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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폐하가 시곗바늘을 되돌린 사연-121화 (외전) (121/130)

121화 그녀가 되찾은 것 (외전 1화)

“으악!”

커다란 흑마가 몸 위를 펄쩍 뛰어넘었다.

어마마마의 잔소리를 피해 바다가 잘 보이는 언덕에서 막 낮잠을 청하려던 이시도어는 비명을 지르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누구지? 설마 자객인가?

버릇처럼 왼쪽 허리를 더듬었지만 손에 잡혀야 할 것이 잡히지 않았다.

낮잠을 잘 때마저 무기를 가까이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검을 풀어 놓았던 것을 떠올린 이시도어는 자신의 실수에 혀를 깨물었다.

“웨... 웬 놈이냐!”

“누구세요?”

여차하면 책으로 때려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낮추고 근육을 긴장시켰다.

그러나 투레질을 하는 흑마 위에선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나를 모른다고?'

마을 전체가 황실 일가의 방문 소식으로 떠들썩했다.

모르고 싶어도 누군가 억지로 귓구멍에 알고 싶지 않은 정보 하나까지 밀어 넣고 있을 텐데, 나를 모른다고?

이시도어는 순간 허탈한 마음에 피식 웃어 버렸다.

“뭐야, 왜 웃어요? 그쪽은 누구냐니까?"

어지간한 군마보다 더 잘생긴 흑마를 타고 있는 기수는 놀랍게도 여자였다.

자신을 모른다는 점에서 한 번, 저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다룬다는 데 두 번. 과연 다음엔 어떤 식으로 나를 놀라게 해 줄까.

어쩐지 기대되는 심정으로 이시도어는 자신의 정체를 순순히 밝혔다.

“처음 뵙겠습니다, 레이디. 저는 제도에서 온 아우룸이라고 합니다. 외스터라이히는 여행차 들렸습니다.”

“아우룸? 이상한 이름이네.”

이시도어는 결국 피식 웃어 버렸다. 기대 이상의 반응이었다.

"왜 웃냐니까요? 여긴 외스터라이히 사유지예요. 함부로 들어오면 안 되는데.”

“그렇습니까?”

“음... 하지만 아까 하마터면 머리를 밟아 버릴 뻔한 일도 있고, 그냥 눈감아 드릴게요.”

이 대목에서 이시도어는 그녀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외스터라이히의 말괄량이, 외스터라이히 후작의 골칫덩이이자 파도와 함께 자란 바다의 공주님, 프레이야 이반나 폰 외스터라이히가 틀림없었다.

“이런, 레이디 외스터라이히. 실례했습니다.”

“엥? 제가 프레이야라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그녀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이시도어는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대답했다.

“그야 외스터라이히 사유지에서 이런 말을 달릴 사람이라면 레이디 외에 또 누가 있겠습니까.”

프레이야는 눈을 깜빡였다. 그런가?

자신을 아우룸이라고 밝힌 낯선 사내는 웃는 얼굴로 궁정식 절을 했다.

얼떨결에 말 위에서 인사를 받은 프레이야는 파도 소리가 몇 번 지나간 뒤에야 아차 하며 말에서 내려왔다.

이시도어는 다른 여인들과 달리 안장에서 그대로 훌쩍 뛰어내리는 프레이야를 보며 감탄했다.

여느 사내 못지않은 큰 키와 시원시원한 이목구비가 매력적인 아가씨, 까지 생각한 순간 그의 몸 위로 그림자가 덮쳤다.

“피해요!”

“네?”

당황한 나머지 착지 지점을 잔디밭이 아닌 아우룸의 얼굴로 잘못 잡은 프레이야가 뒤늦게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순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수백 개의 끔찍하고 불길한 상상과 달리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음부턴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천천히 내려오는 게 어떨까요.”

"아....”

아우룸의 팔에 안긴 프레이야는 입만 벙긋거렸다. 아우룸은 여전히 웃으며 그녀를 풀밭 위에 내려놓았다.

“함부로 레이디의 몸에 손을 댄 점, 늦게나마 사과드립니다.”

“아뇨! 괜찮아요! 그, 아, 아! 오히려 사과는 이쪽에서 해야지요. 조금 전에 미안했어요. 아침부터 유모가 어찌나 들들 볶아 대던지! 너무 답답해서 무작정 오라버니의 말을 빌려서 타고 나왔다가 미처 보지 못했어요. 하마터면 정말 큰일 날 뻔했네.”

큰일은 큰일이지. 이시도어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부턴 사유지에 침입자가 있는지 미리 확인하고 말을 탈게요.”

이어지는 말에 그는 폭소를 터트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얼굴 위로 빤히 비치는 사교계의 레이디와 달리 파도처럼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그녀의 첫인상은 썩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즐거웠다.

