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자업자득, 자승자박(2)
마차에 타고 있던 사람은 조피아 바이에른 리델 부인이었다.
그녀를 처음 본 순간 엘리시움 공작 부인은 속으로 경악했다.
수십여 년 전, 당시 황태자비였던 프레이야를 보는 사람이 절로 동정심이 들 정도로 호되게 질책하던 바로 그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튀어나온 잔머리 하나 없이 깔끔하게 뒤로 잡아당겨 틀어 올린 검은 머리칼.
엄격, 냉정, 냉철 그 자체인 새까만 눈동자와 단단하게 굳은 입매.
주름 하나 없이 완벽하게 다려진 단정한 드레스보단 차라리 군복이 더 어울릴 것만 같은 깐깐하고 엄한 인상의 부인은 한 손으론 지팡이를 짚고 다른 손으론 명함을 꺼냈다.
“리델 가문과 엘리시움 가문은 782년 전 혈연으로 이어진 사이지요.”
엘리시움 공작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칠백, 몇 년이라고?
리델 부인은 정중한 동작으로 명함을 조금 더 공작에게 가까이 들이밀었다.
얼떨결에 명함을 받은 엘리시움 공작은 힘겹게 머릿속으로 계산을 시작했다.
공작이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 열심히 숫자 계산을 하는 사이 리델 부인은 이어서 공작 부인과 루트비히의 인사를 받았다.
공작 부인은 머릿속이 새하얘진 기분이었다. 엘리자베스에게 그토록 혹독하게 가르쳐 왔던 예법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어찌저찌 무릎을 굽히고 다시 몸을 일으킨 순간, 서릿발처럼 매서운 리델 부인의 혹평이 그녀의 정수리 위로 송곳처럼 내리꽂혔다.
“도련님께서 나이에 비해 아직 순수한 면이 남아 있으시군요.”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이었다면 칭찬으로 들렸을 말이 왜 리델 부인의 입에서 나오자 '대체 아이 교육을 어떻게 시켰기에 애가 이 모양이냐.'라고 들리는 걸까.
엘리시움 공작 부인은 어색하게 호호 웃었다.
이어서 마차를 몰고 왔던 기사가 자신을 소개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공작 각하, 그리고 부인. 황실 기사단 소속 프란츠 칼츠라 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귀족 출신 기사와는 다를 것이라 은근히 얕보았던 일이 부끄러울 정도로 완벽하고 절도 있는 동작에 공작 부인은 부채를 꺼내 파닥파닥 부치기 시작했다.
루트비히는 솔직하게 입을 벌리고 감탄했다. 리델 부인이 그 모습에 한마디 하려다 다시 입을 다물었다.
공작 부인은 코르셋도 입지 않은 속이 불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한편 평소 자신의 행실을 그대로 돌려받은 엘리시움 공작의 얼굴은 한참 전부터 붉으락푸르락하다 다시 하얗게 질리길 반복하고 있었다.
입버릇처럼 몇 대조 전, 몇백 년 전 운운했지만 이렇게 직접 정확하게 칠백... 몇십 몇 년 전이라고 짚어 주는 상대를 마주하니 등 뒤로 식은땀이 마구 쏟아지기 시작했다.
리델 부인은 속으로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이성을 갖춘 사람은 집사와 어린 도련님뿐이라 평가하며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황실에서 보내 준 사용인들 덕분에 저택은 그럭저럭 손님을 맞을 정도의 수준까지 다시 돌아왔다.
리델 부인의 서늘한 시선 아래 공작 부인은 혹시 청소가 덜 된 곳이 있거나 엘리시움 공작이 난동을 부린 흔적이 남아 있는 건 아닐까 노심초사했다.
엘리시움 공작 또한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손님 접대는 원래 안주인의 몫이라며 서재로 냉큼 부리나케 도망쳤다.
'저 끝까지 도움 안 되는 사람이!'
엘리시움 공작 부인이 쥐고 있던 부채가 파르르 떨렸다. 리델 부인은 여전히 근엄한 얼굴로 집사가 내어 준 차만 음미했다.
"엘리시움 소공작.”
“예, 예?”
"대답은 예, 한 번이면 충분합니다. 소공작께선 어떤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루트비히는 버릇처럼 고개를 갸우뚱하려다 리델 부인의 시선에 다시 핫 하며 차렷 자세를 취했다.
“저... 저는, 누님께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엘리시움 공작 부인의 눈이 왕방울만 하게 커졌다. 리델 부인은 흥미롭다는 시선으로 루트비히를 응시했다.
