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할아버지의 오래된 와인(2)
“왜 마녀가 행복해지는 동화는 없어요?”
미미스 브룬느는 자신을 똑 닮은 녹색 눈동자를 똘망똘망하게 빛내며 야무지게 질문하는 손녀딸을 응시했다.
아장아장 걸어 다니던 무렵 마차 사고로 부모를 잃은 그녀는 단 하나뿐인 가족의 손에 이끌려 시계탑으로 왔다.
'네 나이에 시계탑을 오는 사람은 우리 미미르가 처음일 게야.'
'할아버지, 나도 까만 옷 입고 시계탑에 왔으니 마녀에오?'
아직 죽음이 무엇인지도 모를 나이, 부모님은 머나먼 무지개 너머 나라로 연구를 하러 갔다는 말을 순진하게 믿고 있던 미미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사랑하는 딸과 믿음직한 조수이자 사위를 잃은 슬픔에 잠겨 있던 미미스 브룬느의 얼굴엔 처음으로 미소가 번졌다.
잘 우러난 차 한 잔처럼 잔잔한 미소를 그리고 있던 시계탑의 주인은 구름처럼 하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미미르가 잠들기 전 동화책을 읽어 주는 건 그만의 특권이자 의무였다.
“미미르야, 네가 그런 동화의 주인공이 되어 보련?"
"하지만 탑에 갇힌 공주님 이야기는 나와도 탑에 갇힌 마녀 이야기는 없는 걸요?"
"탑에 갇힌 마녀가 나오는 이야기 속 주인공이 되고 싶으냐?”
미미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화 속 주인공에겐 늘 행복한 결말이 기다리고 있었다.
“미미르가 지금 있는 곳은 어디지?"
"시계탑이요.”
미미스 브룬느는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사랑스러운 손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눈꺼풀이 가물가물 감겨 오는 미미르에게 좋은 꿈을 꿀 수 있는 마법을 걸어주며 미미스 브룬느는 제안했다.
"너는 시계탑에 있고 동화 속 주인공이 되길 원하는 데다 탑에 갇힌 마녀 이야기를 보고 싶어 하니, 네가 마녀가 되어 네 이야기를 동화로 쓰면 되겠구나!"
그렇게 미미르는 마녀가 되기로 마음 먹었다.
미미르는 타고나길 마나와 함께 태어난 아이였다.
더군다나 그녀를 키워 준 사람들은 제국에서도 우수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시계탑의 마법사들이었다.
그러니 그녀가 역사상 가장 어린 나이에 시계탑의 일원이 된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더 이상 동화책을 찾지 않게 된 미미르는 대신 마법서를 읽었다.
미미스 브룬느 또한 그녀에게 책 속 이야기를 들려주는 대신 책에는 나오지 않는 마법사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구름이 되는 마법을 만들었지만 다시 사람으로 돌아오는 마법을 만드는 걸 잊어버린 바람에 여전히 시계탑 언저리를 맴돌고 있다는 어리석은 마법사 이야기.
깃털과 밀랍으로 만든 날개에 마법을 걸어 하늘을 나는 데 성공했지만 태양에 너무 가까이 가는 바람에 그만 호수로 추락해 버린 마법사.
황자님을 애타게 짝사랑하다 결국 사랑의 묘약을 만들었지만 실수로 개구리와 사랑에 빠졌는데, 그 개구리가 저주에 걸려 있던 옆 나라의 왕자님이었던 덕분에 옆 나라로 초청받아 지금도 개구리 왕자님과 연구를 진행 중이라는 마녀.
오늘 하루 좀처럼 마법 수련이 마음대로 진행되지 않아 속상해한 그녀의 기운을 북돋아 주기 위해 미미스 브룬느가 들려주는 이야기 속 인물들은 모두 위대한 사람들이었다.
'저도 언젠가 그런 마법사가 될래요. 하지만 저는 사람으로 돌아오는 마법도 배울 거고, 구름이 마법을 쓰는 방법도 구할 거고, 하늘을 날 때면 적정 고도를 유지할 거고, 또 사랑의 묘약 따윈 만들지도 않을 거예요!'
'우리 미미르는 영특하기도 하지. 이러다 어린 나이에 이 할아버지의 자리를 이어받는 건 아닐까 몰라.'
'...선배님들이 그랬어요. 아무리 내가 할아버지의 손녀라고 해도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고.'
'어이쿠, 그놈들이 그랬어? 이 할아버지에게 말하지 그랬니. 그 몹쓸 입을 조개껍질로 바꿔 줄 수도 있는데.’
'그래서 그 사람들 입을 병아리 부리로 바꿔 버렸어요. 삐약삐약 소리는 귀엽기나 하지!'
