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할아버지의 오래된 와인(1)
한달음에 시계탑으로 달려간 두 사람은 급하게 사람을 보낸 것치곤 이상할 정도로 조용한 분위기에 어리둥절했다.
평소의 어딘가 괴짜 같은 모습은 어디로 가고, 마주치는 사람마다 신전에 기도를 올리러 온 사람처럼 경건한 태도로 그들을 맞이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시계탑의 새로운 시침이 처음으로 한 칸 움직였습니다.”
“새로운 시침... 설마, 미미르?"
“미미르 언니가?"
엘리자베스와 레온하르트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다 흐뭇하게 웃고 있는 이름 모를 마법사의 어깨를 붙잡고 조금 더 자세한 이야기를 캐물었다.
“미미스 브룬느는?"
“미미르 님은 어디 있지요?"
“지금 바로 모시겠습니다. 이쪽입니다.”
마법사의 뒤를 따라가던 레온하르트가 아차 하며 와인이라도 한 병 가져올 걸, 하고 후회했다.
미미르는 자신의 방에 있었다.
시계탑의 다른 마법사와 다를 바 없이 이상할 정도로 차분하고 침착하게.
심지어 책상 위로 두 손을 깍지 껴 올려놓은 모습에 레온하르트는 잠시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어... 미미르?"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안녕, 황후마마?"
"시계탑의 시침이 바뀌었다고 들었는데....”
“아아.”
미미르는 온화한 미소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엘리자베스는 늘 호탕하게 웃던 그녀가 저런 식의 미소도 지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미미르는 책상 위를 가볍게 짚으며 돌아 나왔다. 그리고 푸스스 웃으며 그들에게 말했다.
"마법을 썼지요.”
“마법?"
“사람들의 감정을 억지로 진정시키는 마법 말입니다.”
"왜... 왜 그런 짓을 했어....?"
미미르는 정말 모르겠냐는 눈빛으로 눈을 깜빡였다. 녹색 눈동자의 가장자리를 따라 금빛 이채가 스며 있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다간 시계탑은 세상에서 가장 큰 축포가 되어 황궁 사람들에게 잊을 수 없는 악몽 같은 하루를 선물할지도 모르니까요."
“얘 지금 뭐라는 거야?"
"미미르 님!”
등 뒤에서 다시 문이 벌컥 열렸다. 일리시스 또한 소식을 듣자마자 시계탑으로 달려왔는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한 채로 흐트러진 숨을 내뱉고 있었다.
“잘됐군. 일리시스, 여기서 유일하게 마녀와 대화가 가능한 너라면 지금 미미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겠지.”
“예?”
"황궁 사람들에게 잊을 수 없는 악몽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시계탑 사람들의 감정을 억지로 진정시켰다는데,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어?"
일리시스는 커다랗고 둥근 안경알을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을 쓰는 사람이 가장 위험할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위험한 마법을 사용할 때?"
“아닙니다.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을 느낀 순간입니다. 기쁨, 슬픔, 환희, 비탄, 놀라움, 뭐 어떤 감정이든... 평범한 사람들은 보통 우는 것으로 그 감정을 털어 내지요. 하지만 마법사들은 그러지 못합니다.”
"황명이야. 결론부터 말해.”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레온하르트는 관자놀이만 꾹꾹 눌러 댔다. 일리시스는 잠시 눈을 굴리더니 간략하게 설명했다.
“한마디로, 지금 마법사들의 감정을 강제로 제어하지 않았다면 다들 흥분에 미쳐 날뛰고 있을 거란 말입니다.”
“진작 그렇게 설명하면 좀 좋아! 미미르가 이렇게... 그... 평소와는 다른... 언행을 보이는 것도 그런 이유인가?"
일리시스는 미미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미미르 님, 지금 어떤 심정이신가요?"
“좋아. 아주 좋아. 처음으로 마법을 성공했을 때만큼이나. 최연소로 분침이 되었을 때보다 더 기쁘고, 인간의 언어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야.”
그렇게 말하며 미미르는 싱긋 웃었다. 일리시스는 보란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미친 사람이 다시 미치면 정상인 말고 뭐가 되겠습니까?"
그의 등 뒤에서 미미르가 일그러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어렵지만 대충 상황은 이해했어. 그래, 어쩐지 새로운 시침이 등장했는데 이상할 정도로 시계탑이 조용하다고 했지!”
레온하르트는 허공에 대고 소리쳤다. 미미르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 입꼬리를 한껏 끌어 올리며 미미스 브룬느의 방문을 열었다.
