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3)
“꼭 마법사의 체스를 두는 기분이야.”
“그 망할 체스판?"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려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내가 선택하는 일이 과연 옳은 일일까? 선뜻 움직이질 못하겠어. 발아래에 어떤 말이 있을지 모르잖아.”
제자리에서 빙글 돌며 엘리자베스가 투덜거렸다. 레온하르트는 다 이해한다는 투로 그녀의 손을 잡고 다시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내 엘리자베스, 너는 여왕이야.”
“여왕이지.”
“체스판 위의 여왕님은 목이 날아가기도 전에 항복을 강요받는 황제보다 더 당당하고 용기 있게 행동하는 존재지.”
“당당하고... 용기 있게....”
"연습 삼아 당당하고 용기 있게 사랑한다고 말해 줄래?"
콰득, 또다시 발등에서 느껴지는 고통스러운 감각에 레온하르트는 입술을 꾹 깨물었고 엘리자베스는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으로 새침하게 춤을 마무리했다.
“...나중에, 둘만 있을 때.”
그래도 안 해 준다는 말은 안 하네. 레온하르트는 욱신거리는 발등을 바짓단에 문지르며 씩 웃었다.
첫 번째 공식 일정이 전부 끝났다.
내일 일정은 어쩌고저쩌고, 일리시스가 안경을 고쳐 쓰며 줄줄 읊어 댔지만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일스, 너 요즘 체스 한다며."
"아 예... 이제 본격적으로 감을 잡아서 말입니다.”
“너는 혹시 뇌가 두 개인가?"
푹신한 소파에 반쯤 드러누워 있던 레온하르트가 질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사람의 뇌는 원래 좌뇌, 우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조금 더 들어가면 척수와....”
일리시스는 눈을 깜빡이며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대답을 했다.
"그만, 그만. 안 그래도 정신없는데 더 정신없게 하지 말고.”
엘리자베스는 피식 웃으며 둘의 모습을 지켜봤다. 하루 온종일 서 다녔던지라 발이 욱신거렸다.
"짜릿하지 않습니까?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고 나면 머리가 저릿저릿한 감각 말입니다. 얼마 전 드디어 적당한 크기의 종이를 찾아 그분의 마지막 정리를 증명한 이후로 한 번도 느끼지 못했는데, 미미르 님 덕분에 요즘 매일 저녁 뇌가 상쾌해지는 기분입니다.”
“...혹시 어디 아프냐?"
엘리자베스는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일리시스는 레온하르트와 머쓱하게 시선을 교환하다 헛기침을 했다.
"크흠, 뭐. 아무튼.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편히 쉬시지요.”
레온하르트는 팔만 뻗어 흔들었다. 일리시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방을 나섰다.
"이제 해 줘.”
"뭘?"
"당당하고 용기 있게 사랑한다고 말해 주기.”
그 말에 엘리자베스는 우선 구두부터 벗어 던졌다. 그리고 맨발로 레온하르트를 향해 다가가 그의 무릎 위에 걸터 앉았다.
“리지?"
"가만있어. 지금부터 황제가 어떻게 적의 진영을 망가뜨리는지 보여 줄 테니까.”
레온하르트는 얌전히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엘리자베스의 구두가 저 멀리 날아간 순간부터 이미 그의 진영은 무너져 있었다.
"황실에서 가정교사를 보내는 건 어때?"
흐트러진 엘리자베스의 머리칼을 손끝으로 가볍게 돌돌 감으며 장난을 치던 레온하르트가 권했다.
“가정교사?"
엘리자베스 또한 레온하르트의 금빛 머리칼 속으로 손을 집어넣으며 되물었다.
"당장 급한 불부터 끄고 봐야지. 음, 리지. 지금 여론이 어떻지? 엘리시움과 너에 대해서.”
"...진실을 말해 줘.”
레온하르트는 몸을 일으키고 협탁 위로 팔만 뻗어 미리 준비한 보고서를 가져왔다.
“나의 주군께서 원하시는 대로. 어디 보자, 이 신문에 따르면 평민들은 너를 '동화 속 주인공'이라고 생각한다는데?"
“동화 속...?"
“공작가의 따님이자 황태자와 태중혼약으로 맺어진 약혼녀라는 말에 다들 네가 공주님처럼 오냐오냐 떠받들어지며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생각했는데?”
엘리자베스가 푸스스 웃었다. 공주님은 공주님이었지. 비록 탑이 아닌 저택에 갇혀서 살았지만.