“힘든 길일 겁니다. 각오는 되어 있습니까?"
루트비히는 잠시 리델 부인과 칼츠 경을 번갈아 보더니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뒤늦게 한마디 덧붙였다.
"예!"
"좋군요.”
처음으로 리델 부인의 입매가 미소 비슷한 것을 그렸다.
리델 부인은 이어서 가지고 온 지팡이의 손잡이를 돌려 열었다.
속이 텅 비어 있는 지팡이를 기울이자 길고 가느다란 회초리가 속에서 미끄러지듯 흘러내렸다.
그것을 본 공작 부인의 손이 벌벌 떨리기 시작했다.
결국 그녀는 찻잔이 잘그락대는 소리를 감추기 위해 아직 다 마시지도 않은 잔을 내려놓고 치맛자락 사이로 손을 숨겼다.
“예법 수업은 공작 부인께서도 함께 참여하시지요. 이제 다시 소공작과 함께 사교계에 참여해야 하실 텐데, 지난 번과 같은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복습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바입니다. 참, 황후마마께서 제게 '이것'을 선물하셨습니다. 여차할 경우 '훈육'해도 좋다는 말씀과 함께.”
리델 부인은 높낮이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어조로 그렇게 선언하며 잔을 깔끔하게 비워 냈다. 공작 부인은 '불미스러운 일'이라는 말에 하마터면 반쯤 목을 넘어가던 차를 다시 토해낼 뻔했다.
“엘리시움 소공작, 황후마마를 지켜드리고 싶습니까?"
이어서 어린아이와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 앉은 칼츠 경이 다정다감한 목소리로 물었다.
루트비히는 이번에도 큰 소리로 예! 라고 소리쳤다.
공작 부인은 숨을 삼켰고, 리델 부인은 살짝 눈썹을 들어 올렸다.
칼츠 경은 시원시원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공작의 뜻이 곧 제가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제가 아는 모든 것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자... 잘 부탁합니다, 칼츠 경....”
“저야말로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칼츠 경은 엘리시움 공작을 찾았다.
"각하께 미리 양해를 구해야 하는 일이 있는데... 부인, 실례지만 잠시 자리를 비워도 괜찮겠습니까?"
“예? 예에, 아. 집사, 뭐 하고 있어? 어서 경을 모시지 않고. 그이는 아마 서재에 있을 겁니다.”
제발 나를 리델 부인과 한 장소에 남겨 두지 말라는 공작 부인의 간절한 시선을 가볍게 외면하며 칼츠 경은 루트비히와 함께 집사의 뒤를 따라갔다.
서재 창문을 모두 열고 얼굴의 열기를 식히던 엘리시움 공작은 갑작스러운 노크 소리에 다시 소스라치게 놀랐다.
“무... 무슨 일이야!"
“칼츠 경께서 주인님께 잠시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하십니다."
"칼츠 경? 아, 들. 들어오라 하게.”
평민 출신인 주제에 뻣뻣하게 고개를 쳐들고 있는 모습이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진 몰라도 여차하면 트집을 잡아 내쫓아 버려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엘리시움 공작은 있는 힘껏 어깨를 펴고 배, 아니 가슴을 내밀었다.
“혹시 못 믿으실까 봐, 폐하께서 써 주신 친필 편지도 함께 드립니다.”
칼츠 경인지 칼 아츠 경인지 하는 놈은 대뜸 '소공작의 검술 수련에 각하께서도 함께 참여해 주셔야겠습니다.' 같은 헛소리를 내뱉었다.
엘리시움 공작은 온 얼굴의 구멍이란 구멍에서 열을 내며 그게 무슨 헛소리냐 반박했다.
칼츠 경은 그런 그의 반응을 충분히 예상했다는 듯 여전히 미소 띤 얼굴을 유지한 채 품에서 편지 한 통을 내밀었다.
[장인어른께.
적어도 소공작이 작위를 잇는 모습은 보셔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러니 칼츠 경이 권하는 대로 따라 주시길. 이건 권유가 아닌 황명입니다.
사위 레온하르트 트리스탄 폰 에스페도르.]
장인이며 사위며 하는 말이 꼭 그의 약을 올리기 위해 일부러 힘주어 쓴 글자처럼 보여 엘리시움 공작은 바들바들 몸을 떨었다.
아버지가 저런 증상을 보이면 얼마 지나지 않아 고함과 함께 난폭한 행동을 한다는 것을 몸으로 기억하는 루트비히는 저도 모르게 칼츠 경의 다리에 꼭 달라붙었다.
