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자업자득, 자승자박(1)
"이걸로 정말 괜찮겠어?"
“이 사람들이라면 한번 해 봐도 좋을 것 같아.”
“좋아, 그럼 정말 승인한다?"
“잠깐! 나도 같이해.”
막 인장을 찍으려던 레온하르트의 손 위로 엘리자베스의 손이 겹쳐졌다.
뜨겁게 녹아내린 황금빛 실링 왁스가 한 방울, 두 방울 똑똑 떨어져 내렸다.
흐물흐물해진 왁스가 단단하게 굳기 전에 함께 인장을 눌러 주고 잠시 숨을 돌렸다.
충분히 왁스가 굳은 것을 확인하고 동시에 손을 떼자 종이 위로 선명하게 황제의 문양이 찍혀 있었다.
그날 저녁, 엘리시움 공작저에 황제의 인장이 찍힌 서류 하나가 도착했다.
조금 전까지도 결혼식의 일에 이어 연이어 저택을 방문했던 손님들을 두고 투덜거리며 위스키병을 비워 대던 엘리시움 공작은 평범한 붉은 봉납이 아닌 금빛 봉납에 의심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 속의 내용을 직접 확인한 공작은 그 길로 뒷목을 부여잡고 억, 어억 하는 신음 소리를 내더니 쿵 하는 무거운 소리와 함께 그 길로 쓰러졌다.
의사는 그동안 쌓인 스트레스가 큰 충격을 받아 한 번에 폭발한 나머지 잠시 기절했을 뿐이라고 진단을 내렸다.
“생활 습관을 바꾸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뭬야? 내 생활 습관이 뭐가 어때서!"
다시 목 위로 열이 오르자 머리가 윙윙 울려 공작은 얌전히 의사가 시키는 대로 침대에 드러누웠다.
"엘리시움 가문 역사서에 '울화병으로 인해 사망.'이라 적히고 싶지 않으시다면 말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의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작의 나이에 비해 지나치게 비대한 몸집을 보건대 그의 몸은 혈관이 지나가야 할 자리마저 지방이 꽉꽉 들어차 있을 것이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술과 기름진 음식을 먹은 데다 심지어 하루에도 열 개비가 넘는 담배를 피워댔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하며 의사는 공작저를 빠져나갔다.
대체 그를 기함하다 못해 결국 기절시킨 원인이 무엇인지 알아 오라는 공작 부인의 말에 집사는 침착하게 품에서 서류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엘리시움 공작이 분노에 눈이 멀어 박박 찢어 내려던 것을 가까스로 다른 종이로 바꿔치기 하는 데 성공한 결과였다.
꼼짝없이 자리보전을 하게 생긴 엘리시움 공작을 뒤로한 채 공작 부인은 혹시 종이에 독이 묻은 건 아니냐며 집사에게 내용을 대신 읽을 것을 명령했다.
여느 때처럼 하얀 장갑과 흐트러짐 없는 집사복을 입고 있던 그는 잠시 목을 가다듬고 천천히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따라서 엘리시움 가문은 황후의 배려에 감사하며 이를 시행할 것을 명한다.”
“이... 이... 이....!"
"이젠 황후마마시지요.”
버릇처럼 이졸데! 하며 버럭 소리를 지르려던 공작 부인의 입이 그대로 막혀 버렸다.
황실 문양이 새겨진 황금빛 인장은 그 서류가 황명을 품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황명을 거부할 명분도, 이유도, 그럴 힘도 없는 엘리시움 공작 부인은 그 길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소식을 듣고 조심스럽게 찾아온 루트비히가 집사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집사는 서류에 적힌 내용을 루트비히가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설명했다.
“도련님, 선대 황후마마와 그 이전 황후마마의 친정은 모두 명가였지만 특별히 관직 욕심을 내지 않았답니다. 혹시라도 가문의 실수가 황후마마의 명예에 누를 끼칠까 봐 스스로 몸을 사린 것이지요. 황제께선 엘리시움 가문 또한 그 점을 본받기를 원하십니다.”
“가문의 실수가 왜 누님의 명예에 누가 되나요?"
"그건... 아, 다음 주에 오실 예법 선생님이 가르쳐 주실 겁니다.”
“예법 선생님이요?"
루트비히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푸른 눈동자가 데구룩 굴러갔다.
집사는 어쩐지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에. 도련님께서 만약 아가씨였다면 예법 공부를 위해 직접 황궁으로 불러 시녀직을 주겠지만 도련님은 사내이니 시녀가 될 수는 없고, 대신 믿을 만한 귀부인을 예법 스승으로 불러 주신다고 적혀 있군요. 요 며칠 손님들이 저택에 들르셨지요? 그분들 중 도련님의 스승이 되고 싶다고 하신 분이 계신 모양입니다. 감사할 일이지요.”
