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외전 3화)
“왜... 왜...?"
“...거짓말을 숨기기 위해선 더 큰 거짓말이 필요했습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진실은 제 손이 닿지 않을 만큼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미안합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처음부터 당신을 속일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당신이... 제가 황태자라는 것을 알면 더 이상 만나 주지 않을까 봐, 그래서... 어리석은 짓이란 걸 알면서도... 젠장! 미안합니다, 프레이야. 이런 저에게 실망하셨지요?"
“부정은 하지 않을게요.”
지나치게 똑 부러진 대답에 이시도어는 오히려 안심했다. 충격으로 쓰러지면 어쩌나 내심 각오한 참이었는데 그 정도는 아닌 모양이었다. 아니, 이게 안심할 만한 일인가?
“그냥... 조금 놀랍네요. 으음. 어지간한 해적들의 암호는 해독할 수 있을 정도로 똑똑하다고 생각했는데, 눈앞에 있는 거짓말도 구분하지 못했다니.”
“프레이야... 아니, 레이디 외스터라이히는 아무 잘못도 없습니다. 모두 제 탓입니다. 원치 않는 결혼이라 하셨지요? 이 일은 제가 책임지고....”
“책임지고?"
이시도어는 절망으로 가득한 눈을 들어 프레이야를 올려다봤다.
프레이야는 처음 만난 순간 그의 시선을 낚아챈 맑고 당찬 눈빛 그대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여전히 원하지 않는 결혼인가요?"
마지막 희망을 담아 이시도어는 질문했다. 프레이야는 대답 대신 눈만 깜빡였다. 그럴 리 없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이시도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일어나려는 것을 프레이야가 제지했다.
“우리,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죠.”
“예?”
황태자의 어깨를 손으로 짚은 채 프레이야가 제안했다.
“프레이야와 아우룸은 제법 잘 맞는 사이였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레이디 외스터라이히와 황태자 전하도 잘 맞는 사이인지 확인해 봐요. 그렇게 해서 레이디 외스터라이히가 황태자 전하가 좋다고 하면 군말 않고 결혼할게요.”
자연스럽게 자신을 타자화하는 프레이야의 모습에 이시도어는 그만 헛웃음을 터트렸다.
처음 만났을 때도 그렇지만 역시 종잡을 수 없는 아가씨였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독특한 성격과 늘 그의 예상에서 벗어난 대답을 돌려주는 모습은 여전히 프레이야였다. 이시도어는 그 점에 감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영광입니다, 레이디 외스터라이히. 아우룸뿐만 아니라 이시도어도 마음에 들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렇게 프레이야의 성은 외스터라이히에서 에스페도르로 바뀌었다.
결혼식 드레스도, 보석도, 심지어 초대장조차 황후의 뜻대로 진행되는 결혼식이었지만 그녀는 곁에 아우룸이 있으니 괜찮다며 웃어넘겼다.
황후는 그녀의 취향대로 완벽하게 준비된 두 사람의 침실을 둘러보다 탁자 위에 놓여 있는 흉물스럽고 야만스러운 물건을 보고 표정을 찌푸렸다.
“저것은 대체 뭐지?"
“저, 그게... 황태자비께서 고향의 파도 소리가 그리울 때 사용할 거라며 가져오신 소라고둥 껍데기입니다.”
“당장 버리지 않고 뭘 하느냐!"
아니, 내가 직접 하지. 황후는 성큼성큼 탁자로 걸어가 소라고둥을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그리고 땅으로 패대기쳤다.
“황후마마! 아우룸, 아니. 황태자 전하께서....”
마침 그녀를 찾아왔던 프레이야는 눈앞에서 산산조각 난 소라고둥을 본 순간 깨달았다.
자신은 더 이상 고향의 파도 소리를 들을 수 없을 거라고.
그리고 많은 일이 있었다.
부채로 얼굴을 가린 채 수줍은 척 내숭을 떠는 대신 대뜸 당신은 누구냐고 묻는 프레이야는 사교계에게 제법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제도의 귀족들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처음에는 호기심 섞인 호감을 내비쳤다.
