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1)
고작 체스판 하나였지만 이상할 정도로 거슬렸다.
“...레온?"
“폐하?"
레온하르트는 저도 모르게 가장 위에 있던 체스판부터 하나씩 뒤집기 시작했다.
판이 돌아가면서 전세는 역전과 재역전을 반복했다.
“승부는 어떻게 나지?"
“보통은... 음... 직접 말하려니 부끄럽지만, 제가 집니다.”
"그런 게 아니라. 이런 식으로 판을 뒤집고 또 뒤집다 보면 누가 이겼는지 판단하기 어렵지 않나?"
“그렇지요. 세 번 승부 하면 두 번은 제가 지고, 한 번은...."
“너무 복잡해져서 없던 일로 만들어야 했어.”
“미미르 언니! 레인 경!"
“레인 경, 괜찮은가? 저 마녀가 경의 신체 조직을 조사하겠다고 손발톱을 깎거나 머리카락을 뽑진 않았고?"
“그렇게라도 해서 몸을 두 개로 만들어 달라고 한 건 폐하셨어요.”
"그리고 너는 끔찍한 악몽을 만들어냈지.”
“덕분에 인간을 창조하는 건 금지된 일이라는 걸 그날 처음 알았고, 할아버지에게 엄청 혼났죠.”
"미미르 언니와 묘하게 사이 나쁜 이유가 그거였어?"
“미미르 님... 그 어린 나이에 인체 연성이라니... 당신이란 분은 정말....”
“저는 괜찮습니다, 폐하.”
묘하게 침착한 빅토리아의 말이 아니었다면 두 사람은 다시 20년째 이어지고 있는 말싸움을 다시 계속할 뻔했다.
엘리자베스는 두 사람의 눈치를 살짝 보다 슬슬 우리도 가야겠다며 몸을 일으켰다.
"직접 체스 두는 거 보고 갈래?"
"다음에 와서 볼게요. 레인 경도 많이 지친 모양인데 가서 쉬는 게 좋겠군요."
미미르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과장되게 레온하르트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작별 인사를 했다.
어딜 봐도 예의를 차리기 위해서라기 보단 그를 놀리려는 의도가 다분한 행동이었지만 레온하르트는 고개만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 체스판 말이야.”
사흘간의 꿈같은 시간도 이제 마지막 밤을 맞이했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무릎 위에서 그녀를 올려다보는 제비꽃빛 눈동자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딘지 익숙해.”
“이전에 본 적 있는 거 아니었어?"
“처음 보는 물건이야. 최근 일스 녀석이 시계탑에 자주 들른다 싶더니 저런 걸 만들고 있었나?"
“그런데 왜 익숙해?"
"그러게.”
그가 몸을 옆으로 빙글 돌렸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배에 대고 뭐라 중얼거리는 그의 등을 찬찬히 토닥여 주었다.
“우리 내일부턴 정말 황제와 황후네.”
“첫 번째 공식 일정. 대성당에서 신년 축사 보고, 연설도 한 번 하고, 백성들 알현도 하고.”
"내가 잘할 수 있을까?"
이번엔 레온하르트의 커다란 손이 엘리자베스의 등을 토닥였다.
"이미 잘하고 있어.”
“즉위 후 사흘 동안 아무것도 안 했는데?"
“그 사흘간 아무런 폭동도 반역도 일어나지 않았으면 잘한 거지.”
그렇게 말하며 레온하르트는 키득키득 웃었다. 엘리자베스는 장난스럽게 그를 떠밀었다.
레온하르트의 커다란 몸이 맥없이 바닥으로 데굴데굴 굴러떨어졌다.
“베일리가 아빠가 됐다고 연락이 왔어”
“베일리가?"
몸을 벌떡 일으키다 테이블에 이마를 박은 레온하르트가 다시 드러누웠다.
엘리자베스는 그의 몫까지 대신 표정으로 고통스러워했다.
"끄응... 하여튼... 어마마마도 잘 계시고 아바마마는 낚시에 취미가 생기셨고 아일라는 새로 태어난 강아지 이름을 이졸데와 트리스탄으로 짓고 싶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다는데. 어떻게 할래?"
"음...."
