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외전 5화)
"에아오?”
“다 삼키고 말씀하세요.”
아일라는 웃음기 머금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며 손수건으로 비비안의 입가에 묻은 부스러기를 닦아 냈다.
“제가, 지켜줘야 해요?”
처음 듣는 소리였다. 비비안은 어딘지 상기된 얼굴로 멍하니 지켜준다, 지킨다, 지켜준다... 따위만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그러면 우리 비비안 전하는 제국을 이끌 황제가 될 분인데, 동생들을 지켜주셔야죠!"
“그런 거예요?”
아일라는 물론 어느새 그들의 곁에서 시중을 들고 있던 유모도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돌리자 먼발치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책을 읽고 있던 할마마마와 할바마마께서도 고개를 끄덕이시는 게 보였다.
그런가보다. 비비안은 단순하게 납득하며 입꼬리를 한껏 끌어 올렸다.
“지킬래요! 지켜줄 거야. 그런데, 어떻게 지켜줘야 해요?”
"어...”
구체적인 방법을 묻는 말에 그만 아일라의 말문이 막혀버렸다.
비비안은 동화책 속에 나오던 기사처럼 갑옷을 입고 칼을 들어야 하나 고민했다.
“음, 구체적인 방안은 지금부터 모책해야겠군요.”
“비비안, 그런 어려운 말은 어디서 배웠어요?”
“아바마마랑 어마마마가 이렇-게 표정을 찌푸리면서 말하는 게 멋있어 보여서... 틀린 말이에요?”
“틀린 말은 아니지만...”
비비안을 만난 후로 입에서 웃음꽃이 떨어질 생각을 않고 있었다. 입꼬리가 아플 지경이었지만 그마저도 기꺼운 감각이었다.
“고모님, 저는 지금부터 '방법'을 찾으러 갈 건데, 같이 가시겠어요?”
아예 자리에서 내려온 비비안은 다부진 목소리로 말했다.
아일라는 빠르게 몇 번 눈을 깜빡였다. 뭘 찾으러 간다고?
비비안은 슬그머니 아일라의 손을 끌어당겼다. 아직 포동포동한 작은 손이 힘은 어찌나 세던지, 정신을 차려보니 유모도 없이 단 둘이 정원을 걷고 있었다.
“그런데 '지키는 방법’은 어떻게 찾으려고?"
주위에 어른이 없는 것을 확인한 아일라가 비비안에게 편안한 어조로 말을 걸었다.
"어마마마께서 그러셨어. 책 속에 답이 있다고. 그러니까 일단은 도서관으로 가 보자.”
좋은 생각이라고 맞장구를 치며 아일라는 도서관 반대 방향으로 가려는 비비안의 발걸음을 다시 되돌려 놓았다.
"비비안, 아직도 황궁에서 길 잃어?"
“길을 잃은 게 아니라 길이 나를 잃은 거야! 나는 늘 가던 길로 가고 있었는데, 길이 나를 못 찾고 이상한 곳으로 가버린 거라구."
“보통은 그런 걸 ‘길을 잃었다.'라고 하는데.”
“아, 아니라니까?”
비비안은 있는 힘껏 부정하며 맞잡은 손을 앞뒤로 흔들었다. 달콤한 바람이 불자 두 황녀의 머리카락이 가볍게 흩날렸다.
“앗, 일스 삼촌이다.”
“미미르 님도 계시네?”
도서관에 도착한 비비안은 이럴 때 '자문을 구하기'에 가장 알맞은 대상을 발견하고 반색했다.
아일라는 유난히 그의 곁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붉은 머리칼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늘 시계탑에 계시는 분이 도서관에는 어쩐 일이시지?
혹시 두 지식의 거인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생긴 건 아닐까?
그러나 막 서가 사이에서 나오던 일리시스와 미미르는 꼭 귀신을 본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더니 허둥지둥 몸을 굽혔다.
그 바람에 일리시스가 품에 안고 있던 무거운 책이 아래로 떨어지며 그의 발등을 찍었다.
“...아프겠다.”
비비안은 진심으로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일라 또한 그의 발등을 동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화, 황녀님, 을! 아이고... 뵙습니다. 아으, 악, 으윽...”
“일스! 당신 괜찮아? 비비안, 아일라 황녀님. 도서관에 어쩐 일이신가요?"
눈물까지 찔끔 흘려가며 한쪽 발을 부여잡고 제자리에서 펄쩍거리며 뛰다 말고 일리시스가 말했다.