어리고 세상 물정 모르는 순수한 프레이야는 때때로 이시도어가 황급히 나서서 수습해야 하는 말실수를 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귀족들은 오늘도 가여운 황태자비가 엄하고 깐깐하기 그지없는 황후에게 또 밤새 시달리겠구나, 하며 동정 어린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러나 그녀를 향한 호감 어린 시선은 계절이 채 바뀌기도 전에 노골적인 비웃음으로 바뀌어 있었다.
자신의 위치를 모르는 황태자비는 그들에게 차를 마시며 물어뜯기에 좋은 장난감에 불과했다.
뒤늦게 예법 수업을 받는다더라, 꽃꽂이 수업에 함께 참여했는데 말 그대로 꽃을 꽃병에 있는 대로 꽂고 계시더라, 저래서야 과연 황후의 일을 제대로 수행하실 수는 있을까? 후사는 언제쯤 볼 수 있지?
소문은 끓어 넘치기 시작한 물처럼 순식간에 그녀의 귀에 들어왔다.
황후가 귀족들의 이름과 그 가문에 대한 정보를 모두 외우기 전까지 물도 주지 말라는 황태후의 엄명이 내려왔다.
황후, 아니. 선황이 숨을 거두며 황태후가 된 그녀는 제 아들이 황제가 된 이후로도 늘 '너는 아직 어리다.'라는 말로 그를 속박했다.
제발 고향에서 나는 소라고둥 껍데기 하나만 구해 달라는 프레이야의 간절한 부탁 앞에서 이시도어는 고개를 내저었다.
“차라리 파도 소리가 나는 오르골을 만들어 주겠소. 프레이야, 내 사랑. 그런 물건은 황후의 품격에 어울리지 않아요.”
어느새 프레이야가 사랑했던 아우룸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이시도어만 남았다.
그녀는 이시도어 또한 똑같이 사랑했으나 이시도어는 그녀를 프레이야가 아닌 황후로서 사랑했다.
그렇게 다시 계절이 흘렀다. 봄이 오고 꽃이 피었으나 이시도어는 그 어디에서도 그가 사랑한 제비꽃을 찾을 수 없었다.
황후가 실종됐다. 납치인가? 아니, 편지가 있다. 가출이다. 당장 외스터라이히로 연락을 넣어라, 아니다. 내가 바로 가겠다.
프레이야, 내 인생은 당신을 만나고서야 비로소 봄이 찾아왔는데. 내가 너무 지독한 겨울이라 당신을 얼려 버렸나 보오.
꼬박 밤을 새워 말을 달렸다. 그를 반겨 준 건 텅 빈 외스터라이히 저택과 총을 들고 있는 프레이야였다.
당장 저 총을 뺏어야 한다는 생각과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그녀가 놀라 실수라도 한다면 큰일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쾅 하고 부딪혔다.
프레이야는 물끄러미 제 손안에 있는 총을 내려다보다, 그가 보는 앞에서 그녀만의 비밀 창고에 총을 숨겼다.
“프레이야는 이제 여기에 두고 갈게요.”
그렇게 말하며 황후는 이시도어의 곁으로 돌아왔다. 그 사실이 너무 다행스럽고 기쁜 나머지 이시도어는 그녀가 말한 '두고 간다는 프레이야'가 어떤 뜻인지 미처 알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황후의 가출 사태는 그녀의 배 속에 제국의 후계자가 있다는 소식이 이어 들려오자 금세 잠잠해졌다.
임신을 하면 원래 사람이 우울해지는 법이다, 황태후께서 오죽 그분을 채근하셨으면 그 활달한 분이 이렇게 조용하게 변했을까, 설마 아들을 낳으라고 닦달하시는 건 아니겠지?
아들이래. 황태자의 탄생인가? 아직은 모르지. 황제께서 기분이 아주 좋아 보이시는군. 그런데 황후께선 왜 저런 표정이시지?
황태후께서 이 소식을 아셨다면 정말 좋아하셨을 텐데....