엘리자베스는 잠시 고민했다. 베일리를 처음 만났던 날, 아주 잠깐이지만 따뜻하고 말랑말랑한 솜뭉치에 검은 콩을 콕콕 박아 놓은 것 같았던 강아지의 이름을 레온으로 지을까 고민했던 전적이 있어서였다.
진지하게 한 질문은 아니었던지 레온하르트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이번엔 탁자에 이마를 다치지 않도록 조심해서, 천천히.
그리고 엘리자베스를 가볍게 안아 올렸다.
“내일은 아침부터 바쁠 거야. 그러니 일찍 자자.”
“말이랑 손이 따로 노는 것 같은데, 나쁜 손!”
찰싹하는 소리가 났지만 레온하르트는 그저 웃으며 그녀를 침대 위로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엘리자베스는 그대로 이불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레온하르트는 그 모습을 보며 꼭 롤케이크 같다고 생각했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롤케이크네.”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레온하르트 또한 무의식중에 생각이 입 밖으로 나오자 당황해서 시선을 돌렸다.
“...안 잘 거야?"
"자... 자야지....”
침대 한구석이 묵직하게 흔들렸다. 레온하르트는 슬쩍 팔을 뻗어 엘리자베스의 머리를 받쳐 주었다.
다시 이불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폭신한 비단 이불 끄트머리가 그의 가슴 위로 덮였다.
"너는 좋은 황후가 될 거야."
"으응... 완벽한 황후?"
"좋다는 말이 꼭 완벽하다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니야.”
“하지만 황후의 자리는 단 한 번의 실수로도....”
“많은 일이 생기지. 그래도 엘리자베스, 내가 장담하건대 너는 좋은 황후가 될 거야.”
"근거는?"
“그래야 내가 너에게 어울리는 좋은 황제가 될 수 있으니까."
“그게 뭐야....”
천장을 보고 누워 있던 레온하르트가 엘리자베스 쪽으로 몸을 돌렸다.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의 이마 위로 입을 맞췄다. 잘 자라고 속삭이는 목소리에 반쯤 졸음기가 묻어 있었다.
* * *
신년, 대성당의 장엄한 기도 소리가 하얀 벽을 타고 오르내리는 가운데 성물함에 보관되어 있던 귀한 물건들이 모처럼 세상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굳게 잠겨 있던 문이 활짝 열리는 날.
사람들은 젊은 황제와 황후에게 열광했다.
위로는 유서 깊은 가문부터 아래로는 성조차 없는 백성들까지.
평소 신앙심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던 이들도 오늘만큼은 두 사람을 먼발치에서나마 보기 위해 구름 떼같이 몰려와 대성당을 가득 채웠다.
엘리자베스는 침착하게 천사 분장을 한 어린이들의 도움을 받아 식을 올렸자.
레온하르트 또한 처음이라곤 믿어지지 않을 만큼 자연스럽게 먼저 나서서 예법대로 행동했다.
마치 십 년도 넘게 했던 동작처럼, 자연스럽다 못해 몸이 기억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엘리자베스가 의아함을 느낀 건 레온하르트의 표정 때문이었다.
누가 보더라도 완벽하다는 찬사가 나올 것 같은 행동을 한 당사자는 어딘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물론 다음 순간 그의 표정은 엄격하고 신 앞에서 누구보다 신실한 황제의 얼굴로 돌아왔지만 어쩐지 엘리자베스는 그 표정이 마음에 걸렸다.
무사히 첫 번째 일정을 마친 두 사람은 이어서 자리를 옮겨 야외에 마련된 임시 알현실로 향했다.
야외라고 해도 보온 마법이 있어 추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갓 태어난 아이에게 축복해 주세요, 병든 어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해 주세요, 올 한 해도 가족들과 무사히 보낼 수 있도록 축복해 주세요.
백성들이 그들에게 원하는 것은 대부분 소박하고 단순했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발에 키스라도 할 기세로 깊게 몸을 숙이며 몇 번이나 감사 인사를 하는 부모를 반쯤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그녀가 세운 학교 덕분에 딸아이가 무사히 취직했고, 배 굶는 일 없이 지낼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엘리자베스는 벅찬 감정을 느꼈다.
슬쩍 옆을 보자 소식을 들은 레온하르트의 얼굴에도 미소가 걸려 있었다.
비슷한 감사 인사가 몇 번은 더 지나간 뒤에야 알현식이 끝났다.