"엘리시움 저택 출신 메이드의 인터뷰를 보니 그게 아니었다는 거지. 완벽한 황후로 만들어지기 위해 어린 시절부터 자유와 즐거움을 빼앗기고....”
“으음, 그 부분은 뛰어넘으면 안 될까?"
“안 될 이유가 뭐가 있겠어. 결론부터 말하자면, 백성들은 루트비히를 가엾다고 여기고 있어.”
“루트비히를...?"
"고용인 해고하고, 드레스 팔고. 매일 집에서 기물 깨지는 소리에 비명 소리가 이어지는 그런 환경에서 애가 잘 자라겠냐는 거야.”
"으음....”
“그래도 누나가 황후인데 뭐가 걱정이냐, 라는 의견이 다수야. 네가 결혼식 날 어떻게 행동했는지 직접 본 사람들 사이에선 '황후가 먼저 친정을 거부했으니 그 아이는 이제 가망이 없다.' 라는 말도 나오는 모양이지만."
"황실에서 직접 한 가문에게 힘을 실어 주는 건....”
“자신과 같은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동생에게 손을 내미는 황후. 백성들이 원하는 동화 속 결말이지. 귀족들이야 노골적으로 싫어하겠지만. 여차하면 전부 숙청할까?"
"황제 폐하!"
엘리자베스가 낮게 목소리를 깔며 레온하르트의 코를 잡아 비틀었다.
“정말 그 방법 말곤 없을까?"
“걱정 마. 가정교사는 루트비히만을 위한 게 아니니까.”
"응?"
레온하르트는 대답 대신 다시 엘리자베스의 볼에 키스했다. 그리고 신문을 착착 접어 원래 있던 자리로 돌려놓았다.
다음 날 엘리자베스의 책상 위로 올라온 건 루트비히의 가정교사 후보 리스트였다.
엘리자베스는 처리 중이던 서류를 잠시 밀어 놓고 비서가 가져다준 리스트를 꼼꼼히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모두 좋은 가문의 귀부인들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모두... 엘리시움과 혈연으로 이어진 가문이네요?"
혈연이란 말에 엘리시움 공작의 입버릇이 떠올랐다.
무슨 무슨 가문은 우리 가문과 몇 대조 전에 결혼으로 맺어진 가문이고....
늘 그런 말과 함께 다른 가문을 깎아내렸던 아버지가 자신의 평소 행실을 그대로 돌려받을 모습을 상상해 보자 조금 통쾌하긴 했다.
"엘리시움 소공작을 위한 검술 스승 또한 후보들을 준비했습니다.”
“벌써요? 아, 아아....”
아직 어린데 너무 이르지 않냐, 라고 물을 생각이던 엘리자베스는 리스트에 있는 이름을 보고 레온하르트의 뜻을 알아차렸다.
루트비히의 가정교사와 그녀가 데려갈 사용인은 어머니로부터 그를 지켜줄 것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검술 스승이자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함께할 기사님은 아버지가 루트비히에게 손찌검을 하지 못하도록 막아 줄 테고.
스승이자 손님 자격으로 저택을 방문한 이들 앞에서 최소한의 이성이 있다면 가문의 명예를 실추시킬 추태는 부리지 않겠지.
'그렇... 겠지?'
엘리자베스는 불안한 얼굴로 펜 끝을 가볍게 씹다가, 아차 하며 볼을 붉혔다.
비서는 아무것도 못 본 척 시선을 돌렸다.
엘리자베스는 두 개의 후보 리스트를 조금 더 검토해 보겠다는 말과 함께 조금 전까지 보고 있던 서류에 서명해 비서에게 넘겼다.
"황제 폐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레온이? 어서 들어오라고 하세요."
"리지! 혹시 바쁜데 내가 방해한 거야?"
“그런 건 아닌데....”
"리스트 봤지?"
엘리자베스는 눈짓으로 주위 사람들을 물러나게 했다. 레온하르트는 직접 차를 우려내더니 그녀의 책상 앞에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어떻게 생각해?"
“음...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기는 하 데... 이 사람들이 정말 루트비히의 편이 되어 줄 수 있을까?"
"역시 그 점이 불안해?"
“직접 만나 볼까?"
"원한다면 자리를 마련해 줄게.”
"으음...."
엘리자베스는 썩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다. 레온하르트는 굳이 이유를 묻는 대신 잠시 기다렸다.
“언제까지고 직접 사람을 보고 판단할 수는 없어.”
"하지만 그 도박이 굳이 지금이어야 할 필요도 없지.”
