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황후의 티 파티(4)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미미르였다.
"어떻게? 어째서? 뭘 한 거야? 왜 저게 부서졌지? 혹시 너도 소드 마스터니? 아니면 총에 마력을 담기라도 했어? 타고난 마력은 없는 것 같은데 대체 왜 깨진 거지?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말도 안 되는 일을 해내는 마법사의 입에서 말도 안 된다는 말이 나오게 하다니 너란 존재는 말도 안 되는 존재야! 그러니 연구가 필요해!"
자기보다 머리 셋은 더 큰 빅토리아의 어깨에 반쯤 매달리다시피 해 질문과 궤변을 쏟아 내는 모습에 보다 못한 다른 사람들이 그녀를 말려야 했다.
깜짝 놀란 건 빅토리아 또한 마찬가지였다.
여차할 경우 체중으로 찍어 누를 수 있는 검과 달리 총은 아무리 강한 힘으로 방아쇠를 당긴다 한들 총알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우... 운이 좋았나 봅니다....”
얼떨떨한 목소리로 그렇게 대답했지만 그녀의 시선은 과녁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런 사정을 모르는 베아트리체와 로젤린은 레온하르트도, 엘리자베스도 해내지 못한 것을 성공한 기사님이 무척 대단하게 느껴졌다.
동경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눈을 한 로젤린이 어떻게 한 거냐고 빅토리아의 팔을 붙잡고 물어봤다.
베아트리체는 엘리자베스를 지켜 줄 기사의 능력이 기대 이상이자 만족스럽게 웃으며 처음 만났을 때보다 훨씬 부드러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자신의 마법이 깨진 것이 어지간히도 분한 모양인지 미미르의 눈시울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너! 나랑 같이 시계탑으로 좀 가야겠어. 네가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절대 부서지지 않는 마법을 만들고야 말겠어!”
“예? 미, 미미르 님?"
미미르는 빅토리아의 팔을 붙잡고 질질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빅토리아가 어쩔 줄 몰라 하며 구해 달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이내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이 상황을 즐기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포기했다.
“레인 경은 엘리자베스의 기사야. 그러니 이상한 실험은 금지.”
"내, 내가 무슨 실험을 한다고요?"
그러면서 말은 왜 더듬는 건데? 레온하르트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노려보자 미미르는 애써 딴청을 피웠다.
"그러지 말고 다 같이 시계탑에 놀러가는 건 어때요?”
"다 같이?"
시계탑이란 말에 로젤린은 더욱 눈을 빛냈다. 베아트리체는 약간 경계하는 듯 몸을 사렸고 레온하르트는 대놓고 싫은 티를 냈다.
미미르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고 정말로 시계탑에 끌려가게 생긴 빅토리아는 입만 벙긋거렸다.
의견을 꺼낸 엘리자베스만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오랜만에 가 보고 싶은데, 안 될까요?"
'저 미소는 반칙이야. 현자의 돌만큼 이나 세상의 법칙을 무시하는 미소라고!'
미미르는 속으로 잔뜩 투덜거리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며 허공에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아무것도 없던 허공이 갈라지며 그 너머로 미미르의 방이 보였다.
"아무것도 건드리지 말고, 아무것도 만지지 말고, 아무것도 접촉하지 마세요.”
“그냥 숨만 쉬고 있으라 하지 그래?"
“전... 아니, 폐하는 안 오셔도 되는데.”
"미미르 언니이....”
로젤린은 위아래로 고개를 크게 끄덕이더니 아예 두 손을 등 뒤로 돌려 깍지를 꼈다.
그리고 폴짝, 토끼처럼 미미르의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베아트리체는 그보단 우아하게 치맛자락을 살짝 말아 쥐며 공간을 건너갔다.
빅토리아는 정말 이렇게 해야 하냐는 원망 섞인 시선으로 미미르와 황제 부부를 번갈아 보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스승님이 시계탑은 들어가는 게 아니라고 하셨는데....”
미미르는 코웃음을 쳤다. 이미 알베르트를 뱃사공 삼아 시계탑으로 끌고 간 전적이 있는 레온하르트는 말없이 웃었다.
“어릴 때 시계탑에 있는 시계를 잘못 건드렸다가 큰일이 날 뻔했어요."
"어머나, 그런 일이 있었나요?"
“잘 기억은 안 나지만... 미미스 브룬느 님이 계셔서 무사했던 것 같아요.”
“저, 미미르 님! 혹시 마법의 힘을 빌려서 향수를 만들 수 있을까요?"
