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비비안의 결심 (외전 4화)
비비안의 이름 앞으로 커다란 선물상자가 도착했다. 유모와 함께 막 양치질을 끝내고 돌아온 어린 황녀님은 선물보다 함께 도착한 편지를 더 반가워했다.
“아일라 고모님이 오신대!”
졸음에 겨운 얼굴로 몇 번이나 세면대에 얼굴을 박을 뻔했던 비비안의 얼굴에서 졸음기가 싹 사라져버렸다.
초롱초롱한 제비꽃 빛 눈을 보며 유모는 속으로 아일라 황녀에게 원망을 토로했다.
비비안과 크게 나이 차이가 나지 않는 아일라는 그녀의 하나뿐인 고모이자 가장 소중한 친구였다.
할마마마와 할바마마와 함께 외스터라이히에서 지내는 터라 자주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그동안 서로 주고받은 편지 (어른들은 그림엽서라고 생각했다.)만 벌써 스무 통을 넘어가고 있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상자를 열자 커다란 소라고둥이 들어 있었다. 그것을 본 비비안의 입이 동그랗게 벌어졌다.
“소라고둥이네요?”
이렇게 크고 예쁜 보라색 고둥은 처음 본다며 유모가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나 그 소라고둥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는 비비안은 자리에서 폴짝폴짝 뛰며 소리쳤다.
“고모가 놀러온다!”
“예? 아일라 황녀님이요? 외스터라이히에 계셔야 할 그 분이 황궁에는 어쩐 일로...?”
“합. 이건 비밀이야. 아무리 유모여도 말해줄 수 없어.”
비비안이 서둘러 앙증맞은 두 손을 들어 입을 틀어막았다.
어른 몰래 두 어린이는 비밀 약속을 나눴다. 아일라가 황궁으로 올 때는 소라고둥을 보내고, 비비안이 외스터라이히로 간다면 정원의 꽃을 편지와 함께 보내기로 했다.
그런 깜찍한 비밀을 알 턱이 없는 유모는 고개만 갸웃거렸다.
한때 아바마마가 쓰셨던 황태자궁을 그대로 물려받은 비비안은 진주처럼 부드러운 광택이 도는 연보랏빛 소라고둥을 품에 안고 제자리에서 다시 뛰기 시작했다.
노크 소리가 들리고 유모는 잠시 자리를 비웠다. 외스터라이히에서 반가운 손님들이 왔다는 소식에 그녀는 저도 몰래 등 뒤에서 깡충깡총 뛰고 있는 황녀님을 흘끗 돌아봤다. 설마 황녀님께서 예지 능력이 생기신 건 아니겠지?
“유모, 아일라 고모님은 언제 볼 수 있어? 응?”
꼭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비비안이 그녀의 치맛자락을 잡아당겼다. 유모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귀한 손님들이 계실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비비안은 다시 한 번 유모의 치맛자락을 잡아당겼다. 아일라와 할마마마, 할바마마께선 황궁에 오실 때면 늘 같은 곳에서 머무르셨다. 정숙한 레이디의 치맛자락에 풀물이 들지 않는 법이라고 유모가 그랬지만 지금 입고 있는 건 바지니까 밖으로 나가도 되지 않을까?
"응? 유모. 나 오늘은 바지 입었어. 바지에는 풀물 들어도 되는 거지? 고모님 보고 싶어.”
유모는 치맛자락을 단단히 움켜쥐며 비비안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풀물이 든 잠옷 차림으로 손님을 뵈러 가신다구요? 그건 안 될 말이지요. 비비안 전하, 오늘은 이만 코, 자고 내일 아침 정원의 꽃을 꺾어서 아일라 황녀님을 뵈러 가는 건 어떨까요?"
“그치만 지금 당장 보고싶은데...”
고개를 푹 숙이고 눈만 데로록 굴려 유모를 빤히 쳐다보며 비비안은 손가락을 잘근 깨물었다.
그러나 그녀의 애교에도 유모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비비안은 연신 흥흥거리면서도 대신 동화책을 읽어준다는 말에 커다란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갔다.
“전하, 그건 왜 들고 오시는 건가요?”
비비안이 가장 좋아하는 책을 가져오던 유모가 눈을 깜빡였다. 비비안은 베개 절반은 넉넉히 차지하고도 남을 소라고둥을 무슨 곰인형이나 된 것처럼 꼭 끌어안고 있었다.
“같이 자면 안 돼?”
