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외전 2화)
“그렇습니까? 영광입니다. 저도 프레이야가 싫지는 않습니다. 아니, 그러니까... 보통과 좋아함 사이의 어디... 인데, 그, 어느 정도냐면....”
갑자기 얼굴이 뜨거워졌다. 이시도어는 눈만 데굴데굴 굴리며 마땅한 말을 찾기 위해 말을 우물거렸다.
“우정?”
“네! 그겁니다! 우... 정....”
아닌데, 우정 말고 다른 감정인데. 뭐라 딱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하여튼 우정은 아닌데.
“그러면 아우룸 씨, 부디 편지를 황태자 전하께 전해 주시겠어요?”
“얼마든지요. 원하신다면 익명을 보장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거짓말에 능숙한 사람이었다니! 이시도어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프레이야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진심을 담아 말했다.
“고마워요.”
그렇게 말하며 싱긋 웃는 프레이야의 등 뒤로 붉은 노을이 지고 있었다.
순간 이시도어의 머릿속은 한 가지 생각으로 가득 찼다.
'이 아가씨와 함께라면 황궁에서의 인생도 그리 따분하지만은 않을 것 같다.'
그렇게 이시도어는 자신을 향한 편지를 단 한 번도 놓치지 않고 꼬박꼬박 배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직접 답장을 적어 프레이야에게 건넸다. 겸사겸사 황태자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도 함께 전했다.
“대뜸 최측근을 통해 '나 이 결혼 하기 싫으니 그쪽에서 어떻게 좀 막아 보세요.'라는 요지의 편지를 보냈는데 이런 답장이 올 줄이야....”
“사람은 직접 보고 판단해야 하는 거니까요.”
몇 통의 편지가 두 사람 사이를 오고 갔다.
그러는 사이 프레이야는 점점 얼굴도 모르는 황태자에게 호기심을 느끼기 시작했다.
“오늘은 믿을 수 없는 일이 있었어요. 제가요, 혹시라도 저택 안에서 지내다가 황태자 전하나 황후마마와 마주칠까 봐 첫날부터 꼬박꼬박 온갖 핑계를 대며 무례를 범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황태자 전하께서 제 마음이 바뀔 때까지 그쪽에서 알현을 거부하겠다고 나서셨다는 거 있죠?"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당연히 있었다. 저 발칙하고 오만불손하고 무례한 계집을 당장 내 앞에 꿇려다 그 귀하신 얼굴을 보고야 말겠다는 어마마마를 필사적으로 뜯어말렸다.
가까스로 그녀를 만류하며 민망하고 면목이 없어 몸 둘 바 몰라 하는 외스터라이히 후작과 부인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그가 먼저 제안했다. 고양이를 잡으려면 무작정 쫓기보다 그 앞에서 강아지풀을 흔드는 법이 더 빠르다고. 조악하고 무례한 비유였지만 그녀의 마음을 돌리는 데 성공했다.
“그래서 한번 만나보기로 했어요!"
이시도어는 가까스로 '아우룸의 미소'를 유지했다. 만난다고? 왜? 왜 갑자기? 내가 무슨 고생을 했는데!
“왜, 왜 마음이 바뀌신 겁니까?"
“가서 실수인 척 따귀라도 때려 버리려구요!”
이게 정말 후작가 레이디의 입에서 나올 말인가? 이시도어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녀가 마음만 먹으면 어지간한 해적보다 더 재기발랄한 비유법을 쓸 수 있다는 것을 아직 모르는 그는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슬쩍 돌렸다.
“뭐, 아버지 어머니께 죽기 직전까지 혼나기는 하겠지만 설마 그렇게까지 했는데 저를 황태자비로 데려가시겠어요?”
혹시 황태자 전하께... 그... 그런 망측한 취향이 있는 건 아니지요?
프레이야가 고개를 낮추며 속삭였다. 이시도어는 대신 절대 그럴 리 없다고 부인했다. 하지만 뺨 한 대를 맞고 그녀를 황궁으로 데려갈 수 있다면... 그런 취향이 있다고 오해를 받아도 좋을 것 같았다.
“음, 그럼 우리의 만남도 어마마... 아니, 황후마마와 황태자 전하와 접견한 뒤로는 끝나는 건가요?”
“예? 왜 이야기가 그렇게 돼요?"