“그건 어려워. 마나는 한곳에 있으려고 하지 않아. 아주 잠깐 재현하는 거라면 모를까 순식간에 사라질 거야.”
“한곳에 있으려 하지 않는다니요?"
"말 그대로야. 음... 마법 하면 흔히 생각나는 거 하나 말해 볼래?"
“어... 두 분 폐하의 결혼식에서 본 푸른 꽃 마법?”
“조금 더 간단한 예를 들지 그랬어. 사실 그 마법은 말이야....”
“여기가... 시계탑... 스승님이 말씀하신 그대로군요. 세상에서 가장 허술한 보안을 가졌지만 누구도 훔칠 수 없는 지식이 있는 곳....”
"일리시스?”
앞서 걸어 나가던 레온하르트의 발걸음이 멈췄다.
제 딴에는 숨었다고 숨은 거지만 워낙 급하게 숨은 나머지 미처 옷자락까지 신경 쓰지 못했다.
책상 너머로 삐죽 튀어나온 옷을 보고 혹시나 하며 떠 봤는데 으아악 하는 비명 소리와 함께 익숙한 얼굴이 뿅 하고 튀어나왔다.
“...여기서 뭐 해?"
“그, 저는, 그러니까, 미미르 님께 책을 빌려서....”
“일스? 너 책 빌려 간 거 다 돌려줬잖아.”
“생! 생각해 보니! 책이 아니라 다른 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다른 일?”
“어, 그게... 체스라거나... 그....”
“체스?"
점점 더 수상해지는데. 추궁하는 듯한 레온하르트의 목소리와 어느새 그를 둘러싼 사람들 앞에서 일리시스의 목소리는 점점 더 줄어들었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일리시스가 방구석을 가리켰다.
체스를 하러 왔다는 말이 사실인지 그곳엔 체스판이 놓여 있었다.
“...체스... 판...?"
물론 평범한 체스판은 아니었다.
체스판 세 개를 서로 겹치지 않도록 잘 배치해 기둥에 매달아 놓은 모습은 넓게 가지를 펼친 나무처럼 보였다.
자세히 보니 윗면뿐만 아니라 아랫면에도 하얗고 검은 체스판이 그려져 있었다.
퍼즐처럼 작은 홈을 파서 체스판 바닥에도 거꾸로 말을 고정할 수 있게 만든 걸 보면 정말로 체스를 하기 위해 만든 물건인 모양이었다.
"이런 체스도 있나요?"
베아트리체가 흥미를 보이며 다가왔다. 사람들의 시선이 체스판으로 향한 사이 일리시스는 엉금엉금 기어서 시계탑의 문으로 향했다.
"일리시스, 이 체스에 대해 설명 좀 해 주겠어?"
물론 다음 순간 바로 들켜 버렸지만.
어색한 얼굴로 하하 웃던 일리시스는 미미르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눈빛을 보냈다.
미미르는 허락도 없이 몰래 자신의 방에 침입한 그를 질책하기라도 하듯 아예 고개를 돌려 버렸다.
일리시스가 3차원 체스에 대해 설명하는 동안 엘리자베스는 새삼스럽게 미미르의 방을 둘러보고 있었다.
“왜 그래?"
엘리자베스의 곁으로 슬쩍 다가온 레온하르트가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엘리자베스는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으응, 아무것도.”
멋대로 시계를 건드려서 정신을 잃었던 일이 바로 어제 같은데....
조심스럽게 방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던 엘리자베스는 문득 기시감 비슷한 것을 느끼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런 방 구조를 그녀는 하나 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곳이 어딘지 떠오르지 않았다.
“재미없는 설명보단 역시 직접 한번 해 보는 게 나을걸? 그보다 차라도 한 잔 마실래?"
잡동사니가 굴러다니고, 다정한 마녀가 살고 있고, 따뜻한 차 한 잔과 달콤한 디저트와....
“리지, 리지?"
“...꿈에서 봤나?"
“뭐가?"
엘리자베스는 다시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미미르가 마법으로 마련해 준 원탁에 앉았다.
“일리시스, 뭐 해? 체스 두러 왔다며. 네 차례였지?"
“미미르 님 차례였습니다. 저는 그 수를 미리 읽으러 왔구요....”
"읽어도 어차피 못 이길걸."
일리시스는 반박하는 대신 체스판만 노려봤다.
베아트리체와 로젤린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체스판의 구조와 평소 그녀가 즐기던 것과 전혀 다른 규칙보단 미미르의 마법 쪽이 더 재밌어 보였다.
