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2)
“앨리스? 좋은 이름이네. 너, 시계탑에 올 생각 없니?"
“...시계탑?"
앨리스의 맑은 눈동자에 호기심이 어렸다. 미미르는 씩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확인한 결과 아직까지 고아원에서 특별한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직접 만나 본 고아원의 원장 또한 함부로 허튼짓을 할 사람으론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역시 아이들에게 직접 물어보고 확인하는 편이 낫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레온하르트는 미미르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낯선 어른의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아이들은 두려워하거나 경계하는 기색 없이 순수하게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그를 반겼다.
“정말로 있었어?"
레온하르트는 스스럼없이 자신에게 다가와 가슴에 달린 황제의 별을 향해 손을 뻗는 아이를 저지하는 대신 아이를 번쩍 들어다 무릎 위에 앉혀 주었다.
“있었어. 타고난 마력을 감당하지 못해 성장이 더뎌지는 경우가 있는데, 제때 마력을 풀어 주지 않으면 아마 오래 못 살 거야.”
미미르가 가볍게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그녀는 난로 앞에서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읽어 주는 엘리자베스를 응시하고 있었다.
낡았지만 깔끔한 카펫 위에 넓은 치마폭을 펼치고 앉은 엘리자베스는 아이들의 눈을 하나하나 맞춰 가며 책을 읽어 주고 있었다.
동화책 속에서 나온 것만 같은 아름다운 황후님이 부드럽고 낭랑한 목소리로 들려주시는 옛날이야기에 어느새 아이들은 푹 빠져들었다.
조심스럽게 그녀의 드레스 자락을 만지작거리는 어린아이는 물론 제법 키가 큰 아이까지, 홀린 듯이 그녀의 주위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모습이 꼭 한 폭의 그림 같이 보여 두 사람은 잠시 아무 말 없이 그 광경을 눈에 담았다.
미미르와 시계탑의 새로운 인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레온하르트의 목소리가 점점 줄어들었다.
"...시계탑에서도 공작가를 어떻게 할 거냐에 대해 말이 나오기 시작했어.”
시계탑의 마법사들이 마법과 관련 없는 일에 호기심을 보인다는 말에 레온하르트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곳이라면 그러려니 넘길 수 있었지만 그 시계탑에서까지 말이 나올 정도라면 상황이 매우 심각하다는 뜻이었다.
“우선은... 리지에게 맡기기로 했어. 황제가 황후의 친정에 대고 함부로 행동하는 것도 오해 사기에 딱 좋으니까.”
"그렇다고 그냥 보고만 있어도 말이 나오겠지.”
“최선을 구할 수 없다면 차라리 차악을 선택해야겠지?"
"시계탑은 황실에게 우호적이지만 어디까지나 사적으로 우호적이어야 해. 공적으로 행동하는 건 거절하고 싶어.”
“그 잘난 마법으로 자동으로 계산해주는 기계 같은 건 못 만드나?"
"만들어 줘도 직접 계산해서 확인할거면서.”
레온하르트는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리지가 어린 시절 어떻게 살았는지는 이미 전 국민이 다 알고 있어. 백성들은 리지 편이야.”
“뭐? 어떻게?"
정말 모르겠냐는 눈빛으로 미미르가 레온하르트를 한심하단 듯 쳐다봤다.
"공작가에서 쫓겨난 하녀들은 많고, 그 하녀들과 인터뷰를 나눌 신문사도 그만큼 많았지 아마?"
"으으음....”
"분명 남동생이었지?"
“공작가의 후계자지.”
“차라리 여자아이였다면 자연스럽게 후계자가 끊겨서 공작가도 사라졌다, 혹은 황실에 흡수됐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꾸밀 수도 있었을 텐데.”
“정말 그렇게 생각해?"
“...아니.”
미미르 또한 직접 그 공작 내외를 본 적 있으니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이 원하는 건 관에 눕는 순간까지 호화스럽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누릴 수 있는 일종의 보험이었다.
황후의 친정이란 이름은 그들에게 무엇보다 튼튼한 동아줄이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녀가 더 이상 엘리시움의 일원이 아니라고 선었했다고 한들 루트비히를 위해서라도 황후는 절대 그들을 버릴 수 없었다.
