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황제폐하가 시곗바늘을 되돌린 사연-126화 (126/130)

126화 (외전 6화)

“그러나 정작 마녀의 소원을 들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답니다.”

“왜요?”

“그, 글쎄? 다들 자기 소원이 이뤄진 게 너무 기뻐서 그런 거 아닐까요? 아무튼,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행복한 와중에도 마녀는 홀로 불행한 상태였습니다.”

“이제 왕자님이 나와요?"

“키스도 해요?”

비비안과 아일라의 몸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미미르는 눈을 깜빡이며 잠시 고민하다, 그들 곁에 앉아 있던 일리시스를 빤히 쳐다보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마녀와 함께 마녀의 체스를 둘 수 있을 정도로 똘똘한 친구가 마녀의 탑을 방문했어요. 두 사람은 금세 친구가 되었답니다.”

“그럼 그 친구가 마녀님을 행복하게 해 준 거예요?”

“글쎄요... 사실 이 이야기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거든요.”

“네에?”

“왜? 그럼 동화가 아니잖아!"

미미르는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씨익 웃으며 책을 탁 소리 나게 덮어버렸다.

“바로 그거죠! 이 이야기는 [마녀가 행복해지는 이야기] 즉 진행형이니까요! 만약 마녀가 행복해졌다면 [행복한 마녀 이야기]였겠지요!”

“...어려워!”

비비안이 인상을 찌푸리며 툴툴거렸다. 아일라 또한 미미르의 말이 쉽게 이해가 가지 않았던지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애플 파이 먹고 싶다.”

비비안은 입술을 삐죽이며 중얼거렸다. 지킨다는 것도, 아직 완성되지 못한 동화도, 아직 어린 그녀에겐 너무 어려운 이야기였다.

수업시간도 아닌데 핑핑 소리를 내며 돌아가야 했던 머리가 달콤한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럼 애플 파이 먹으러 갈까요?"

그러던 차에 들려온 미미르의 제안은 무척 반가운 이야기였다.

미미르는 양손에 각자 비비안과 아일라의 손을 잡고 도서관을 나섰다.

홀로 남은 일리시스는 안경을 고쳐 쓰며 그녀가 실시간으로 지어내던 [마녀가 행복해지는 이야기]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시계탑에 가는 일은 언제나 즐거웠다. 비비안은 힘차게 팔을 앞뒤로 흔들었다.

커다란 호수 가운데 홀로 서 있는 하얀 탑의 그림자가 꼭 섬과 정원을 연결하는 다리처럼 보였다.

배에 올라탄 비비안과 아일라는 사공 없이 혼자 움직이는 배를 보며 신기해했다.

“애플파이, 애플파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비비안은 배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미미르는 그 모습을 보며 황실에서 가장 씩씩한 사람은 역시 비비안이라며 추켜세웠다.

시계탑의 주인이 거주하는 탑의 꼭대기 층은 비비안이 좋아할만한 신기한 것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막 천장에 매달려 있던 티 테이블을 아래로 내리고 애플파이와 호박 모양 주전자를 준비하던 미미르는 두 아가씨의 시선이 한 곳에 멈춰 있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기한가요?”

“미미르 님! 이건 뭐에요? 어디에 쓰는 건가요? 이름은 뭐에요?"

미미르는 비비안이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할 무렵 즈음 아예 어린아이가 만져도 괜찮은 것, 또는 아예 보호 마법을 쳐 놓은 물건만 꺼내 놓았다.

궁금한 것은 만져 보고, 먹어 봐야 직성이 풀리는 비비안이 엘리자베스와 비슷한 위험한 상황에 빠지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

엘리자베스와 레온하르트 또한 평소 비비안에게 단단히 일러 놓았다.

덕분에 그녀는 지금 두 손을 뒤로 곱게 모아 쥔 채로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커다란 유리 공을 눈으로만 보고 있었다.

“그거? 그냥 카드 점을 볼 때 쓰는 구슬이야."

“카드 점?”

아일라가 손을 번쩍 들고 아는 채를 했다.

"나, 나 그게 뭔지 알아요! 축제가 되면 골목에서 이런 구슬이랑 카드랑 들고 앉아있는 할머니랑 할아버지가 하는 거!"