“웃을 일이 아니라니까요? 어휴, 황태자인지 뭔지 제발 한 번만 만나 보라며 유모가 아침에 눈 뜨는 순간부터 다시 잠자리에 들어 눈을 감는 순간까지 쉬지도 않고 잔소리를 해 대는데, 어휴! 장담하는데 어릴 때부터 버텨 온 나니까 그냥 한 귀로 넘기고 흘리지 당신이라면 한 시간도 못 버틸걸요?”

황태자 이시도어는 속으로 곤혹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어쩐지 어마마마께서 먼저 여름휴가를 가자고 하시더니, 결국 이런 뜻이 있었던 건가.

“그냥 한 번 얼굴만 보여 주고 끝내면 되는 일 아닌가요?”

어느새 프레이야는 바닥에 앉아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서 앉지 않고 뭐 하냐고 묻는 듯한 눈빛에 이시도어는 저도 모르게 그녀의 곁에 자연스럽게 앉았다.

“저도 그러고 싶은데, 무슨 예법이 어쩌고 화법이 어쩌고 하며 대뜸 코르셋부터 채우려고 드는 거 있죠? 그 끔찍한 걸 입느니 차라리 도망치고 말지!”

상상만으로도 싫은지 그녀의 어깨가 바르르 떨렸다. 이시도어는 자신의 정체를 밝힐까 하다 잠시 두고 보기로 했다.

“그래서 레이디 외스터라이히는-."

“프레이야.”

“예?”

“그냥 프레이야라고 불러도 괜찮아요. 나도 당신을 아우룸이라고 부르면 되는 거죠? 외스터라이히라니, 이상한 성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음, 그렇... 습니까? ...프레이야.”

“평범하게 바이에른이나 비텔스바인이라면 얼마나 좋아!”

“저는 프레이야 이반나 폰 외스터라이히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프레이야, 프레이야 이반나 폰... 에스페도르. 썩 나쁘지 않은 울림이라고 이시도어는 생각했다.

“그래요? 취향 독특하시네. 그나저나 아우룸 씨는 사유지에 어떻게 들어오셨어요? 황실에서 황후마마와 황태자 전하께서 오시는 바람에 지금 아버지며 오라버니들이며 치안 유지에 정신이 없을 텐데.”

“아, 그게....”

“혹시 숨겨진 개구멍 같은 게 있었나요? 있다면 나도 알려 줘요! 나중에 써먹게. 응? 대신 오늘 일은 비밀로 부쳐 줄게요. 응? 제발요!”

간절한 표정으로 프레이야가 애원해 오자 이시도어는 애써 시선을 피했다. 슬슬 정체를 밝히는 쪽이 나을 거라며 양심이 속삭이기 시작했다.

“...칫. 싫으면 말구요. 어차피 조만간 쓰지도 못하게 될 텐데.”

"음? 그건 어째서죠?"

프레이야는 기다렸다는 듯이 한숨부터 대뜸 푹 내쉬었다. 이시도어는 어쩐지 그 이유에 자신도 포함되어 있을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버지가 그러셨어요. 여차하면 자는 사이에 마차에 태워서 황궁으로 보낼 거라고."

“풉...!”

모범적인 군인의 표본이라 해도 좋을 그 외스터라이히 후작이 할 법한 말은 아니었다.

아차 하며 입을 손으로 가렸다. 얼굴에 불만이 가득 찬 프레이야와 시선이 마주쳤다. 이시도어는 어색하게 하하 웃었다. 프레이야는 뾰로통한 얼굴을 흥, 하는 콧소리와 함께 옆으로 돌려 버렸다.

“그 말은... 조만간 황태자비가 되실지도 모른다는 소리군요.”

“얼굴도 모르는 남자에게 시집가라니!”

얼굴을 몰라? 이시도어는 저도 모르게 자신의 얼굴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설마 아직 데뷔탕트도 치르지 않은 건가? 그러기엔... 키가 조금, 조금... 많이 큰데....

“레이디 외스... 아니. 프레이야. 실례지만 나이가....”

“열다섯인데요?”

맙소사. 이시도어는 속으로 이마를 쳤다. 나이에 비해 훤칠한 키를 가진 이 아가씨는 제도에 거주하는 귀족도 아니고, 아직 데뷔탕트도 치르지 않았다. 그러니 자신의 얼굴을 모를 법도 했다.

그래도 소문이라는 게 있는데, 이 아가씨는 그런 류의 소문에는 영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흥. 황태자비 자리 따위, 듣자 하니 황궁에 딱 틀어박혀서 답답한 숫자 놀음이며 매일 재미없는 책만 읽어야 할 게 뻔히 보이는데. 줘도 안 가져요! 다시 가져가라지! 다른 사람들도 많을 텐데 왜 하필 나야?”