“이젠 내 방이야.”
어서 들어오지 않고 뭘 하냐며 미미르가 턱짓을 했다.
“꼭 저 방으로 가야 하나?"
“여기는 축하하기엔 너무 자리가 좁아서요.”
“으음.”
내키지 않는 티를 꾹 누르며 레온하르트가 앞서 걸었다. 이어서 엘리자베스, 일리시스를 따라 마지막으로 미미르가 설레는 걸음으로 방으로 들어섰다.
“끼얏호!!"
깜짝이야. 엘리자베스는 문이 닫히기가 무섭게 허공으로 펄쩍 뛰어 날아오르는 미미르를 보며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다음 순간 미미르는 다시 즐거운 비명을 내지르며 공중을 빙글빙글 날다가 한참 뒤에야 자리로 돌아왔다.
“내가! 드디어! 시계탑의 주인이야!"
음절마다 꽃이 피고 불꽃이 튀고 눈 앞이 번쩍거렸다.
“그것도 최연소로!"
미미르 언니가 왜 이럴까? 글쎄, 얘는 원래 이런 성격 아니었나? 여기라면 미미르 님이 무슨 일을 하더라도 바깥은 안전합니다. 잠깐, 그 말은 우리는 안전하지 않다는 거 아니야? 이야기가 그렇게 되나요? 이런 망할! 미미르! 당장 문 열어! 미미르, 미미르?
서로 머리를 맞대고 소곤거리던 세 사람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미미르를 돌아봤다.
그녀는 공중을 날아다니며 자신만의 세계에 흠뻑 빠져 있었다.
기쁨이란 감정을 눈으로 볼 수 있게 만든다면 저런 모습일 게 분명했다.
그만큼 미미르는 잔뜩 흥분해서 들떠있었다.
"음, 그런데 미미르.”
"네에에이, 황제 폐하?"
"미미스 브룬느 님은?"
발레리나처럼 발끝으로 서서 빙글빙글 돌고 있던 미미르가 우뚝 제자리에 멈춰 섰다.
"할아버지는 이제 시계탑에 안 계세요."
“그럼?"
“여행을 떠나셨죠.”
“여행? 비유법인가?”
"아뇨. 정말로 여행. 할아버지는 평생을 마법을 위해 바쳤어요. 원하는 책이 있다면 대륙을 건너는 일도 불사하지 않으셨지요. 그 대가로 할아버지는 시계탑의 주인이 되었지만 봄이 어떻게 생겼는지 잊어버렸다고 평생을 아쉬워하셨어요.”
"흠.”
“할아버지는 봄을 찾으러 가셨어요. 아마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저를 보러 오시겠죠.”
“하나뿐인 가족과 헤어졌는데 별로 슬픈 기색은 보이지 않는군."
"할아버지는 또 만날 수 있지만 시계탑의 주인이 된 일을 기뻐하는 건 지금 아니면 불가능하거든요! 어디까지 했더라? 노래는 불렀나? 일스! 나랑 춤춰!"
어어어 하며 일리시스는 미미르에게 끌려갔다.
음정도 박자도 맞지 않는 엉터리 노래를 마구 흥얼거리며 미미르는 그의 손을 붙잡고 빙글빙글 돌았다.
엘리자베스는 레온하르트를 보며 입모양으로 다행이라고 중얼거렸다.
레온하르트 또한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 정신 좀 봐!”
미미르가 다시 비명을 내질렀다. 그 바람에 손을 놓친 일리시스가 으아악 소리를 내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축하주를 잊고 있었네!"
미미르는 손뼉을 짝 치더니 허공으로 팔을 쑥 뻗고 마구 휘젓기 시작했다.
“어디 보자, 분명 여기에 숨겨 뒀는데 ...아!”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다시 팔을 거뒀을 때, 그녀의 손엔 투명한 와인 잔 네 개가 들려 있었다.
“일단 하나씩 받고.”
주인의 기분에 맞춰 허공을 둥둥 춤추듯 떠다니는 잔을 잡기 위해 세 사람은 잠시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어야 했다.
"그리고... 이거다! 황제 폐하, 이게 뭔지 알아요?"
레온하르트는 눈을 가늘게 뜨며 미미르의 손에 들린 와인병의 라벨을 읽었다.
어찌나 낡았는지 반은 흐려지고, 반은 지워진 글씨가 그 와인이 얼마나 오래된 물건인지 말해 주고 있었다.