“응, 그런 거.”

“그게 뭐야? 아일라 고모.”

아일라는 최대한 쉽고 간단한 어휘력을 총동원해 비비안에게 카드 점에 대해 설명했다. 그 사이 미미르는 애플파이는 물론 어린 아이들이 좋아할만한 간식거리를 잔뜩 차려놓았다.

“애플파이 먹을 사람?"

“저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조르르 달려와 앉은 두 아이들은 황녀님의 품격도 내려놓은 채 열심히 파이와 케이크를 먹어댔다.

순식간에 커다란 파이 조각을 해치운 비비안이 미미르를 빤히 쳐다보며 눈을 깜빡였다. 아무래도 아직 부족한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미미르는 '비비안에게 너무 오냐오냐 하면 안 돼!'라며 눈썹을 모으던 엘리자베스를 떠올리고 갈등에 빠졌다.

“...이건 우리끼리의 비밀이다, 알았지?"

결국 미미르는 새로 파이 한 접시를 내어주며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비비안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덩달아 사탕 하나를 받은 아일라도 싫은 눈치는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일스에게 지킨다는 일이 뭐냐고 물었지?"

느긋하게 차를 홀짝이던 미미르의 말에 볼이 미어져라 달콤한 사과 졸임을 오물거리고 있던 비비안이 멀뚱멀뚱 눈만 깜빡였다.

“지킨다는 건... 어떻게 보면 희생한다는 것과도 같은데, 우리 비비안 황녀님은 그럴 각오가 되어 있니?”

“희엥안아오오?”

꼴깍. 차가운 우유로 입가심을 한 비비안이 조금 붉어진 얼굴로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다시 말했다.

“희생한다고요?”

미미르는 손을 뻗어 비비안의 입가에 달라붙은 빵 조각을 떼어냈다. 희생이라는 낯선 단어에 아일라도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희생이 뭔가요?”

“누군가를 위해 자신이 가진 소중한 것을 포기한다는 뜻이지.”

“소중한 걸 포기해요?”

“음... 예를 들면 이런 거야. 황녀님의 간식을 노리는 못된 개미가 있으면 간식을 지켜야겠지?"

“개미에게도 나눠주면 되는데요?”

미미르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그, 그냥 개미 말고 엄청 큰 개미! 막 한입에 파이를 파이틀째로 먹는 그런 개미 말이야!"

비비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상상만으로도 두려운지 비비안은 슬그머니 손을 탁자 아래로 내려 아일라의 옷자락을 꼭 붙잡았다.

“그런 개미로부터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비비안 혼자 파이를 지켜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 나, 나는 유모도 있고 근위대도 있고 아바마마랑 어마마마도 있는데요?"

비비안은 반쯤 울먹이고 있었다. 미미르는 커다란 알사탕을 비비안의 입에 쏙 넣어주며 속으로 '이게 아닌데' 라며 곤혹스러워했다.

“개미를 쓰러트리는 과정에서 비비안의 소중한 드레스가 망가질지도 모르지. 하지만 비비안의 그런 용감한 모습을 본 유모가 파이를 하나 더 줄지도 모르고, 또, 어...그러니까... 비비안, 울지 말고!"

큰일 났다. 아이를 울리는 온갖 해괴한 마법은 자신 있어도 우는 아이를 그치게 하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서툰 미미르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했다.

아일라는 비비안을 꼭 끌어안고 등을 토닥여주며 미미르를 살짝 째려봤다.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손만 허공에서 휘적대던 미미르가 달콤한 간식이나 아기자기한 마법 따위로 그녀를 달랬지만 비비안의 울음소리는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스승님! 무슨 일이... 황녀님들?”

“앨리스 양, 오랜만이에요.”

미미르의 방에서 아이 우는 소리가 나자 한달음에 달려온 앨리스가 방 안의 모습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고아원에서 맏언니 노릇을 하며 우는 아이는 백 명도 넘게 달래 본 경험이 있는 앨리스가 능숙하게 비비안을 달래는 사이 미미르는 아일라에게 소리 없는 질타를 받았다.

얼추 울음을 그치고 진정한 비비안은 미미르가 약속한대로 설탕 시럽에 굳힌 딸기를 까드득 깨물어 먹으며 코를 훌쩍댔다.