"리지가 잘 해결할 수 있을까?"
"너무 착해서 문제야. 조금만 더 영악하다거나, 이기적이라거나, 그렇게 살았다면 좋았을 텐데.”
미미르와 레온하르트는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무릎 위에서 황제의 별을 만지작거리던 아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미미르는 그 자리에서 앨리스의 후견인이 되기로 했다.
몇 가지 서류가 오가는 사이 엘리자베스는 아이들의 이마에 키스하고 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주며 작별의 인사를 나눴다.
한창 뛰어놀 나이의 어린아이들을 온종일 상대해야 했던 레인 경은 조금 지친 얼굴로 돌아왔다.
황궁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다음 일정이 시작되기 전까지 죽은 듯이 의자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이제 남은 건....”
“귀족들과 인사 나누기.”
“...부모님도 오셨을까?"
엘리자베스는 불안한 듯 손가락을 꼼질거렸다. 레온하르트는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초대장 리스트를 그녀에게 넘겨주었다.
“정말로 어떻게 할 생각이야?"
“부모님을?"
레온하르트는 무릎 위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괴었다. 엘리자베스 또한 다리를 꼬고 비스듬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엘리시움은 초대 황후를 배출한 명문가야. 개국 공신이기도 하고. 그동안 다른 가문과 혈연으로 이어진 일도 많지. 그리고 무엇보다... 네 친정이기도 하고.”
“나는 친정 없어.”
엘리자베스의 단호한 말에 레온하르트는 슬쩍 떠보듯 그녀의 동생을 입에 올렸다.
"그럼 루트비히는?"
조금 전까지 입술을 꾹 깨물고 모질게 대답했던 것과 달리 엘리자베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루트비히가 여자였다면 차라리 일찍 결혼시키거나, 시녀로 보내 달라 했을 텐데. 지금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엘리자베스의 고개가 작게 끄덕였다.
황후의 자매만큼 그녀의 바로 곁에서 예법을 공부하며 함께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존재가 또 있을까.
말벗이 되는 건 물론, 부모님으로부터 일찍 떨어트릴 수도 있고. 그러다가 적당히 좋은 가문의 영식과 만나게 된다면 그보다 좋을 수도 없겠지.
하지만 루트비히는 남자아이였다. 엘리시움의 후계자로 태어났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언젠가 엘리시움 공작이라 불리게 될 소공작.
“...기사 수련이라도 시킬까?"
"너무 어려. 그리고 소공작을 종자로 부리고 싶어 하는 기사는 없을 거야."
“그것도 다 무너져 가는 가문의?"
"엘리자베스....”
두 사람은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질 않았다.
"슬슬 가셔야 할 시간입니다.”
끙차 소리를 내며 일어선 레온하르트와 달리 엘리자베스는 시선을 돌린 채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가자, 리지.”
결국 레온하르트가 그녀의 두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엘리자베스는 영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그의 팔 위에 손을 얹었다.
"리지. 잠깐 여기 좀 봐 볼래?"
낮게 가라앉은 푸른 눈동자가 그를 올려다봤다. 레온하르트는 부러 입을 크게 벌려가며 아, 이, 우, 에, 오. 천천히 발음했다.
"레온?"
"해 봐. 싫어도 몇 시간은 계속 웃고 있어야 할 텐데, 미리 근육을 풀어 둬야지.”
"으음... 음... 으으음... 아, 이, 우?"
레온하르트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마저 근육을 풀었다.
서로를 마주 보며 아, 이, 우.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모습이 우스웠다. 결국 엘리자베스가 먼저 소리 내어 웃었다.
"이제 좀 긴장이 풀렸어?"
"조금....”
레온하르트는 가볍게 엘리자베스의 어깨를 툭 치고 함께 연회장으로 나섰다.
새로운 황제와 황후가 처음으로 귀족들의 인사를 받는 자리였다.
단정하게 차려입은 귀족들이 각자 지위에 맞춰 미리 마련된 의자에 앉아 있었다.
둘로 나뉜 의자 사이로 붉은 융단 길이 이어졌다.
그 끝엔 한때 이실두르와 프레이야가 앉아 있던 옥좌가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가장 먼저 자연스럽게 귀족들을 둘러봐야 한다는 것도 잊고 텅 비어 있는 의자를 노려봤다.