무슨 그런 끔찍한 소릴! 비비안의 잠버릇을 잘 아는 유모는 잠결에 그녀가 소라고둥을 침대 아래로 떨어트리고, 소라고둥이 깨지고, 비비안이 울고, 아일라가 실망하고, 그리고 이어질 온갖 불행을 상상하며 고개를 내젓고 두 손을 내밀었다.
병아리 부리처럼 뾰족하게 튀어나왔던 입은 결국 그녀가 잠이 든 뒤에야 다시 쏙 들어갔다.
입까지 살짝 벌리고 잠든 비비안을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던 유모는 협탁 위에 푹신푹신한 쿠션을 깔고 그 위에 소라고둥을 올려놓았다.
다음 날, 잠에서 깬 비비안은 까치집이 된 머리와 반쯤 밀려 올라간 바짓단 차림으로 가장 먼저 소라고둥에게 아침인사를 건넸다.
“이제 고모님 뵈러 가도 돼?”
“세수부터 하셔야지요.”
“세수 다 했어!”
“아직 눈꼽이 이렇게 남아있는데요?"
"씨이...”
손을 적시고 싶지 않았던 비비안은 세면대에 물을 잔뜩 받고 숨을 흡 들이마신 뒤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얼굴에 물이 묻어 있지만 그녀의 손이 뽀송뽀송한 것과 전혀 사라지지 않은 눈꼽으로 그녀가 어떤 앙큼한 거짓말을 했는지 금방 알아차린 유모는 비비안과 함께 다시 욕실로 향했다.
결국 유모의 손에 이끌려 세수가 아니라 목욕까지 하고 나온 비비안은 그러고도 아침 식사를 하고, 다시 이를 닦고, 머리를 빗고, 땋고, 옷까지 갈아입은 뒤에야 가까스로 정원으로 갈 수 있었다.
“유모는 어떤 꽃이 좋을 것 같아?"
“글쎄요, 장미는 저번에 선물하셨고, 백합도 그 전에 선물하셨고, 수국은 아직 철이 아니고, 작약도 선물하셨고...”
“휴, 너무 어렵다. 선물 고르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야.”
비비안은 이마의 땀을 닦는 정원사들의 행동을 흉내 내며 그렇게 말했다. 유모는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으며 넌지시 그녀를 떠 보았다.
“그럼 그냥 저희에게 맡기시지 그러셨어요.”
“아냐! 선물은 받는 사람을 생각해서 직접 골라야 한다고 어마마마께서 그러셨어."
그러자 그녀가 화들짝 놀라 손사래를 쳤다. 유모는 허리에 두 손을 얹고 야무진 표정으로 고민에 빠진 비비안의 모습에 결국 빙그레 미소 지었다.
"음, 역시 그 꽃이 좋겠어!”
비비안은 유모가 미처 말릴 새도 없이 냉큼 잔디밭으로 달려갔다. 유모가 치맛자락을 붙잡고 허둥지둥 그 뒤를 쫓아갔다.
“화관 만들어 줄 수 있어?"
그녀가 선택한 건 토끼풀이었다. 유모는 풀물이 드는 것도 아랑곳 않고 털썩 자리에 주저앉은 비비안을 일으키는 대신 그녀 곁에 자리를 잡고 앉아 시선을 맞췄다.
“화관을요?”
“응. 나랑 고모님이랑, 두 개. 그러면 내가 유모에게 반지를 만들어 줄게."
얼마 전 아바마마께 직접 배웠다며 비비안은 토끼 꼬리처럼 동그랗고 하얀 꽃을 꺾어 반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유모는 작은 한숨을 내쉬며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비비안의 엉덩이 아래에 깔아 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말대로 화관을 만들기 시작했다.
"어머나, 네잎 클로버네요?"
“네잎 클로버?”
“이걸 찾은 사람에겐 행운이 온다고 해요. 이것도 선물로 가져가실 건가요?”
"당연하지!”
비비안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네 잎을 가진 클로버를 들여다봤다.
“그런데 있지 유모.”
“네?”
“잎이 네 개면 행운이잖아, 그럼 세 개는 뭐야?"
비비안의 말에 유모는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니까 분명... 잎이 세 개인 평범한 클로버는 꽃말이...
“행복. 행복이라고 해요.”
그 말에 비비안의 눈이 더욱 동그래졌다.
“그럼 황궁에 행복이 가득한 거네?”
“네?”
유모는 다시 고개를 갸웃했다. 비비안은 황후를 꼭 닮은 눈웃음을 지으며 설명했다.
“황궁에 클로버가 가득하잖아? 클로버는 행복이잖아? 그럼 황궁에는 행복이 가득한 거지?”
유모는 그만 참지 못하고 비비안을 꼭 끌어안아주었다. 우리 황녀님,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럽고 어여쁜 우리 황녀님. 저절로 노래가 나왔다.