그러나 미미르는 빅토리아를 데리고 실험을 하겠다는 말이 진담이었는지 그녀의 손을 질질 끌어당겨 다른 방으로 향했다.
"위험한 실험은 하지 마!"
“기본적인 실험 윤리는 지키고 있거든요?"
미미르는 빅토리아와 함께 사라졌고, 일리시스는 체스판만 뚫어져라 노려보는 와중에 조금 어색해져 버린 공기가 방을 한 바퀴 크게 휘돌았다.
“그... 으흠, 생각해보니 두 분께서 함께 지내시기에도 부족할 시간을 저희가 너무 많이 빼앗아 버렸군요.”
베아트리체가 테이블보 아래로 로젤린의 옆구리를 쿡 건드렸다.
그러자 로젤린이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나며 베아트리체의 말에 공감했다.
“저, 저 혹시 미미르 님만 괜찮으시다면 다음에 또 올 수 있을까요? 역시 마법을 사용해 향수를 만들거나 시향용 견본을 만들거나 한다면...."
“청첩장은 꼭 보내겠습니다. 저, 그런데 나가는 문이....”
엘리자베스는 얼떨떨한 얼굴로 시계탑의 출구를 가리켰다.
두 영애들은 서둘러 시계탑을 빠져나갔다. 일리시스는 체스판에 푹 빠져 한참 뒤에야 그들이 사라진 것을 알아차렸다.
“저대로 보내도 돼...?"
레온하르트와 엘리자베스는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며 눈을 깜빡였다.
"미미르 언니의 실험은 오래 걸릴까?"
"글... 쎄....?"
“레인 경을 너무 힘들게 하지 않으면 좋겠는데....”
"음... 포기하는 게 좋을 거야.”
“그런가... 그런데 레온."
"응?"
"레온도 저 체스 할 줄 알아?"
의자에 기대앉아 찻잔만 만지작거리던 손이 우뚝 멈췄다.
"그... 그건 왜?"
"응? 아니 그냥. 문득 궁금해져서.”
눈빛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저 괴상망측한 체스에 단단히 꽂힌 모양이었다.
아무리 친구라고 하나 어느 정도 격식을 차려야 하는 두 영애도 자리를 비켜 주었으니 본격적으로 탐구하고 싶겠지.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의 속내를 짐작하며 싱긋 웃었다. 호기심 강한 그의 황후님은 기다렸다는 듯 활짝 웃으며 일리시스의 맞은편에 앉았다.
“황후마마.”
"음, 평범한 체스보다 조금 복잡해 보이네요.”
“꼬...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저 고려할 사항이 조금 더 늘어나는 것뿐이죠.”
“고려할 사항?"
“네. 보시다시피 말은 가로, 세로, 대각선을... 이렇게. 위아래로 이동할 수도 있거든요. 흔히 초보자들이 하는 실수가 눈앞의 먹잇감을 잡으려다 발아래의 덫에 걸린다거나....”
그렇게 말하며 일리시스는 체스판을 뒤집었다. 기둥에 고정되어 있는 줄 알았던 체스판이 빙글 돌아가며 전세가 역전됐다.
엘리자베스는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일리시스의 설명을 경청했다.
"아, 한 가지 재밌는 말이 있습니다. 보통 가장 작은 이 친구가 여왕이 되곤 하지요? 여기선 마법사가 된답니다.”
"마법사요?”
"마법사와 두는 체스니까요."
"재미있군요. 마법사는 어떤 역할을 하나요?"
일리시스는 씩 웃었다.
조금 전까지 베아트리체와 로젤린 앞에서 덜덜 떨던 태도는 어디로 가고 황제의 바로 곁에서 국가의 중대사를 논의하는 재상의 표정이 나타났다.
“수를 물리게 만들지요. 그리고 그 대가로 다시는 체스판 위로 올라오지 못 한답니다.”
“모든 마법에는... 대가가 필요하다?"
“그렇지요.”
“그런 걸 모두 고려해야 한다니, 저는 아무래도 힘들겠네요.”
“평범한 체스도 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짧게 웃었다. 레온하르트는 그 둘의 대화를 잠자코 지켜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역경과 방해물을 모두 뛰어넘어 마침내 반대편 진영까지 간 말은 수를 물리게 만드는 마법사가 된다.
그렇게 마법사가 된 말은 시간을 되돌려서 판세를 뒤엎는다.
그리고 그 마법의 대가로 게임에서 추방된다.
어딘지 굉장히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