쉿, 황후마마 앞에서 그분 이야기는 금기인 것 몰라? 좋아하시긴 하셨겠지만 바로 '황실의 후계자는 많을수록 좋습니다.' 어쩌고 하시면서 몸도 아직 풀지 못하신 분을 황제 폐하의 침소로 밀어 넣으셨을걸?
어머니가 되시더니 정말 다른 사람이 된 것만 같으셔. 어쩜 저렇게 우아하고 기품 있을까. 꼭 거울처럼 맑고 품위 있는 미소야.
그림 같은 모습이군. 저렇게 세 분께서 함께 있는 모습 말일세.
그러게나 말이야, 그 말괄량이 외스터라이히 후작의 딸이 저렇게 완벽한 황후가 될 줄 누가 알았겠나.
"프레이야.”
멍하니 자리에 앉아 있던 황후는 핫 하며 정신을 차리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황제께서 그녀에게 춤을 신청하고 있었다.
그녀는 황후에게 어울리는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른한 봄 햇살처럼 느린 곡조에 맞춰 천천히 몸을 움직이던 황후는 황제의 턱만 빤히 응시했다.
그녀가 사랑했던 아우룸은 이제 없다. 아우룸을 사랑했던 프레이야 또한 고향에 두고 왔다. 그럼 여기 서서 이시도어와 춤을 추는 건 누구지?
문득 자신이 꼭 소라고둥의 껍데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속엔 파도 소리가 있지만 진짜 파도는 없다. 그걸 알면서도 사람들은 소라고둥을 보며 파도 소리를 추억하고, 그리고, 또.
“프레이야. 레온하르트가 자라면 함께 바다를 보러 갑시다. 외스터라이히에 두고 온 프레이야를 되찾으러 갑시다.”
그의 말에 황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시도어는 그녀의 이마에 키스하며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그녀의 눈물진 얼굴을 가려 주었다.
아직 그들에겐 시간이 남아 있었다. 이시도어가 다시 아우룸이 되고, 황후가 내려놓고 온 프레이야를 되찾고도 남을 만큼 긴 시간이었다.
그제야 황제의 세상 속에 다시 제비꽃이 찾아왔다. 황후 또한 영원히 그치지 않을 것 같던 눈보라가 그치고 그림자 속에서 노란 꽃이 핀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다시 스무 해 가까이 지난 지금.
“프레이야.”
"아우룸.”
두 사람은 서로 허공에서 시선을 교환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동시에 검고 하얀 말이 출발했다.
두 말 모두 어지간한 사람은 시도조차 하지 못할 만큼 큰 덩치와 그에 어울리는 움직임을 가지고 있었다.
프레이야는 바람의 이마가 되어 아우룸보다 아슬아슬하게, 조금 더 빨리 결승점을 통과했다.
그가 억지를 부린다면 바뀔 수도 있는 결과였으나 아우룸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순순히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다.
“역시 나는 말이야, 평생 승마로는 프레이야 당신에게 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응? 왜요?”
“첫 만남부터 프레이야가 모는 말에 치여 죽을 뻔했는데 아무래도 그 기억이 몸에 남은 모양이야.”
“말에 치이는 것과 말을 타고 달리는 일은 다르지 않나요?”
“글쎄. 그날 몸은 치이지 않았어도 마음은 그대에게 치였나 보지. 프레이야, 내 사랑. 나를 기꺼이 패배의 길로 이끄는 승리의 여신. 원하는 것이 있다면 뭐든 말해 주세요. 그것이 하얀 포말로 짠 숄이라 해도 구해 드리겠습니다.”
극소수의 시종을 제외하면 아무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해변이었다. 이시도어는 주저 프레이야를 안아 올렸고 프레이야는 맑은 목소리로 까르륵 웃었다.
“그럼 소라고둥 껍데기 하나만 구해 주시겠어요? 아주 크고 예쁜 걸로, 리지에게 보내 주게요.”
“이런, 아직 선물도 하기 전인데 벌써 소유주가 바뀐 겁니까? 조금 서운한데.”
“응. 그래서 아우룸에게 따로 선물을 요구할 생각이야.”