“그야... 황태자비로 낙점된 레이디께서 황태자의 최측근과 친근하게 지내는 모습을 본다면 구설수에 오르기 쉬우니까요...?"
“아....”
프레이야는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한눈에 사로잡았던 그녀의 발랄함과 순수함이 어쩌면 사교계에선 독이 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그럼... 음... 오늘이 마지막이네요.”
오늘?!
“어머니께서 아예 작정을 하셨어요. 내일 두 분을 뵙는다고 수백 번 약속을 하고 겨우 나온 거예요.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한 달씩이나 외출을 금지시키겠다니! 딸을 그렇게나 못 믿으시나? 음... 그럴 수도 있겠다. 하여튼!"
이시도어는 눈앞이 아득해지는 감각에 그녀가 홀로 재잘거리는 것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프레이야는 그가 '아우룸' 이라고 알고 있었다.
가명은 아니었다. 황태자의 이름은 이시도어 '아우룸' 폰 에스페도르였으니까.
'그러고 보니 아우룸 씨는 황태자 전하와 이름이 같네요?'
‘하하, 어쩌면 그 덕분에 채용된 걸지도 모릅니다.'
웃으며 농담처럼 주고받았던 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저... 프레이야?”
이젠 정말 가 봐야겠다는 말과 함께 프레이야가 내키지 않는 동작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를 불러 놓고도 한참 동안 이시도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여기서 솔직하게 전부 말할까?
어차피 내일이면 알게 될 일인데, 어차피 미움받을 일이라면 내일로 미루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하지만 더 이상 프레이야를 속이고 싶지 않아. 지금도 저렇게... 표정이 시무룩한데....
“왜 그래요?”
이시도어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질문했다.
“혹시, 혹시 제가 당신에게 고백한다면... 받아 주시겠습니까?”
프레이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작은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커다랗고 맑은 눈동자가 파도처럼 일렁였다.
“...아닙니다. 조금 전 말은 잊어 주십시오.”
“받아 줄게요.”
“예?”
프레이야는 성큼성큼 이시도어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바다를 품은 바람 덕에 소금기가 버석거리던 볼 위로 부드러운 낙인이 찍혔다.
“만약 이야기가 잘 진행되어 황태자비도 뭣도 없던 일이 되면 나에게 정식으로 구혼해 주세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프레이야는 자신이 타고 온 말에 올라타더니 순식간에 사라졌다.
홀로 남은 이시도어는 소금 기둥이 된 것처럼 멍하니 서 있다 조심스럽게 그녀의 입술이 지나간 자리를 더듬었다.
털썩 소리와 함께 결국 자리에 주저앉은 그는 이내 최악 중에서도 최악의 선택을 했다는 것을 깨닫고 머리를 붙잡으며 마구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 * *
“표정이 왜 그러느냐.”
“...긴장해서 그렇습니다.”
“긴장할 필요 없어. 건방진 것. 감히 눈에 보이는 뻔한 거짓말로 우리를 기다리게 하다니! 황태자비? 흥! 턱도 없는 소리지!"
황태자의 정복을 입은 이시도어는 조용히 한숨만 내쉬었다.
늦은 나이에 귀하게 얻은 아들이었다. 귀한 아들인 만큼 엄격하고 혹독하게 가르쳤다. 그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시도어는 종종 생각했다. 혹시라도 내 위로 형이 하나 더 있었더라면, 아니면 어머니가 조금만 더 다정하셨더라면, 자신은 지금처럼 어마마마 앞에선 찍소리도 못 하는 무능하고 나약한 사내로 자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프레이야는 자신의 오른편에서 우아하고 나붓한 걸음걸이로 걷고 있는 어머니와 왼쪽에서 대꼬챙이보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녀를 감시하는 시녀장 사이에 끼어 보란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양쪽에서 동시에 아가씨! 프레이야! 하는 소리가 들렸다.
새벽부터 코르셋이네 페티코트네 신상 드레스네, 머리를 빗고 땋고 돌돌 말아 올리고, 보석은 어떤 게 좋을지 한참을 의논했다.
물론 의논은 어머니와 시녀들이 했고 자신은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았다.
어쨌든 이른 아침부터 번거로운 준비며 속성 예법 강의와 디로 끝나지 않는 잔소리에 벌써 반쯤 녹초가 되어 있었다.
빨리 그 황태자란 놈 얼굴을 확 긁어 버리고 도망쳐야지. 평생 저택에서 갇혀 지내더라도 바다가 보이는 곳이라면 버틸 수 있을 거야.