미미르는 허공에 손을 휘저어 책을 둥둥 띄우더니 무릎을 굽혀 두 어린아이와 시선을 맞췄다.
비비안은 자신이 도서관에 찾아온 이유를 설명했다. 아일라는 곁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시스는 욱신거리는 발등의 고통도 잊고 버릇처럼 안경을 고쳐 썼다.
“흠, '지키는 방법' 말씀이시지요.”
일리시스는 꼭 수업 시간으로 돌아간 것처럼 진지한 얼굴이 되어 목부터 가다듬었다.
비비안은 기대로 가득 차 반짝반짝 빛나는 시선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어찌나 학구열 넘치는 눈빛이던지, 일리시스는 어린 황녀님이 평소 수업을 들을 때도 제발 지금과 같은 모습을 보여 주길 간절히 바랐다.
“저는 이제 곧 누나, 언니, 아니면 둘 모두가 될 거예요. 그러니까 저는 동생들과 어마마마와 아바마마를 지켜야 해요. 그래서 '지키는 방법’을 배워야 해요.”
“그, 그렇습니까?”
일리시스는 아직 열 살도 채 되지 않은 비비안의 의젓한 모습에 눈썹을 슬며시 들어올렸다.
마냥 아이인줄만 알았는데 언제 이렇게 커 버린 걸까. 수업시간에도 딱 이 정도로만 의젓한 모습을 보였으면 좋겠는데.
감상에 젖은 일리시스는 그녀의 손을 붙잡고 지극히 현실적인 조언을 들려주기 시작했다.
“비비안 전하, 전하께서 두 분 폐하를 지키시려면 우선 전하께서 성인이 되어 피보호자가 아닌 보호자의 자격을 얻으셔야 합니다. 하지만 법적으로 성인이 되었다고 한들 부모의 눈에 아이란 몇 살이 되었든 지켜줘야 하는 소중한 아기인 법,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왕국의 훌륭한 재상이자 머리며 수염이 새하얀...”
비비안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오늘 안에 과연 조언을 들을 수는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순간 그녀의 자그마한 얼굴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한편 아일라는 미미르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시계탑의 주인, 대 마녀 미미르의 얼굴이 그녀의 머리카락처럼 활활 불타는 것이 수상했다.
"흐, 흠.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미미르는 꼭 숨기는 일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그녀의 눈치를 보며 말을 흐렸다.
"시계탑의 주인께서 여긴 어쩐 일이시죠?"
아일라는 별다른 뜻 없이 그렇게 물었다. 그런데 돌아오는 미미르의 반응이 무척 수상했다.
“그, 제가. 그러니까. 시계탑에...없는! 그래, 없는 책이 있어서! 그걸 찾으려고 잠깐 왔다가 일스를 만났는데, 재상님에게 마침 볼일이 있어서 온 건 절대 아니고! 그냥... 그렇게...만나서...인사만 나누고...가려던 참이었습니다...”
입을 열 때만 해도 석고상처럼 하얗던 얼굴이 그녀의 말이 끝날 즈음엔 시커멓게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더듬거리며 어색하게 대답하는 모양새가 무척, 매우, 많이, 수상했다. 아일라는 허리에 두 손을 얹고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왜, 왜 그러십니까...?"
"흐음...”
미미르는 자기 키의 반도 되지 않는 아일라의 눈빛을 피해 이리저리 녹색 눈동자를 굴리다,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 괜히 머리카락만 귀 뒤로 넘기길 반복했다.
“...그래서 지킨다는 의미는 단순히 사전적인 의미로 이해해선 안 될 말이며 법적, 정서적 의미를 모두 고려했을 때...”
비비안은 입을 헤 벌린 채 일리시스의 조언인지 설교인지 강론인지 모를 이야기를 한 귀로 듣고 반대쪽 귀로 흘려보내고 있었다.
결국 보다 못한 아일라가 일리시스의 옷자락을 잡아당겨 그의 말을 멈추게 했다.
“일리시스, 아니, 페리안 공작님. 비비안 얼굴 좀 보세요.”
“네? 황녀님이 왜...아, 아! 아아! 이런. 실례했습니다. 너무 흥분한 나머지 그만...”
비비안은 살았다는 표정으로 크게 한숨을 내쉬더니 냉큼 아일라의 등 뒤로 숨었다.