“휴, 고마워, 앨리스.”

아일라에게 사정을 들은 앨리스는 조금 전 아일라가 보냈던 따가운 시선의 열 배쯤 되는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봤다.

“그래서 전하께 동생을 지키는 법을 가르쳐주고 계셨다구요?”

“뭐어... 대충 그렇지?”

앨리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미미르는 어색하게 웃으며 탁자에 앨리스의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앨리스, 앨리스는 동생을 지키는 방법을 알아?”

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비비안이 물었다. 앨리스는 가볍게 그녀를 안아다 자신의 무릎 위에 앉히며 부드럽게 웃었다.

“배우지 않아도 자연히 알게 되실 거예요. 그리고 우리 전하께서 검을 들거나 마법을 배워 동생 분들을 지켜주실 일은 이 앨리스가 시계탑에 있는 한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걸요?”

“자연히? 정말로?”

비비안은 앨리스의 몸에서 나는 약초 냄새에 코를 킁킁거리며 되물었다.

“전하께선 훌륭한 언니, 누나가 되실 거예요. 당연하죠!”

“그걸 어떻게 알아? 음, 앨리스는 굉장한 마법사니까 믿어줄게."

비비안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앨리스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입에 묻은 설탕 시럽을 닦아주며 말없이 그저 웃었다.

“지키기 위해 희생하는 건 폐하 특기시니 한 번 여쭤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예요.”

“아바마마?”

여기서 왜 갑자기 아바마마 이야기가 나오지? 손등으로 눈시울을 벅벅 닦아낸 비비안이 흥미를 보였다.

미미르는 씩 웃으며 어린 레온하르트가 시계탑의 시간 속으로 떨어진 엘리자베스를 구하기 위해 어떤 희생을 했는지,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듯 천천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 * *

앨리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시계탑 밖으로 나온 비비안은 볼을 부풀리며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비비안? 무슨 고민을 그렇게 해?"

“있지 언니, 거대 개미가 동생들을 노리면 어떡하지?”

“응?”

아일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비비안은 바르르 몸을 떨어가며 황궁의 단단한 담장을 마구 먹어치우며 자신의 궁을 시작으로 할마마마, 할바마마께서 계시는 궁과 어마마마가 계시는 곳까지 몰려드는 커다란 개미떼를 상상했다.

“안 되겠어, 근위대로 갈래. 가서 레인 경에게 개미의 '전략적 요충 지대'에 대해 물어볼래.”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배운 거야? 그리고 이럴 때는 그냥 '약점'이라고 해도 돼.”

아일라는 종종걸음으로 비비안의 뒤를 쫓아갔다. 씩씩하게 거침없이 나아가던 비비안이 우뚝 걸음을 멈춰 섰다. 그녀의 등에 부딪힐뻔 한 아일라가 의아한 눈빛으로 비비안과 눈을 맞췄다.

“...고모, 혹시 레인 경이 어디 있는지 알아?”

아일라는 작은 한숨과 함께 비비안의 손을 꼭 붙잡고 걷기 시작했다.

황실 근위대장이 된 빅토리아 레인은 자신을 찾아온 두 황녀를 내려다보며 눈만 껌뻑였다.

“황녀님을 뵙습니다. 여긴 어쩐 일로...”

비비안은 자신이 지을 수 있는 최대한 심각한 표정으로 빅토리아의 무릎에 대고 물었다.

“레인 경, 만약 이 황궁에 커다란 개미가 ‘침냑'해 온다면 어쩌죠?”

“...'침략'입니다. 개미가요?”

그녀의 눈높이를 배려해 한쪽 무릎을 땅에 대고 앉은 빅토리아가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비비안의 등 뒤에 서있던 아일라를 쳐다봤다.

아일라는 손짓으로 시계탑 쪽을 가리켰다. 빅토리아는 작게 입을 벌리더니 이내 납득했다는 듯 비비안의 손을 꼭 잡고 그녀를 안심시켰다.

“걱정 마십시오, 전하. 이 황궁을 지키는 것은 제가 당연히 해야 할 일, 거대 개미가 아니라 거미가 오더라도...”

아일라가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마구 고개를 도리저었다. 영문을 모르는 빅토리아만 고개만 갸웃거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