“왜 나는 시녀가 못 돼요? 누님 곁에 있고 싶은데.”
루트비히는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이었다. 집사는 나지막하게 곤혹스러운 웃음소리를 내며 그를 달랬다.
“시녀가 될 수 없다면 기사는 어떨까요? 사적으로 황후마마를 뵙는 건 힘들지 몰라도, 선생님을 통해 편지를 보내는 건 가능할 겁니다. 매주 어떤 걸 배웠는지 쓴다면 아마 황후마마께서도 기뻐하실 겁니다.”
“정말?"
집사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남은 내용을 마저 갈무리했다.
“오, 또 하나 좋은 소식이 있군요. 도련님께 검술을 가르쳐 주실 분도 오신다고 합니다.”
“검술? 기사님? 정말로?"
"예에. 황제 폐하께서 소드 마스터라는 건 알고 계시지요?"
"누님을 지키려다 그렇게 됐다고 들었습니다. 헉, 설마 황제 폐하께서 직접 오시는 건 아니겠지요?"
루트비히의 눈이 더더욱 휘둥그레졌다. 집사는 저도 모르게 그의 머리를 쓰다듬을 뻔하다 슬쩍 마님의 눈치를 보고 손을 뒤로 감췄다.
"아쉽게도 황제 폐하는 아닙니다. 하지만 폐하와 황후마마께서 직접 고르신 제국에서 제일가는 기사님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나도, 나도 기사가 될 수 있을까요? 누님을 지켜 드리고 싶어!"
루트비히의 말에 집사는 필사적으로 웃음을 삼켰다. 그리고 사람 좋은 미소를 그리며 고개만 끄덕였다.
신이 난 루트비히가 감사의 편지를 써야겠다며 다시 자신의 방으로 달려나갔다.
집사는 다시 평소의 근엄한 태도로 돌아와 허리를 곧게 펴고 엘리시움 공작과 공작 부인의 명령을 기다렸다.
그러나 명령은 한참이 지나도 내려오지 않았다.
"이... 리델 부인이라는 분은...."
집사는 잠시 머릿속으로 엘리시움의 족보를 떠올렸다.
“지난 주 잠깐 방문하셨지요. 한 5분 정도.... 차만 마시고 아무 말도 없이 가신지라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아마 리델 가문과 엘리시움 가문은 5대조 전에 혈연으로 이어졌을 겁니다.”
“뭐? 5대조라니! 그게 대체 몇 년 전 일인데! 고작 그런 이유로 사람을 골라?"
등 뒤에서 엘리시움 공작이 버럭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그러나 어제저녁 술을 마시며 '우리 엘리시움 가문이 어떤 가문이냐, 온 사교계에 우리 가문과 혈연으로 이어지지 않은 곳이 없다. 그 잘난 두 공작가도 우리 증조할머니가 시집간 가문인데! 엄연히 친척인데! 친척이 이 지경이 되도록 얼굴 한 번 안 비추다니!' 따위를 지껄였던 그가 하는 말은 전혀 설득력 없었다.
"아, 현 황제 폐하의 할마마마 되시는 분의 가문이기도 하군요. 가풍이 무척 엄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공작 부인의 얼굴에서 혈색이 사라졌다.
그녀 또한 프레이야가 황태자비 시절 얼마나 수모를 겪었는지 직접 봐서 알기에 그 가문 출신이라는 말이 결코 달갑지만은 않았다.
"크흠, 검술 스승이 되실 분은 어떤 분인지 설명을... 올릴까요?"
대답이 없자 집사는 어깨를 으쓱하며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흘렸다.
“평민 출신이군요.”
그 말에 공작이 다시 한번 가문의 명예를 들먹이다 앓는 소리를 내며 드러누웠다.
"아, 이 가문이라면 엘리시움에도 홍차를 납품하는 곳입니다. 평민이지만 어지간한... 귀족 못지않은... 으흠, 그런 가문이라 정평이 나 있습니다.”
그래 봤자 평민은 평민이라며 엘리시움 공작이 씩씩거렸다.
공작 부인은 여전히 아무 말도 없었다.
“황실에서 나오는 품위 유지비의 장부는 매월 황실에서 직접 관리인이 와서 확인하신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집사의 눈앞으로 그동안 엘리시움 공작이 거덜 내고 새로 사야 했던 귀한 술과 그가 박살을 내는 바람에 새로 사야 했던 가구들, 그리고 그때마다 점점 부족해져 가는 재산 목록을 보며 한숨을 내쉬던 과거의 제 모습이 떠올랐다.
