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자업자득, 자승자박(3)
옛날 옛적, 어떤 황후님이 있었습니다.
그분의 머리카락은 수면 위에 비친 달처럼 아름다운 은빛이었고, 눈동자 속엔 세상의 모든 물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그런 황후님에겐 근사한 황제님이 있었습니다.
황제님의 피부는 볕에 살짝 그을린 밀빛이었고, 어머니께 물려받아 빛 아래에서 하얗게 반짝이는 아름다운 금빛 머리칼과 담벼락 아래 흐드러지게 피어난 제비꽃이 깃든 깊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두 사람은 행복한 한 쌍이었습니다.
암, 행복했지요.
황제는 완벽하진 않아도 어리석지도 않았고,
황후는 그런 황제를 진심으로 사랑을....
사랑? 음, 그렇군요.
그 둘 사이를 채우는 말은 아주 많았습니다. 평생 걸쳐 쌓아 온 신뢰감과 우정,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 아끼고 은애 하는 연정.
그것들을 모두 모아 한 단어로 줄이자면 사랑이라는 단어가 마땅하겠지요.
황제는 황후를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어린 시절, 그녀를 대신해 온몸으로 깨진 유리잔 조각을 맞았던 순간조차 황제는 일말의 후회 없이 온전히 황후가 받을 충격만을 염려했을 정도니까요.
“저는 훌륭한 황후인가요?"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국정을 해결하던 어느 날, 황후가 물었습니다.
황후는 질문에 대한 답 대신 사랑하는 연인의 키스를 받았습니다.
모두에게 다정하고 상냥했던 사랑스러운 황후님은 만백성의 어머니이자 존경의 대상이었습니다.
백성들은 당연한 듯이 매일 거리로 나와 황실 신문에 실린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았지요.
아무도 모르게 변장을 하고 황궁 밖으로 나온 황후였지만 그들의 곁을 지나가는 순간만큼은 미소를 숨길 수 없었습니다.
널리 알려진 은빛 머리칼을 감추기 위해 마법사의 도움을 받은 황후는 종종 그들 사이에 끼어들어 비밀인 척, 두 사람이 서로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목소리를 낮추고 소곤거렸습니다.
그리고 신분을 막론하고 다른 사람의 연애 이야기라면 사족을 못 쓰는 백성들이 아주 껌뻑 넘어갈 정도로 달콤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지요.
평소 그가 황후를 얼마나 소중하게 대하는지 아는 레인 경은 그림자 속에 숨어 '저건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라며 혀를 차야 했습니다.
아주 잠깐이나마 황후의 곁을 떠나야 했던 황제가 돌아와서 처음으로 건네는 말은 언제나 다정하고 따스했습니다.
“보고 싶었어.”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이 익숙한 듯 그러려니 하며 팔뚝을 문질렀습니다.
저것이 정녕 결혼 3년 차에 접어드는 황제께서 황후께 할 법한 말일까요? 뭐, 두 분이 좋다 하시니 상관할 바는 아니긴 합니다만....
"황제의 관을 쓰고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이젠 좀 체통을 지키세요. 체통을요! 한 사람의 반려이기 이전에 폐하는 이 나라의 황제란 말입니다. 단 하나 뿐인 황제 말입니다!”
제국의 재상이자 황제의 절친한 벗이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을 대신해 건의했습니다.
"반려?"
황제는 처음 접하는 단어를 들었을 때처럼 고개를 갸웃거리며 재상의 속을 뒤집어 놓는 얼굴로 웃었습니다.
황제에게 황후는 고작 반려라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리고 여느 이야기가 그러하듯 이 이야기 또한 그토록 황후에게 모든 마음을 다하던 황제가 그녀의 이상을 눈치채는 것으로 막을 내립니다.
가벼운 예를 들어 볼까요.
그녀가 마지막으로 식사를 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무렵 자리를 급히 피하더니,
“오늘따라 입맛이 없네요.”
라며 애써 웃어 보였던 저녁.
의사가 내린 진단에 어안이 벙벙해진 두 사람과 눈짓 몇 번 주고받는 것으로 일찌감치 축하주를 준비하기 시작한 귀족들.
귀족, 젠트리, 평민 할 것 없이 모두가 마음속으로 축복의 종을 울렸던 그 날.