잠시 마차 안에서 목을 축이며 쉬던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뿌듯한 얼굴로 웃었다.
“모두 네가 뿌린 씨앗의 결과야.”
레온하르트는 그렇게 말하며 엘리자베스의 어깨 위로 흘러내린 망토를 다시 걸쳐 주었다.
"다음 일정은 어떻게 돼?"
“고아원 방문. 혹시 개중 자질이 있는 아이가 보인다면 후원해도 좋아.”
"내가 마법에 소질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마법 이야기가 나오자 대번에 레온하르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마법은 왜?"
엘리자베스는 장갑 낀 손을 들어 레온하르트의 미간을 꾹꾹 눌러 주름을 펴 주었다.
“그러면 혹시 모를 제2의 미미르 언니를 발견할지도 모르잖아."
"흐음.”
그 말에 레온하르트는 턱을 쓰다듬으며 잠시 고민하더니 문을 열고 시종에게 말했다.
“황후의 명령이다. 시계탑의 분침 두 엇만 데려오도록.”
"레온?"
"아바마마와 장부 정리를 하며 의아하다 생각했던 게 지금 풀렸네. 고아원 출신 누구누구가 지금은 어디서 무슨 공부를 하고 그를 위한 후원금으로 얼마가 나갔는지 살펴보는데, 그중 마법사는 한 명도 없었거든. 나는 그냥 마법사란 족속들이 그렇게 흔한 존재가 아니라 그런 줄 알고 아바마마께 굳이 물어보지 않고 넘겼는데 네 말을 듣고 보니 그런 게 아니었어. 애초부터 찾지 않았던 거야.”
“그 말은....”
“네가 또 한 건 했다는 거지. 황후의 이름으로 직접 후원해도 좋아.”
"내 이름... 음, 아냐. 황실 이름으로 할래.”
"왜?"
“내 재정이 무너져서 더 이상 지원을 못 해 주는 것보단 황실 재정이 무너질 확률이 더 낮잖아? 대신 돈만 내가 내면 되지.”
"흐으음... 리지, 너 분명 어릴 때 수학이 제일 싫다고 하지 않았어?"
“계산은 내가 아니라 비서들이 할 거니까. 나는 사람을 쓰는 위치지 쓰이는 사람은 아니거든!”
“어느 나라 황후인지 몰라도 황후 같은 분이 있는 제국은 참으로 축복받은 곳일 거야.”
레온하르트는 내친김에 그 자리에서 간단한 개요까지 작성했다. 서류를 넘겨받은 엘리자베스가 몇 가지 수정사항을 더하더니 자신의 이름으로 서명했다.
그사이 마차는 고아원에 도착했고 시계탑의 마법사 또한 공간 이동 마법을 사용해 두 사람의 행렬 끄트머리에 따라붙었다.
“미미르 언니?"
“미미르... 결국 네가 온 거냐....”
“마침 잘됐지 뭐야. 그렇지 않아도 답답해서 시계탑 밖으로 나오고 싶었는데.”
“네가 답답할 일이 뭐가 있다고.”
“일스 녀석, 수 읽는 게 훨씬 빨라졌어.”
“체스?"
미미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호위를 담당하던 빅토리아 레인이 미미르를 알아보고 가볍게 인사했다.
네 사람을 기다리고 있던 건 호기심과 동경이 그대로 드러나는 순박한 눈망울을 한 조그마한 아이들이었다.
선대 황후 또한 비슷한 자선 사업을 했던지라 엘리자베스가 특별히 더 신경 쓸 사항은 없었다.
보고를 받는 사이 미미르는 간단한 마법을 보여 주며 황후의 명령대로 마법사의 싹이 보이는 아이를 찾기 시작했다.
“얘, 꼬마야.”
"꼬마는 내 이름이 아닙니다.”
“그러면? 꼬맹이?"
유난히 몸집이 작고 짙은 눈썹이 고집스러워 보이는 여자아이였다.
미미르는 그녀가 마음에 들었는지 씩 웃으며 가볍게 손을 잡고 자신의 마나를 흘려보냈다.
“나는 미미르라고 해. 마법사끼리는 이름을 밝히는 게 예의지."
"마법사도 제 이름이 아닌데요?"
미미르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소녀는 한참을 주저하더니 조심스럽게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앨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