열 살도 채 되지 않은 나이에 벌써 그런 마법을 구사했다는 말에 미미스 브룬느는 껄껄 웃었다.
'미미르야, 시계탑의 주인이 되면 가장 좋은 점이 뭔 줄 아느냐?'
'뭔데요?
미미스 브룬느는 대답 대신 금빛 이채로 반짝이는 녹색 눈동자를 빛내며 흐뭇하게 웃었다.
'우리 미미르가 누군가의 선배가 된다면 그때 이야기해 주마.'
그 말은 미미르가 시계탑의 역사를 새로 쓰는 계기가 되었다.
미미스 브룬느는 하나뿐인 손녀딸의 발소리만 듣고도 오늘 하루 그녀의 기분이 어땠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지금처럼, 감정을 꽉 눌러 절제한 채 앞만 보고 무작정 달려오는 경우엔....
"할아버지!"
"우리 미미르, 또 결과가 마음에 안드는 모양이구나?"
얼굴이며 옷이며 검댕이 잔뜩 묻은 미미르가 얼굴 가득 서러운 표정을 지었다.
누군가의 선배가 될 때마다 그녀는 가면을 써야 했다.
할아버지의 명예에 먹칠을 하지 않도록 성적은 누구보다 뛰어나게.
할아버지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생각 또한 누구보다 참신하게.
역시 아직 어려서 어쩔 수 없다는 말을 듣지 않도록 행동은 의젓하게, 어른스럽게.
오직 자신의 어리광을 전부 받아 주는 할아버지 앞에서만 그녀는 진짜 미미르로 존재할 수 있었다.
미미스 브룬느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훌쩍이던 미미르는 축 처진 눈매를 들어 미미스 브룬느에게 말없이 졸랐다.
미미스 브룬느는 어린 나이에 너무 많은 것을 욕심냈고, 결국 그것을 기어이 제 것으로 만든 대가로 감당하기 힘든 짐을 짊어지게 된 손녀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등을 토닥였다.
“그래, 그 이야기 말이지. 내가 시계탑의 주인이 되어 가장 좋았던 일은... 역시 그 와인을 마시던 순간이었단다.”
"어떤 와인인데요?"
미미스 브룬느의 눈은 어느새 아득한 과거를 보고 있었다.
"대대로 시계탑의 주인에게만 내려오는 포도주가 한 병 있어요. 그걸로 축하주라도 한잔하라는 뜻이겠지. 시계탑의 역사만큼이나 아주, 아주 아주 오래된 와인이란다.”
"황실의 역사보다요?"
"이실두르가 들었다간 토라지겠지만 사실인 것을 어쩌겠느냐. 그래. 어쩌면 최초의 포도주일지도 몰라.”
“그럼 황제 폐하의 와인 셀러에도 없겠네요?"
"당연하지! 이실두르가 제발 한 번만 먹게 해 달라고 사정사정을 했지만 나는 거절했단다.”
얼마 전 황태자의 신체 일부 - 미미르는 억울했다. 머리칼 한 올 뽑았기로서니 그 벌로 두꺼운 마법서 한 권을 베껴 쓰라니! - 에 상해를 입힌 전적이 있던 미미르는 통쾌하단 표정을 지었다.
“그럼 그 와인에선 어떤 향이 나나요?"
이미 그녀의 얼굴에서 속상함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러나 미미스 브룬드는 여전히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어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향은... 구름처럼 가벼운가 싶더니만, 시계탑이 있는 호수 밑바닥처럼 묵직하기도 하고. 또 꽃향기처럼 콧속을 간질간질하게 만들더니 겨울 매서운 칼바람처럼 폐가 시릴 정도로 차디차고."
“맛은, 맛은요?"
"또 맛은 어찌나 황홀한지! 포도밭의 기름진 흙빛 초콜릿과 행복이란 감정을 기름 짜내듯 맛으로 짜낸 것 같이 오묘하면서도...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그런 맛이었지.”
“저도 마실 수 있을까요?"
눈을 감고 회상에 잠겨 있던 미미스 브룬느가 한쪽 눈꺼풀만 슬쩍 들어 올렸다.
어느새 미미르는 연구실로 달려가 처음부터 다시 한번 실험을 시작할 준비를 마친 얼굴이었다.
"물론이지. 미미르는 분명 할 수 있단다."
* * *
“...그렇게 말씀하셨단 말이야. 시계탑의 선배들이 일부러 나를 골탕 먹이기 위해 실험 결과를 거짓말로 알려 주고, 가짜 주문을 가르쳐 주고, 어떻게든 나를 깎아내리기 위해 거짓말쟁이로 몰아가려고 해도 할아버지만은 나를 끝까지 믿어 주셨는데. 그런 분이셨는데!"