가장 앞줄, 원래라면 엘리시움 공작 내외가 앉아 있어야 할 자리가 비어 있었다.
그녀의 시선을 좇던 귀족들이 저마다 오, 하며 작게 입을 벌렸다.
그들이 오기 전까지 실컷 악질적인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이들은 짓궂은 시선으로 황후가 어떻게 반응할지 내심 기대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이내 평정심을 되찾고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집중했다.
황후의 친가. 개국 공신 가문. 원래라면 가장 먼저 이름이 불렸어야 할 가문을 대신해 가장 먼저 베아트리체의 가족이 모습을 드러냈다.
옥좌에서 다섯 걸음쯤 떨어진 곳에서 한 번, 그리고 조금 더 가까이 와서 다시 한번.
공들인 연극처럼 미리 정해진 인사말을 나누고 물러가는 의식이 끝나는 동안 엘리자베스는 잔뜩 긴장해 있었다.
작은 실수 하나도 황실의 위엄을 떨어트릴 구설수가 될 수 있었다.
다른 황후들과 달리 뒷배가 되어 줄 친정이 없는 - 정확하겐 스스로 거부한 - 그녀는 그만큼 흔들리기 쉬운 위치에 있었다.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조심하고 또 조심하지 않으면 자신은 물론 어릴 때부터 자신을 키워 주신 선대 황후의 명예에도 누가 된다.
그렇게 생각하자 누군가 보이지 않는 손으로 목을 조르는 것 같이 답답해졌다.
지루한 인사가 끝나고 본격적인 연회가 시작됐다. 귀족들은 조금 전보다 훨씬 가벼운 태도로 두 사람에게 인사를 건넸다.
황궁에서 오래 지냈던 만큼 대부분 엘리자베스도 아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엘리자베스의 사정을 아는 만큼 별다른 말 없이 두 사람을 축복하거나 가벼운 새해 인사를 나눴다.
그러나 평소 황궁에 드나들 일이 없는 먼 지역의 귀족들은 노골적으로 엘리자베스를 흘끔거리고 있었다.
그 시선을 알아차린 레온하르트가 다 괜찮다는 듯 그녀의 손을 꼭 붙잡았다.
굳이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몰락한 가문의 황후 운운하는 소리가 들렸다.
정략결혼이 판치는 사교계에서 연애 결혼이라니?
평민들도 아니고, 세기의 로맨스의 주인공이라도 되고 싶으신 모양이지!
아름답긴 하지만 저 외모도 몇십 년 지나면 다 소용없는 것을.
지금부터 미리 반반한 계집아이를 찾아볼까?
“리지.”
실시간으로 파리하게 질려 가는 얼굴을 보다 못한 레온하르트가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혹시라도 내가 정부 운운하거든 내 다리 사이를 겨냥하고 쏴 버려."
“뭐?"
저놈들을 싸그리 모아다 황족 모욕죄로 내쫓을 수도 없고.
레온하르트는 이만 북북 갈며 보란 듯이 엘리자베스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멀지 않은 곳에서 어머나, 하는 소리가 들렸다. 때맞춰 음악이 왈츠곡으로 바뀌자 레온하르트는 보란 듯이 그녀의 손을 잡고 단상 아래로 내려갔다.
그제야 사람들이 조용해졌다. 음악 소리가 넓은 홀을 가득 채운 가운데 한 몸처럼 우아하게 움직이는 젊은 황제 부부는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루트비히 말이야.”
악, 레온하르트가 표정을 찌푸렸다. 너무 놀란 나머지 실수로 그의 발을 밟아 버린 엘리자베스가 괜찮냐고 말하려는 찰나 그가 말을 이었다.
“너는 그 애가 어떻게 자랐으면 좋겠어?"
"그거 꼭 지금 이야기해야 해?"
"자기 전에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지. 그리고 지금 하면 사람들은 우리가 무슨 소리를 하더라도 흐뭇하게 바라볼 걸?"
그가 보란 듯이 엘리자베스의 허리를 단단히 받치며 입꼬리를 씩 끌어 올렸다.
그러자 젊은 아가씨들이 모여 있던 자리에서 꺄아, 하는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