“으흠, 흠! 고견 감사합니다. 스승님. 그런데 아까 듣자하니 미미르 님께서 찾으시는 책이 있다고 하시던데 그 책은 찾으셨나요?"
“저런, 황녀님께선 귀가 네 개셨나 봅니다.”
일리시스의 점잖은 지적에 비비안은 혀를 쏙 내밀며 고개를 돌렸다.
미미르는 어깨를 으쓱이며 조금 전 일리시스의 발등을 강타한 책을 내밀었다.
“...[마녀가 행복해지는 이야기]?"
“동화책이에요?”
일리시스와 시선을 주고받은 미미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 비비안과 아일라는 반색하며 각자 한 사람씩 맡아 책상 앞으로 질질 끌고 갔다.
“황녀님? 황녀니임?”
“처음 들어보는 제목이에요! 읽어주세요!”
“마녀가 행복해진다는 이야기는 아직 읽은 적 없어요! 마녀인 미미르님이 읽어주시면 더 좋을 것 같아요!”
“제발요!”
“제발요오!”
어린아이의 손을 뿌리칠 수도 없어 종종걸음으로 쫓아가던 미미르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몄다.
어느새 의자 위에 자리 잡고 앉은 두 아이는 쌍둥이처럼 똑같은 자세로 팔꿈치를 책상에 대고 턱을 괴고 있었다.
'어떡해?’
‘그걸 왜 저에게 물어보십니까? 그러니까 갑자기 서가 사이에 불쑥 나타나시는 건 그렇게 자제해 달라고 부탁드렸는데...!'
'네가 재상이 된 이후로 시계탑에 좀처럼 안 오니까 그렇지!’
‘죄, 죄송합니다. 바쁜 일만 끝나면 방문하겠습니다.'
'...어휴! 누가 너보고 토끼라는 거야? 이 곰만도 못한, 아니. 더한 놈!’
“미미르 님?”
“페리안 공작님?”
일리시스를 잡아먹을 듯한 시선으로 노려보며 소리 없이 으르렁거리던 미미르가 언제 그랬냐는 듯 싱긋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미미르의 따가운 눈빛에 어쩔 줄 몰라하고 식은땀만 흘리던 일리시스는 그 틈을 타서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흠, 흠. 그... 마녀가 행복해지는 이야기 말이지? 음, 아주 좋은 이야기야!”
미미르는 어색한 웃음을 유지하며 책을 펼쳤다. 그러나 책은 텅 비어있었다. 지금부터 채워나갈 예정이었던 이야기를 어떻게 둘러대야 할까, 미미르는 자신의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했다.
“옛날 옛날에, 아주 위대한 마녀가 살고 있었어요.”
“위대한 마녀래! 미미르 님 처럼요?”
“음, 나 같은 마녀였나 봐. 붉은 머리와 녹색 눈동자, 시원시원하고 호탕한 성격에 실력도 뛰어난 마녀는 주위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유명했답니다.”
“어떤 소원이든지요?”
“이, 이 마녀는 무척 실력이 훌륭해서 어떤 소원이든 다 들어줄 수 있었답니다! 비비안과 아일라 전하께선 어떤 소원을 빌고 싶으신가요?"
“음... 시간을 되돌리는 소원을 쓸래.”
“시간을?”
“그러면 애플파이를 먹고 다시 시간을 되돌려서 한 번 더 먹을 수 있잖아?"
“흠, 그건 굳이 마법이 아니어도 유모의 허락을 받으면 해결 될 일 같은데요...”
“유모가? 절대!”
비비안이 가느다란 비명을 내질렀다.
“저는... 만백성의 행복을 빌래요.”
“오, 그런 거라면 확실히 마법의 힘을 빌려야겠군요.”
“흐음, 절대적인 행복이란 게 과연 있을까요? 예를 들어 그 마법이 발동되는 순간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눈앞에서 잃는다면? 그래도 그 사람은 여전히 행복한 상태인가? 그럼 그건 진정한 행복이라 할 수 있는가?”
일리시스는 턱을 매만지며 혼잣말을 하듯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커흠! 계속하시지요, 미미르 님.”
한창 미미르와 그녀가 들려주는 마법 이야기에 푹 빠져 있던 두 아가씨가 찬물을 끼얹는 것만 같은 그의 말에 눈총을 보냈다.
일리시스는 헛기침을 하며 슬그머니 몸을 움츠렸다.
일리시스가 본의 아니게 시간을 벌어준 사이 미미르는 적당한 이야기 하나를 만들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