미미르의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엘리자베스가 그녀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자신의 어깨에 끌어다가 토닥였다.
레온하르트는 지금이라도 자신이 아껴 두었던 비장의 와인을 가져다 바쳐야 할까 고민했다.
그러나 고작 비장의 와인으론 시계탑 대대로 내려온 식초, 아니 와인을 이길 수 없었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나 곤혹스러운 얼굴을 하던 레온하르트는 일리시스가 유난히 조용하자 슬쩍 고개를 돌렸다.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술만 달싹달싹, 입만 벙긋벙긋. 그의 하얗고 잉크 냄새가 남아 있는 손끝이 움찔거리고 있었다.
"일리시스, 무슨 할 말이라도 있어?"
레온하르트의 말에 일리시스가 사냥꾼에게 존재를 들킨 토끼처럼 화들짝 놀랐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현명한 방법을 요구하는 시선이 하나.
너라면 할 수 있다며 처음 만났던 순간과 전혀 달라지지 않은 근거 없는 신뢰감을 마구 뿜어내는 시선이 하나.
마법사도 모르는 방법을 학자인 네가 알겠냐, 하지만 아는 게 있다면 당장 말하라며 훌쩍거리는 시선이 하나.
일리시스는 꿀꺽 침을 삼키고 어쩌면, 하며 운을 뗐다.
“어쩌면... 미미스 브룬느 님께선 일부러 미미르 님께 거짓말을 하신 건 아닐까요?"
"할아버지가? 나에게? 왜? 우리 할아버지를 모욕하지 마! 절대 그럴 분 아니시거든?"
“지, 진정하세요! 저도 미미스 브룬느 님께서 어떤 분이셨는지는 직접 만나뵈었으니 얼마나 훌륭한 분이셨는지 장담할 수 있습니다. 제가 말하려고 하는 건... 그러니까...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미미스 브룬느 님께서 미미르 님을 속인 게 아니라, 어쩌면 '선의의 거짓말'을 하신 건... 아닐... 까요...?"
"할아버지가...?"
끄덕끄덕. 조금 누그러진 미미르의 태도에 고개를 주억거리던 일리시스가 용기를 내어 조금 더 설명을 덧붙였다.
“미미르 님이 그러셨지요. 미미스 브룬느 님은 어떤 순간에도 미미르 님을 믿어 주셨다고요. 그리고 미미르 님이 지금 시계탑의 주인이 될 수 있었던 이유 중에 문제의 와인과, 그 와인의 이야기를 들려주신 미미스 브룬느 님도 계신다구요.”
"그랬... 지... 너, 설마?"
미미르가 가볍게 눈썹을 찌푸렸다. 일리시스는 그녀의 생각에 동의하듯 고개를 흔들었다.
“미미스 브룬느 님은 미미르 님이 이 와인에 대한 호기심을 원동력 삼아 이 자리까지 올 수 있도록 일부러 거짓말을 하셨다. 그게 제 의견입니다.”
미미르는 아무 말 없이 눈만 깜빡였다. 엘리자베스는 소리 없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미미르 님, 분명 아까 그렇게 말씀하셨지요? 지금도 문밖을 나서면 와인의 맛이 어땠냐며 캐물을 마법사로 가득하다고....”
"어, 뭐. 대충 그랬지....”
“어쩌면 미미스 브룬느 님께선 이런 상황마저 예상하신 건 아닐까요? 그분께서 쓰신 책에 '시계탑의 주인이 되던 날 마신 축하주의 맛은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미미르 님은 그 맛과 향을 알고 계시지요. 조금... 거짓말이 섞이긴 했지만 어쨌든, 그들에게 어떤 답을 해야 하는지 이미 알고 계십니다.”
“...나 보고 거짓말을 하라는 거야? 저 식초가 할아버지께서 그렇게 누누이 말씀하신 황홀한 맛이라고?"
“어차피 네가 거짓말을 한다고 해도 다른 마법사들은 확인할 방법이 없잖아. 시계탑의 주인에게만 허락되는 물건이라며.”
레온하르트의 말에 미미르는 잠시 갈등했다. 그리고 영 편하지만은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미미스 브룬느 님께서 말씀하신 것만큼 황홀하진 않더라도, 저희 집안 와이너리에서 나오는 와인은 제법 자신있게 추천드릴 수 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한 병 선물해 드려도 될까요?"
일리시스가 조심스럽게 권했다.
미미르는 울적한 얼굴을 들어 감히 자신에게 먼저 술을 권한 발칙한 하얀 토끼를 노려보며 말했다.
“...축하주로 쓸 만한 거로 가져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