“특별한 사유가 없다면 수련은 당장 내일부터 시작할 예정입니다. 소공작의 경우 기초 체력부터 다져야겠군요."
"뭐... 뭐라?"
엘리시움 공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눈앞이 핑 돌았다.
어질어질한 시야를 억지로 붙잡기 위해 공작은 허공에서 손을 마구 허우적 댔다.
그러자 책상 위에 있던 물건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저런, 그렇게 갑자기 몸을 움직이시면 가벼운 저혈압 증세가 올 수 있습니다. 공작 각하, 건강을 위해서라도 내일부터 소공작과 함께...."
“이... 이이... 이놈이 보자 보자 하니!”
"황명을 무시하실 생각입니까?"
온화하고 조곤조곤한 칼츠 경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변했다. 루트비히는 화들짝 놀라 그를 올려다보았다.
엘리시움 공작 또한 목소리와 함께 싹 바뀌어 버린 칼츠 경의 표정 앞에서 이만 으드득 갈아댔다.
'빌어먹을! 평민 주제에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눈깔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 거야?'
“그럼 각하께서도 동의하신 것으로 알고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조금 전까지 엘리시움 공작을 꼼짝도 못 하게 했던 차갑고 서늘한 칼츠 경이 다시 돌아왔다.
루트비히는 자신도 기사가 되면 저런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궁금해졌다. 아버지가 꽥꽥거리며 소리를 내지르는 것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 * *
“리델 부인과 칼츠 경이 잘 하고 있을까?”
“잘하고 있을 거야.”
"으으음.”
엘리자베스는 여전히 마음이 놓이질 않는지 펜 끝만 잘근잘근 씹어 댔다.
레온하르트는 막 작성을 마친 서류를 허공에서 가볍게 흔들어 잉크를 말렸다.
엘리시움 공작가는 이제 완전히 황실의 손에 운명이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름 아닌 엘리자베스 본인이 그렇게 만들었다.
사교계의 유력 가문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는 사용인들은 그들이 허튼짓을 할 경우 황실을 대신해 위로는 전 주인 마님부터 아래로는 평민까지 소문을 퍼트려 줄 것이다.
예를 들면 리델 부인의 깐깐한 가르침을 따라가지 못하고 결국 회초리를 맞은 엘리시움 공작부인의 이야기라거나....
'설마 그럴 일은 없겠지?'
제발 없어야 한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몫으로 남아 있던 서류를 눈으로 훑으며 간절히 기도했다.
칼츠 경 또한 마찬가지였다. 레온하르트가 특히 신임하는 기사라는 말에 보내기는 했지만....
“왜 하필 칼츠 경이었어?"
레온하르트는 쭈욱 기지개를 켜며 무심한 어조로 대답했다.
“칼츠 경의 취미는 근육 만들기거든."
“응?”
“살이 찐 사람은 물론 너무 말라 버린 사람까지. 그 사람 손에 한번 들어갔다 하면 평균 체형으로 돌아가는 건 시간 문제야.”
"으음....”
확실히 결혼식 날 봤던 아버지는 운동이 필요해 보였다.
“...평균 체형을 넘어 거기에 마구 근육을 붙이려고 운동을 강요하는 사소한 버릇이 있어서 문제지.”
“?!"
엘리자베스가 휙 소리 나게 고개를 돌렸다. 레온하르트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휘파람만 불었다. 전 제국민이 알고 있는 가벼운 맨손 체조용 동요였다.
"다 자업자득이지, 뭐.”
엘리자베스는 할 말을 잃고 레온하르트만 빤히 쳐다봤다.
“하지만 여기서 뭘 더 했다간 네가 슬퍼할 거잖아. 그건 싫어.”
변명하듯 그가 한마디 덧붙였다. 결국 엘리자베스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그렇게 되었다는 사실을 내가 통쾌하다고 생각해도 되는 걸까? 아냐, 통쾌하게 여길래. 조금은... 그래도 될 것 같아.”
“세상에, 우리 리지가 변했어요!"
레온하르트의 호들갑에 엘리자베스가 가볍게 눈을 흘겼다.
누군가를 순수하게 원망하기에 아직 가족이란 이름은 그녀에게 있어 너무 무거운 존재였다.
하지만 루트비히를 위해서라도, 정확하겐 황후의 편이 되어 줄 새로운 엘리시움을 위해서라도 지금은 그들과의 인연을 잠시 내려놓아야 했다.
엘리자베스는 조금 더 강인해지기로 결심했다.
그녀가 사랑하는 모든 것과,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의 행복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