아일라 황녀가 있는 곳으로 가는 길 내내 비비안은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즐거웠다.
마주치는 사람마다 그녀를 향해 작은 탄성과 함께 정중한 인사를 건넸다.
“유모, 매일 보는 사람들이 왜 갑자기 나에게 저런 식으로 인사 하는 거야?"
“음, 글쎄요. 황녀님께서 모처럼 머리 위에 관을 쓰셔서 그런 게 아닐까요?”
유모의 추측대로였다. 비비안과 유모가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한 사람들은 냉큼 건물 모퉁이를 돌아 그림자 속에서 심장을 부여잡기에 바빴다.
황후로부터 물려받은 이슬 젖은 거미줄처럼 아름다운 은발과 황제의 제비꽃 빛 눈을 가진 어린 황녀님은 설탕과 꿀을 반죽해 만든 요정처럼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그런 존재가 머리 위에 토끼풀로 만든 화관을 쓰고 종종걸음으로 걷는 모습은 근엄하게 굳어 있던 얼굴 위로 미소를 부르기에 충분했다.
관을 쓴 황족에겐 예의를 표하는 것이 당연한 법, 관료들은 저마다 최상급 예우로 그녀에게 인사를 올리는 것으로 소소한 일상의 행복을 느꼈다.
“고모님!”
“비비안!”
저 멀리 미리 연락을 받고 차와 다과를 준비해 놓았던 아일라 황녀의 모습이 보였다.
비비안은 유모의 손을 놓으며 아일라에게 한달음에 달려갔다. 뛰면 위험하다며 유모가 질겁했지만 그녀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황, 황태후 마마! 상황 폐하께 인사 올립니다. 그간 강녕하셨는지요.”
깊게 몸을 숙여 인사하는 내내 유모의 시선은 비비안을 흘끔거리고 있었다. 이시도어와 프레이야는 가벼운 손짓으로 그녀를 두 아이가 있는 곳으로 보냈다.
“어쩜 비비안은 레온을 저렇게 빼닮았을까요.”
“넘어져도 다시 씩씩하게 일어난다며 레온 그렇게 자랑하지 않았습니까. 괜찮아요, 프레이야.”
“다른 건 몰라도 머리 박는 버릇은 레온을 닮으면 안 되는데...”
이시도어는 공감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모님! 선물 감사합니다.”
비비안은 아침 내내 유모를 닦달해서 배운 대로 우아하게 한쪽 무릎을 굽히고 고개를 까닥여보았다.
그러나 아직 중심잡기에 서툰 몸은 순식간에 휘청거리더니 어어, 할 새도 없이 그만 옆으로 넘어져버렸다.
아일라가 화들짝 놀라 그녀를 일으키기 위해 다가갔으나 비비안은 두 손을 땅에 짚고 벌떡 일어난 뒤였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그렇게 말하는 것 같은 동글동글한 눈매를 보며 아일라는 그만 까르륵 웃고야 말았다.
“우리 황녀님, 이래서야 언제 동생들을 지킬 수 있는 훌륭한 누이가 되나? 그동안 잘 지냈니?"
치맛자락에 대충 손을 털고 비비안은 씩 웃으며 아일라의 손을 맞잡았다. 들려줘야 할 이야기가 무척 많았다.
동생이 생기더니, 어마마마께선 매일 잠만 주무시고, 점점 배가 나오고, 아바마마는 어마마마가 원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시려 하고...
그러나 그보다 조금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비비안은 유모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유모는 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화관을 비비안에게 넘겨 주었다.
“선물!”
“선물을 보냈더니 선물이 돌아왔네!”
예상대로 아일라는 기뻐했다. 비비안은 뿌듯한 얼굴로 네잎 클로버를 마저 내밀었다.
“이것도 고모님 거!”
“네잎 클로버네요?"
비비안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일라는 그런 그녀의 모습이 사랑스럽고 기특해 어쩔 줄 몰라 하며 자연스럽게 테이블로 이끌었다.
“여동생이랑 남동생 중에 누가 더 좋을 것 같아?”
“그 질문, 요즘 들어 마주치는 사람마다 하고 있습니다. 저는 둘 다 좋은데!”
“그러면 여동생 하나, 남동생 하나?"
달콤한 과자를 입 안 가득 밀어 넣어 다람쥐처럼 볼이 빵빵해진 비비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일라는 자신의 몫으로 나온 케이크까지 슬쩍 그녀에게 밀어주며 웃었다.
“언니나 누나가 되면 동생들을 지켜줄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