“내가 본다고 한 적 없어."
“그러면?"
“루트비히의 스승이 될 사람이야. 아무리 내가 좋게 평가한다 한들 그 아이와 맞지 않으면 소용없잖아?"
“루트비히에게 직접 만나 보게 할 생각이야?"
"아무리 황제의 명이라 해도 막무가내로 몰락 직전인 가문의 아이를 가르치라고 하면 이분들의 자존심에 반발심이 먼저 생기지 않을까?"
"그런가....”
“루트비히를 만나 보고, 이 아이라면 가르쳐도 될 것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만 추려서 다시 리스트를 만들어 줄 수 있을까?"
황후께서 원하시는 대로. 공작가에 미리 말해 둘까?"
"부탁할게. 아무리 그래도 청소할 시간 정도는 필요할 테니."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서로를 보며 다시 웃었다.
"그분들을 용서한다는 건 아니야.”
"알고 있어.”
“더 좋은 방법이 있었다면 그걸 택했을 거야.”
“당연히 그래야지.”
"만약 루트비히도 부모님을 용서할 수 없다고... 한다면... 어쩌지?"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의 책상을 훌쩍 뛰어넘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엘리자베스의 어깨를 토닥이며 레온하르트는 마지막으로 고려할 만한 방법을 제안했다.
“새로운 성을 내리는 방법도 있어. 물론 그러기 위해선 루트비히가 그런 영예를 누릴 만큼의 무언가를 해야겠지만...."
“엘리시움이 사라지는 거야?"
“뭐... 표면상으로는. 네 부모 입장에선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겠지. 그때와 달리 지금은 황권 강화를 위해 무리하게 약혼을 맺거나... 리지?"
“...무리한 약혼이었어?"
툭. 엘리자베스의 손에서 펜이 떨어졌다. 레온하르트는 한 박자 천천히 자신의 말실수를 깨닫고 엘리자베스를 돌아봤다.
엘리자베스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지더니 커다란 눈에 눈물이 어룽지기 시작했다.
“리, 리지? 리지? 그런 거 아냐. 약혼은 아바마마와 어마마마께서 정하신 일인지 몰라도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만은 진심이니까! 그러니까 불안해할 필요 없으니, 리지! 울지 말고... 미안해, 내가 경솔했어.”
엘리자베스가 자신의 품에 얼굴을 묻고 어깨를 들썩이며 훌쩍이자 레온하르트는 어쩔 줄 몰라 허공에서 손만 퍼덕거렸다.
그러다 문득 레온하르트는 흑흑, 훌쩍 훌쩍하는 소리가 쿡쿡거리는 것으로 바뀐 것을 알아차리고 황망한 표정으로 엘리자베스를 응시했다.
“...리지?"
“레온이 그랬잖아. 다른 건 다 의심해도, 레온의 사랑만큼은 의심하지 말라고."
“리지!"
백 소리를 지르며 레온하르트가 엘리자베스의 얼굴을 억지로 떼어 냈다.
엘리자베스는 방긋 웃고 있었다.
“우리, 집무실 합칠까?”
"그럴까? 매번 얼굴 보러 오는 것도 번거로웠는데.”
“둘 중 먼저 일 끝내는 사람이 남은 사람 도와주고?"
"티타임도 같이 즐기고."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다시 소리 내어 웃었다.
“참, 그 소식 들었어? 일스 녀석. 드디어 미미르에게 이겼다더라.”
"미미르 언니에게? 아, 그 체스 말이야?"
“어쩐지 최근 들어 회의에 지각을 자주 한다더니, 매일 밤 퇴근하는 척 시계탑에 가서 체스를 뒀다나 봐.”
“세상에. 나는 6시만 되면 온몸의 힘이 풀려 버리던데.”
"일리시스가 걱정인데....”
"응? 왜?"
"미미르 말이야. 분명 그 성격에 녀석의 머리를 열어 본다느니, 뇌가 사실은 여분으로 있는 거 아니냐느니, 호들갑을 떠는 거 아닐까?"
“폐, 폐하! 시계탑에서 급한 전갈이 왔습니다!”
허공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레온, 혹시 미래 예지 능력 있어?"
“그럴 리가... 무슨 일인데 그래?"
“미... 미미르 님이... 미미르 님이....”
"미미르가? 왜?”
설마 정말로 재상의 머리를 해부한 건 아니겠지? 레온하르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엘리자베스 또한 괜히 불안한 마음에 가슴 위로 손을 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