눈이 마주치는 사람마다 황제에게 축하의 말을 건네고 황후의 건강을 기원하자 황제는 어쩐지 쑥스러운 기분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몇 번째일지도 모를 감사 인사를 그녀의 배에 대고 속삭였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도, 실제로도. 누구도 함부로 끼어들 수 없을 만큼 아주 잘 어울리는 한 쌍에게 반가운 불청객이 끼어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황제의 행보에 대해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설마 그분이? 에이 아닐 거야, 하지만 한참 혈기 왕성할 때니까....
황제께서 한밤중에 황궁을 빠져나와 시장으로 향했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황궁 전체를 뒤덮었습니다.
소문이 황궁의 엄중한 경비를 뚫고 제국 전체로 퍼지기 전에 재상은 그 원인을 찾아야 했습니다.
원인을 찾기 위해 재상의 앞에 불려 온 황제와 그의 밤 외출을 도운 혐의로 소환된 시계탑의 주인, 그리고 그날 황제를 만났다는 사람은 어쩔 수 없었노라 변명했습니다.
“리지가 갑자기 레몬이 먹고 싶다는데 어떡해.”
황제는 뻔뻔한 표정으로 턱을 치켜들었습니다.
그러자 재상의 뒷골이 땅겨 오기 시작했습니다.
시계탑의 주인 또한 마찬가지로 눈만 깜빡이며 팔짱을 꼈습니다.
“리지가, 아니 황후께서 먹고 싶다 하시니 어쩔 수 없잖아? 폐하가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도록 잠깐 황궁 보호 마법을 해제했을 뿐이야.”
재상은 이제 다 포기했다는 심정으로 땅이 꺼져라 한숨만 내쉬었습니다.
“아이고! 저는 억울합니다! 멀쩡히 자고 있는데 갑자기 폐하께서 오시더니 갑자기 이런 계절에 나지도 않는 과일을 내놓으라며 눈을 부라리시는데....”
마지막으로 과일 가게 주인은 억울하다는 투로 그날 있었던 악몽 같은 일에 대해 줄줄 털어놓았습니다.
“예에... 평소 황후께서 잘 찾으시지도 않는 과일을 한밤중에 구하기 위해 군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황궁의 마법 장벽까지 해제하시고... 덕분에 애꿎은 저만 새벽부터 올라온 긴급 보고에 눈이 튀어나오고...”
재상은 체념했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습니다.
얼핏 지나가는 말로 아이를 가지면 유난히 신 것이 먹고 싶다거나, 한밤중에 10년도 전에 없어진 가게에서 갓 구워 내던 빵이 먹고 싶어진다는 말을 들은 것 같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황후를 향한 지극정성과 황궁을 가득 채운 즐거운 기대 속에서 도란도란 배 속 아이에게 자장가를 들려주던 세월이 흐르고, 시종이 허겁지겁 달려와 황제에게 고했습니다.
"화... 황후... 황후마마께서... 황후마마께서...!"
황제는 핏기가 싹 사라진 얼굴로 시종의 뒤를 쫓아갔습니다.
그곳엔 평소의 우아하고 맑은 목소리가 아닌 잔뜩 지치고 괴로움에 몸부림 치는 비명 소리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리지, 리지! 정신 차려. 내가 누군지 알아보겠어?"
“으... 레온... 으윽....”
아직 어리게만 보이는 얼굴이 식은땀에 흠뻑 젖어 고통에 찡그리고 있었습니다.
황제는 잠시 고민하더니 침대 아래에 무릎을 꿇고 앉아 대뜸 그녀의 손을 끌어다 자신의 정수리에 올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아프면 그냥 쥐어뜯어!"
다시 비명 소리가 한참 동안 이어졌습니다. 이를 악물고 참던 황제가 눈물을 줄줄 흘릴 즈음 두 사람은 드디어 첫 아이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리지... 역시 그냥 총으로 쏴 버릴래?"
아이를 받아 씻기기에 여념이 없던 산파와 시녀들의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그럴까?"
황후는 지친 팔을 들어 황제의 다리 사이를 총으로 겨누듯 자세를 취하며 웃었습니다.
"안녕, 아가야?"
아이가 처음으로 눈을 떴습니다.
그 순간 누군가가 숨을 쉬고 눈을 깜빡인다는 사소한 일이 두 사람에겐 더 없이 다행스럽고 기쁜 순간으로 변했습니다.
계절은 끝없이 변하고 다시 시간이 흘렀습니다.
황후는 이번에야말로 황제 폐하의 다리 사이를 쏘아 버리겠다는 말과 함께 쌍둥이 아이를 낳았습니다.
