼굴 가득 눈물자국이 낭자한 레온하르트가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왔다. 비비안은 프레이야의 무릎에서 내려와 아바마마에게 달려갔다.

“아바마마, 어마마마는 괜찮으십니까?”

“리지는... 리지는 괜찮아. 응. 괜찮아. 비비.”

레온하르트는 비비안을 꼭 끌어안았다. 비비안은 그의 몸에서 풍기는 비릿한 피 냄새에 순간 몸을 움찔했다.

“비비, 동생 생긴 걸 축하해...”

레온하르트는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비비안이 태어났던 날에도 느꼈던 감정이었지만, 정말 세 번은 겪고 싶지 않은 순간이었다.

“아가들은 무사한가?”

레온하르트가 비비안과 함께 감정을 추스르는 사이 프레이야는 산파에게 아이들의 상태를 확인했다.

“경하드리옵니다. 아주 건강한 쌍둥이 황자님이십니다.”

“신이시여! 맙소사, 아, 엘리자베스, 리지, 리지! 그 아이가? 세상에. 세상에나!”

프레이야의 입술 끝이 실룩대기 시작했다. 넋이 나간 사람처럼 연신 같은 말만 주억거리던 프레이야는 이제 방에 들어와서 아이를 봐도 된다는 산파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황실 식구들을 이끌고 방으로 들어섰다.

"어마마마!”

힘없이 축 늘어져 눈을 감고 있는 엘리자베스를 본 순간 레온하르트의 품에 안겨 있던 비비안의 작은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미미르가 바람을 일으키고 마법사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지만 여전히 침대에선 아직까지 피 냄새가 남아 있었다.

동생들을 보고 싶지 않냐는 레온하르트의 말에 비비안은 고개를 저었다. 우선 어마마마께서 무사하신지 확인하고 싶었다.

침대로 다가간 비비안은 하얗고 핏기 없는 엘리자베스의 손을 꼭 붙잡았다.

"어... 어마마마...”

그러자 엘리자베스가 천천히 눈을 떴다. 잠시 허공을 노려보며 눈만 깜빡이던 그녀는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차리고 힘없이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비비, 동생 생긴 걸 축하해.”

미미르는 엘리자베스에게 가벼운 회복 마법을 걸어주었다. 덕분에 조금 혈색이 돌아온 엘리자베스는 아이를 안아보겠냐는 유모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비비, 이 아이들이 네 동생이란다. 비비는 오늘부터 누나가 된 거야.”

엘리자베스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하며 비비안에게 강보에 싸인 두 아이를 보여주었다.

비비안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쭉 빼며 어마마마의 품을 차지한 '동생들'을 살펴보았다.

작고, 오물거리고, 움찔거리고 있었다.

“내가...누나...?”

비비안은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내밀었다. 유모가 기겁하며 그녀를 말리려고 했으나 레온하르트가 그럴 필요 없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주제에, 약초를 달인 물로 씻어서 나무와 풀 냄새가 나는 빨간 덩어리 주제에, 몇 달 동안 아바마마와 어마마마의 얼굴에서 웃음을 빼앗아 간 아주 못된 아기면서.

“...너무 예뻐요...”

왜 이렇게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러워 보이는 거지?

아직 짧고 통통한 비비안의 손가락이 닿자 강보 너머로 아기가 꼼지락거리며 반응했다.

그 움직임을 느낀 순간 비비안은 결심했다.

이 아이들을 지켜줘야지. 동생들을 위해서라면 가장 아끼는 담요도 내어 줄 수 있어. 매일 웃을 수 있게 내가 동화책도 읽어주고, 거미가 나와도 무찌를 거야!

그런 그녀의 다짐이 갓 태어난 동생들에게도 닿았는지 아기들이 입술을 오물거렸다.

그리고 정확히 10년 뒤, 한창 황태자 수업을 받던 비비안은 그날 자신이 미쳤던 것이 분명하다며 똑같이 생긴 얼굴로 사고현장 앞에서 상대방 탓을 하는 쌍둥이 황자 앞에서 이마를 짚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