집사는 한결 상쾌한 마음으로 자신의 과거에게 작별을 고했다.
"황제 폐하께서 저택 대문을 파손하셨던 일이 있었지요. 늦었지만 수리비에 보태 쓰라는 말씀과 함께... 음? 으음? 으으음?"
집사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하나, 둘, 셋... 다섯, 여섯? 일곱? 더 있어?
평범한 문 수리비치곤 조금, 과하게 많은 액수가 적혀 있었다.
조금 과장을 보탠다면 저택을 하나 더 지을 수도 있는 금액이었다.
수리공과 수표가 함께 도착할 거란 말에 집사의 턱은 바닥까지 덜그럭 떨어졌다.
대놓고 간섭만 하지 않을 뿐, 서류에 적힌 말대로라면 엘리시움 저택은 황실의 감시하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다음 날, 아직 자리에 드러누운 엘리시움 공작과 겨우 실내용 드레스만 입은 공작 부인은 이른 아침부터 손님을 맞이해야 했다.
아직 날이 추운 겨울이었지만 그들은 무자비하게 문이란 문은 전부 열어젖혔다.
그리고 문은 물론 그동안 먼지조차 제대로 털어 내지 못한 창틀과 거미줄이 길게 들러붙은 천장 구석은 물론 샹들리에의 촛대에 들러붙은 녹 자국까지 벅벅 닦아 내기 시작했다.
'진작 이렇게 할 것을!'
집사는 마음 한구석에 묵은 때까지 싹 사라진 것만 같은 시원한 기분에 저도 모르게 그만 웃어 버렸다.
“수표는, 수표는 어디 있나?"
그러나 그 웃음은 이불을 둘둘 망토처럼 둘러매고 나와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어마어마한 금액이 쓰인 수표만 찾는 엘리시움 공작의 모습에 다시 쑥 들어가 버렸다.
쑥대밭이 된 저택을 지휘하던 청소 감독관이 수표라는 말에 잠시 눈만 깜빡이더니 아아, 하며 히죽 웃었다.
"폐하께서 '선불로 지급하신' 그 수표 말씀이시죠? 떼어먹을 일 없이 매번 꼬박꼬박 영수증 챙겨 드릴 테니 안심하십시오.”
“선불? 지급? 그게 무슨 말인가! 당장 이리 내놓지 못해? 너 따위 남의 집 청소나 하고 사는 천한 것이 그런 돈을...."
집사는 속으로 탄식했다. 그리고 공작의 등 뒤에서 얼굴 근육을 전부 사용해 대신 사과했다.
그러나 감독관은 듣는 사람이 더 민망한 그 말을 전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하여튼 당장 내놓게!”
“공작 각하, 요즘 숙련된 사용인 구하기도 쉽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무슨 헛소리야!” 감독관은 다시 히죽 웃었다. 그리고 등 뒤에 질서정연하게 서 있던 메이드와 하인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폐하께서 일시불로 지불하셨습니다. 기간은 루트비히 모르트 폰 엘리시움 도련님께서 엘리시움 공작이 되는 그날까지, 최소 후작가에서 5년 이상 근무한 경력이 있는 이 친구들이 저택을 관리할 겁니다.”
“뭐야?”
집사는 황궁을 향해 절이라도 올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부족했던 일손을 이렇게 직접 데려와 주시다니! 그것도 전문인으로!
심지어 월급까지 미리 지불하셨단다. 그 어마어마한 액수는 아무래도 저 사람들의 월급이었던 모양이다.
궁지에 몰린 재정 상태를 끌어안고 메이드 모집 공고를 내걸어 봤자 죄수의 가족이나 언제 은수저를 훔쳐 갈지 모를 수상쩍은 사람만 몰리기 일쑤였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이런 전문 인력이 낫지! 황제 폐하, 황후마마 만세다! 집사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결국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공작은 벌벌 떨리는 걸음으로 다시 돌아갔다.
공작 부인 또한 목이 졸린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다른 귀부인을 모신 적 있다는 말은 곧 언제든지 그들이 일했던 저택에 남은 친구들에게 엘리시움 저택의 이야기를 퍼트릴 수 있다는 뜻이었다.
아무리 입단속을 철저히 시킨다고 한들 과연 저 처음 보는 얼굴들을 믿어도 좋은 걸까?
공작 부인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리고 일주일 뒤, 기사가 모는 마차 한 대가 엘리시움 공작저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