떨리는 손으로 갓 태어난 아이를 안으며 황제는 인생에 있어 완벽한 순간이 있다면 지금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아장아장 걷기 시작한 황녀님이 황후의 정원에서 꽃을 꺾어다 갓 태어난 동생들에게 주는 것을 보며 황제는 그녀를 번쩍 안아 올렸습니다.
"원한다면 너에게 새로운 꽃밭을 만들어 주마.”
그 말에 아직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어린 황녀님이 까르륵 웃었습니다.
훌륭한 황제와 의젓한 황후. 사랑스러운 첫째 황녀님과 그 곁에 함께 있는 쌍둥이 황자님의 초상화를 본 사람들은 완벽한 황실 가족의 모습이라며 칭찬했습니다.0=
그러나 그들은 완벽하지 못했습니다. 세상에 완벽한 부모가 어디 있고, 또 완벽한 아이가 어디 있을까요?
아무리 노련한 유모가 곁에 있다 한들 매 순간 가슴이 철렁하고 어찌할 바 몰라 쩔쩔맸지만 그런 생활마저 그들에겐 행복한 일상이었습니다.
"행복해.”
어린아이들이 황금빛 햇살이 잘 드는 잔디밭 위에서 데구르르 뒹굴며 노는 것을 보며 황후가 중얼거렸습니다.
곁에서 함께 그 모습을 지켜보던 황제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손등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쳤습니다.
“리지.”
황제에게 있어 그녀는 황후이자 사랑하는 아내, 평생의 반려, 그리고 제 자식들의 어머니이기 이전에 영원히 함께할 소중한 리지였습니다.
문득 황제는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눈에 먼지가 들어간 탓일까요?
아니면, 너무 행복한 나머지 흐르는 눈물일까요?
그녀가 어떤 표정으로 웃고, 어떤 목소리로 울고, 어떤 것을 좋아하고, 또 어떤 것을 싫어했는지.
그녀를 쏙 빼닮은 황녀님을 보며 황제는 하나둘 떠올리기 시작했습니다.
몹시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황제는 그렇게 한참 동안이나 따스한 햇살을 함께 즐겼습니다.
이 외에도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앞으로 천천히 풀어내기로 하고, 지금은 늦은 밤 호위 하나 없이 아무도 몰래 시계탑으로 향하는 황후에게 잠시 집중해 볼까요?
“시간을 멈출 수는 없겠죠?"
시계탑의 마녀는 깔깔 웃었습니다. 이 늦은 밤 황후께서 친히 시계탑에는 무슨 일로 오셨나 했더니, 시간을 멈추게 해 달라고?
유쾌한 웃음과 함께 마녀는 황후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습니다.
"그렇게 행복하니?"
황후는 수줍은 표정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미미르 언니의 힘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이 순간을 평생 잊고 싶지 않아. 차라리 멈췄으면 좋을 정도로... 매일이 행복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제국을 발전시키는 과정도, 그 사람을 꼭 닮은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잠드는 일도, 이렇게 오랜 친구와 함께 하는 시간도.
어느 것 하나 빠트릴 수 없는 행복한 순간이라는 말에 마녀는 곰곰이 생각에 빠졌습니다.
"그럼 기록으로 남길까?"
“기록?"
마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흘러가는 시간을 멈추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시간의 그림자를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가능하다는 말에 황후는 알쏭달쏭한 표정만 지었습니다.
“책 속의 너를 부러워하게 될지도 몰라. 그래도 괜찮아?"
“그럴 리가! 오히려 책 속의 내가 지금의 나를 부러워할걸?"
“지나가 버린 과거를 그리워하느라 미래를 내팽개치지 않을 거지?"
"내 행복은 여기에 있어. 지나간 과거는 행복한 추억이 되어 책 속에 남을 거야.”
“정말로 그걸로 괜찮겠어?"
“대가로 내 심장을 가져가도 좋아. 남은 내 수명을 전부 기록해도 상관없어. 혹시 내가 레온보다 먼저 죽거든 그가 다시 웃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고 싶어.”
시계탑의 마녀는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미소 지었습니다.
"좋아. 대가는 이미 받았어. 레온은 행복해질 거야.”
마녀와 거래를 한 황후는 잠자리에 들기 전 아주 오랜만에 신을 찾았습니다.
'신이시여. 부디 이 행복이 끝나지 않게 해 주세요. 설령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함께 이겨 내겠습니다. 그러니 그 너머에 행복이 있노라 약속해 주세요. 저희에게 영원한 행복을 허락하소서.'
그리고 시계탑의 마녀는 책을 쓰기 시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