그런 다부진 마음가짐으로 프레이야는 준비된 자리로 향했다.
“황후마마께 인사 올립니다. 프레이야 이반나 폰 외스터라이히입니다.”
“몸이 많이 아프다고 들었습니다. 이제 감기, 오한, 배탈, 열사병, 착란 증세, 중이염, 류머티즘, 결막염, 두드러기, 발진, 무좀은 전부 나았는가?”
외스터라이히 후작 부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 옆에 있던 시녀장은 눈을 딱 감고 기도문만 마음속으로 외웠다. 풀숲 뒤에서 황후가 자신을 부르기를 대기하고 있던 이시도어는 웃음을 참기 위해 입 안 살을 깨물어야 했다.
“염려해 주신 덕분에 깔끔하게! 나았답니다.”
“그것 다행이로군.”
아직까지는 괜찮았다. 외스터라이히 후작 부인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직접 차를 우리기 시작했다.
시녀장의 시선이 나무 꼬챙이라면 황후의 시선은 불에 달군 쇠꼬챙이에 가까웠다.
프레이야는 그런 시선 속에서 최대한 평온하게 차를 따르는 어머니를 보며 진심으로 감탄했다.
‘우와, 역시 어머니셔. 나 같으면 일단 실수인 척 주전자부터 집어 던졌을 텐데. 그나저나 황태자는 왜 안 오지? 내가 매일 바람맞혔다고 복수하겠다는 건가?'
“이시도어, 차가 준비되었는데 언제까지 바다만 보고 있을 생각이냐. 어서 나오거라.”
심해에 사는 바다 괴물도 말하면 수면 위로 올라온다더니. 프레이야는 갑갑한 코르셋 탓에 제대로 한숨조차 내쉬지 못하는 것을 한탄하며 최대한 조신한 척 우아한 자태로 고쳐 앉았다.
“이시도어 아우룸 폰 에스페도르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레이디 외스터라이히."
새침한 척 부채나 파닥이며 눈길조차 주지 않으며 손을 내밀었다. 이시도어는 그녀의 손등에 가볍게 키스했다.
그런데 키스를 했으면 얌전히 물러날 것이지 이 황태자 전하께선 이상할 정도로 오랫동안 자신의 손을 붙잡고 계셨다.
아무리 '저게 어딜 봐서 귀족 가문의 레이디냐.' 소리를 듣는다 해도 얼추 기본 예법은 알고 있었다.
이 이상 손을 잡고 있으면 황후마마와 어머니가 더 곤란해하실 것 같아 은근슬쩍 손을 빼려던 프레이야는 황태자가 오히려 손에 힘을 주고 놓아 주질 않자 결국 고개를 돌렸다. 이것을 트집 잡아 자리를 파토 낼 생각이었다.
“...아우룸이 왜 여기 있어요?"
프레이야의 말에 외스터라이히 후작 부인은 결국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사색이 된 시녀장이 양해를 구하고 의사를 모시러 간 사이 이시도어는 냉큼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어마마마, 외스터라이히 부인께서 정신을 차리시는 사이 레이디 외스터라이히와 잠시 산책이라도 다녀오겠습니다."
“응? 으응... 그러거라. 이게... 이게 대체 무슨....”
“아우룸?”
“쉿, 프레이야. 지금은 일단 도망칩시다.”
영문도 모르고 프레이야는 그렇게 반쯤 질질 끌려가듯 이시도어의 뒤를 따라 쫓아갔다.
“이게... 이게... 어떻게 된... 황태자는 어디로 가고 왜 아우룸 당신이...."
그들이 향한 곳은 프레이야와 아우룸이 늘 만나던 외스터라이히 사유지에 있는 등대 뒤편이었다.
이시도어는 이 일을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좋을지 고민하다, 냉큼 무릎부터 꿇었다.
“미안합니다, 프레이야! 지금까지 당신을 속였습니다. 내가 아우룸이고, 아우룸이 곧 황태자 이시도어 ‘아우룸'입니다.”
“...그러니까... 그 말은....”
“...지금까지 당신이 보낸 편지는 처음부터 저에게 도착해 있었습니다.”
빠직.
프레이야의 손아귀에 붙들려 있던 부채가 반으로 부러졌다. 이시도어는 그녀가 구두로 자신의 머리통을 후려갈겨도 감내하자는 심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