그녀의 말에 결국 이시도어는 폭소를 터트리며 키스를 퍼부었다. 프레이야는 사람들이 아직 있다며 가느다랗게 비명 소리를 내는 것과 함께 뒤로 몸을 빼면서도 애정이 담뿍 묻어나는 눈으로 그를 흘겨봤다.
언덕 위에서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아일라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스케치북을 넘겨 색연필로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어머, 황녀님. 무엇을 그리신 건가요?”
유모의 말에 아일라는 표정을 찌푸렸다. 그림이라니! 엄연한 편지를 두고 그림이라니!
“그림 아니야, 오라버니랑 리지 언니에게 보내는 편지란 말이야!”
그녀의 말에 유모는 다시 한번 찬찬히 스케치북을 살펴보았다. 하얀 것은 종이고, 푸르고 붉고 알록달록한 것은... 음....
“어떤 내용을 쓰셨나요?”
어른의 시선이 아닌 아이의 시선으로 보면 편지인 모양이겠지. 유모는 그렇게 납득하며 애써 웃어 보였다.
“아바마마랑 어마마마가 나만 쏙 빼놓고 놀아서 나 심심해. 그러니까 나랑 같이 놀게 리지 언니 보내 달라고 썼어. 국정은 뭐, 오라버니 혼자서 잘하시겠지.”
“예에?”
아일라는 흥, 하며 새침하게 고개를 돌리더니 뾰로통한 표정으로 스케치북을 덮고 잘 차려진 다과상으로 도도도 달려갔다. 아무것도 신지 않은 하얀 발이 갓 자란 잔디와 모래 위를 힘차게 내달렸다.
* * *
“...아일라에게 편지가 왔어.”
레온하르트의 말에 엘리자베스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서 보여 달라고 재촉하는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편지를 쥔 팔을 하늘 높이 뻗고 까치발을 들었다. 그러자 그녀 또한 손을 위로 뻗고 낑낑거렸다.
조금만, 조금만 더, 하며 그녀의 귀여운 모습을 눈에 담으려던 레온하르트는 순간 종아리에서 느껴지는 무시무시한 통증에 비명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바닥으로 쓰러졌다.
“레온? 레온!”
"그... 근육이... 놀랐나 봐... 윽... 허억... 으윽....”
레온하르트가 다리를 부여잡고 낑낑거리는 사이 엘리자베스는 그의 손에서 떨어진 아일라의 편지를 조심스럽게 주워 읽기 시작했다.
"음...."
“아일라가 혹시 베일리에게 글씨 쓰는 법을 익힌 건 아니겠지?”
레온하르트의 목소리에 은근한 걱정이 묻어났다. 엘리자베스는 그럴 리 있겠냐며 핀잔을 주면서도 다시 편지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우리, 태교 여행으로 아일라 보러 갈까?”
어느새 그녀의 등 뒤로 다가온 레온하르트가 그렇게 권했다. 그의 손은 아직 납작하기만 한 그녀의 아랫배를 살살 쓰다듬고 있었다.
“국정은 어쩌고?”
“일스와 미미르에게 맡기지, 뭐.”
그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다시 눈을 흘겼다. 레온하르트는 뻔뻔한 표정으로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그녀의 시선을 받아쳤다. 결국 한숨과 함께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무슨 죄야?”
"음, 둘 다 괘씸죄인데. 하나는 감히 황후의 친구에게 호감을 품어서,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애를 반하게 해 놓고 시치미를 떼고 있어서?"
“일스가? 미미르 언니와? 두 사람이?"
레온하르트는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알 사람은 모두 아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딱 세 사람만 모르고 있었다. 일리시스, 미미르, 그리고 엘리자베스.
'아니지, 배 속 아이까지 하면 넷인가? 아냐, 다섯일지도 몰라. 설마... 여섯까진 아니겠지? 아닐 거야. 하지만 여섯이어도 나쁘진 않을 것 같은데....’
“레온, 레온?”
엘리자베스는 갑자기 말이 없어지더니 히죽히죽 헤벌쭉 웃기 시작한 레온하르트를 의아하게 쳐다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레온하르트는 아직 티도 안 나는 엘리자베스의 배를 손으로 살살 쓸어 주며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