어지간히 마음에 들지 않던 모양이던지 프레이야는 괜히 손에 잡히는 풀을 쑥 뽑아다 저 멀리 던져 버렸다.

이시도어는 머쓱한 마음에 머리만 긁적였다. 그리고 한편으론 어마마마께 감사 인사를 올렸다. 어마마마, 저 아무래도 황태자비 감을 찾은 것 같습니다.

“그래도 황태자가 인물도 그렇고, 썩 나쁘진 않다던데....”

“얼굴 뜯어 먹고 살 일 있어요? 잘생겨도 성격이 개차반이면 소용없고, 가자미처럼 눈이 한쪽으로 몰렸어도 마음만 잘 맞으면 평생 사는 거지!”

이시도어의 손이 저도 모르게 자신의 눈매로 향했다. 살면서 크게 생각해 본 적 없던 자신의 외모가 갑자기 매우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그... 그래도 황태자가 이제 결혼을 생각하는 나이인데 아직까지 질 나쁜 소문은 들리지 않는 걸 보면 그렇게 영 글러 먹은 사람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아니겠지? 혹시 내가 오해를 살 만한 행동을 한 적 있던가?

지난 과거를 돌이켜 보며 이시도어는 자신을 변명하기 시작했다. 프레이야는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가? 아, 아우룸 씨는 제도에서 오셨다고 하셨죠? 혹시 황태자 전하에 대해 잘 아세요?”

이 세상 누구보다 잘 알 겁니다. 음, 아마도요.

이시도어는 애매한 표정으로 웃었다. 프레이야는 잘되었다는 듯 한쪽 무릎을 당겨 가까이 앉으며 그의 턱에 대고 말했다.

“그분도 얼굴도 모르는 여자랑 결혼하기는 싫으시겠지요? 물론 아직 확정된 건 아닌데, 어제 오라버니가 그러셨어요. 황후마마께서 직접 오신 거라면 거의 확정이나 다름없다고. 저는 뭐, 여자니까. 귀족의 딸이니까 꼭 황태자 전하가 아니더라도 어디든 아버지가 가시라는 가문으로 시집가겠지만... 황태자 전하는 아니시잖아요? 그래도 선택권이 있지 않을까요?”

“그럴...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사실 그에게 선택권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시도어에게 황후란, 어머니이기 이전에 인생의 결정권자였다. 그녀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와서는 '어느 집안 아가씨가 황태자비가 될 거다.'라고 일방적으로 통보하셔도, 결정권은 무슨. 애초부터 거부권조차 없었다.

“휴, 황태자 전하께 저를 거부해 달라고 편지를 쓸 수도 없고....”

“제, 제가 전해 드릴까요?”

프레이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시도어는 아차 하며 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우룸 씨가 어떻게요?"

일단 이 상황부터 모면하고 보자. 이시도어는 모의 군사 훈련이나 전략 작전을 짤 때보다 더욱 진지하게 모든 경우의 수를 생각해 내고 또 하나씩 쳐 내기 시작했다.

“사실... 저는 황태자 전하의 바로 최측근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비번이라 잠시 쉬고 있었을 뿐, 원하신다면 레이디 외, 아니. 프레이야의 편지를 그분께 전달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거짓말이란 것이 들통날 말이었다. 최측근이라며 황태자의 얼굴도 모른다고?

그러나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지게 생긴 프레이야도, 다급한 나머지 앞뒤 사정을 생각하지도 못한 이시도어도 그만 그 점을 놓치고 말았다.

“...정말요?”

꼭 그것이 유일한 희망이라도 된 양 반짝이는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프레이야를 똑바로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 거짓말이 들키면 레이디 외스터라이히는 나에게 실망해서 결혼하기 싫다 하실 거고 나는... 나도 상대방이 원치 않는 결혼은 가능한 거부하고 싶으니까....’

프레이야는 이시도어가 고개를 끄덕이자 기쁨에 찬 비명을 지르며 냅다 그의 목에 매달렸다.

“레, 레, 레이디 외스터라히힉?"

“만세! 살았다! 아우룸 씨, 당신은 내 인생의 은인이야! 아, 음, 으흠흠! 지금 이 일은... 그....”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먼저 끌어안을 때는 언제고, 냉큼 돌아앉아 뒤늦게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모습에 그저 웃음만 나왔다.

이시도어는 보란 듯이 능청을 떨었고 프레이야는 그런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깔깔 소리 내어 웃었다.

“아우룸 씨, 당신 마음에 들어요!"

이시도어 아우룸 폰 에스페도르 인생 최초의 고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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