“대대로 시계탑의 주인이 바뀔 때 축하주로 마시던 귀한 녀석이랍니다! 황제 폐하라 하셔도 구할 수 없는 세상에 단 하나 남은 와인!"
미미르는 제자리에서 펄떡 뛰어올라 공중제비를 돌았다. 엘리자베스가 그 모습에 쿡쿡 웃었다.
레온하르트는 제법 기대된다는 표정으로 와인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미미르의 잔을 가장 먼저 채워주었다.
“늘 궁금했어요. 어떤 향을 가졌을까, 맛은 어떨까. 나를 이 자리에 있게 해 준 건 이 와인에 대한 호기심이 절반은 될 거야.”
"마음껏 누리도록. 축하하네, 미미르. 시계탑의 바늘이 멈추지 않기를 바라지.”
"고마워요!”
발랄한 어조로 말하며 미미르는 불빛 아래에서 가볍게 잔을 기울여 색을 감상했다.
그림자 진 벨벳처럼 부드러우면서도 짙은 붉은빛에 절로 탄성이 나왔다.
이어서 미미르는 코끝에 잔을 대고 가슴 깊이 숨을 들이켰다.
“하아....”
미미르의 얼굴은 이미 반쯤 풀려 있었다. 대체 어떤 향인지 궁금해 레온하르트는 병을 살짝 흔들고 코르크 마개를 킁킁거렸다.
“음... 미미르?"
불안한 표정으로 레온하르트가 고개 기울였다. 그러나 미미르는 무엇이 그렇게도 좋은지 여전히 황홀한 얼굴로 막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 있었다.
“오 이런....”
레온하르트는 슬쩍 몸으로 엘리자베스의 시야를 가렸다.
푸우웁, 하는 소리와 함께 미미르가 막 입에 머금었던 와인을 뿜어냈다.
“뭐, 뭐야 이거? 와인 맛이 왜 이래? 이런 게 축하주라고? 그것도 백 년이 넘게 대대로 이어져 온?"
“향을 맡았을 때 알면서도 마신 거 아니었어?"
엘리자베스는 고개만 갸웃거렸다. 갑작스럽게 눈앞이 가리는 바람에 자세한 사정은 알지 못했지만 아무래도 와인에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나... 나는 마지막으로 나를 시험하는 건 줄 알고 마셨는데!"
일리시스가 양해를 구하고 미미르의 손에서 잔을 빼내더니 꼼꼼하게 와인을 관찰했다.
그리고 탄식했다.
"이건... 축하주가 아니라 축하 식초군요....”
"망할 마법사들! 하여간 마법에만 미쳐서 와인 보관하는 법도 모르지!"
“그건 미미르 너도 마찬가지 아니야?"
“이 와인은 대대로 시계탑의 주인만 마실 수 있던... 할아버지!"
미미르를 제외한 세 사람은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녀를 둘러싼 공기가 검은 뭉게구름으로 변하더니 우르릉 쾅, 작은 번개까지 만들어 내고 있었다.
"으아아! 이렇게 된 이상 시곗바늘을 되돌려서라도 이 와인의 맛을 원래대로 돌려놓고 말겠어.”
“마법을 고작 그런 일을 위해 써도 되는 거야?"
“고작 그런 일이라니! 할아버지도 마시고, 그 전 주인도 마시고, 그 전전 주인도 마셨을 와인을 왜 나만 못 마셔? 이건 불공평해!”
내가 이 순간을 얼마나 고대했는데! 미미르는 그렇게 외치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미미르, 원한다면 황명으로 와인 하나를 보낼게. 그러니 너무 슬퍼하지 말고....”
“이 와인이 아니면 안 돼! 아니, 안 됩니다!”
“그게 그렇게 고집을 부릴 일이야?"
"일이지요! 당장 내일만 되면 다른 마법사들이 그 와인 맛이 어땠냐 꼬치꼬치 캐물을 텐데 문헌에 남겨진 것과 전혀 다른 맛이었다고 말하거나, 이미 식초가 되어 버렸다고 하면 그 꼬장꼬장한 어르신들이 퍽이나 나를 이 시계탑의 주인으로 인정하시겠네요!"
“...고작 와인 하나로?"
“레온,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이라잖아.”
엘리자베스가 그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기며 진정시켰다.
일리시스는 와인병을 들고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미미르는 허리에 손을 얹고 심호흡을 하더니 맥이 탁 풀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언젠가 다시 할아버지를 만나면 이 와인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순식간에 가라앉아 버린 공기에 세 사람은 서로의 눈치만 살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