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황후의 티 파티(3)
“저주하고 싶다면 과거의 너를 저주하렴. 황제 폐하.”
툭. 레온하르트의 손에 있던 얇은 책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뭐가 뭔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지금까지 엘리자베스를 위해 했던 모든 일이 과거의 자신이 걸어 놓은 저주 받을 연극이었다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 그는 짐승 같은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인간이 낼 수 있는 가장 비참한 소리로 한참을 오열하던 레온하르트가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의 얼굴을 타고 붉은 피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아, 이걸 잊을 뻔했네. 보아하니 눈치챈 것 같지만... 너는 앞으로 평생 자신을 의심하며 살게 될 거야. '과연 엘리자베스를 사랑하는 내 마음은 진심인가?' 하고 말이야.”
시계탑의 주인은 무릎을 굽혀 레온하르트와 시선을 마주했다.
무언갈 말하기 위해 입을 벌렸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물 밖으로 내쳐진 물고기처럼 입만 벙긋거리던 레온하르트가 가까스로 목소리를 내었다.
조금 전까지 시계탑의 주인을 앞에 두고도 전혀 위축되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게 행동하던 그가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지친 목소리였다.
“...리지는, 엘리자베스는 대가로 무엇을 주었지?"
아주 잠깐 초록 눈동자에 연민이 깃들었다. 그러나 시계탑의 주인은 이내 몸을 일으키며 냉랭한 목소리로 답했다.
"자신의 행복해질 미래.”
“...뭐?"
미래를 줬다고? 무슨 그런 대가가, 까지 생각하던 레온하르트의 뒤통수를 보이지 않는 번개가 꿰뚫고 지나갔다.
“설마... 설마....”
시계탑의 주인은 수평선을 바라보듯 먼 곳을 응시하며 안타까움이 가득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아이는 너무 착해서, 보는 사람이 안타까울 만큼 착해서... 네가 시곗바늘을 되돌리고, 자신을 평생 속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 아이는 불행에 빠지겠지.”
시계탑의 주인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안타깝다는 시선으로 레온하르트를 응시했다.
“하지만 나는 이미 '행복해진 미래.'를 받았어. 그러니 너는 절대 그 아이에게 네가 한 짓을 고백하지 못해. 용서도 받을 수 없어. 그저 평생 괴로워하며 속만 썩이다 그렇게 죽는 거야."
“내가 괴로운 건 상관없어. 마땅히 받아야 하는 벌이니까. 하지만 리지는... 리지는... 정말 그게 순수한 행복이라고 할 수 있어?"
“행복의 가치를 결정하는 건 리지 본인이야. 그 아이가 행복하다면... 그걸로 된 거야.”
"되긴 뭐가 된다는 말이야!"
레온하르트는 저도 모르게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온갖 방어 마법, 혹은 공격 마법이 달려들 것이란 예상과 달리 의외로 순순히 그녀는 자신의 멱살을 내어 주었다.
"당신은... 미쳤어...."
음절 하나하나마다 끓어 넘치는 감정을 억지로 쑤셔 넣으며 레온하르트가 말했다.
시계탑의 주인은 그저 웃었다.
“이 정도 수준의 마법을 인간의 정신력으로 구사할 수 있을 리 없잖아?"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어딘지 서글프게 들렸다.
그녀의 마력이 레온하르트의 사지를 붙잡고 강제로 떼어 냈다.
보이지 않는 힘이 조금 전 낡은 의자 대신 자신이 앉아 있던 화려한 의자에 그를 앉혔다.
대화는 그렇게 끝났다. 무거운 침묵이 두 사람의 그림자를 더욱 어둡게 만들었다.
시계탑의 주인은 책꽂이에 기댄 채 눈을 감고 고민에 빠져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어딘가 넋이 나간 모습으로 무릎 사이에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먼저 침묵을 깬 건 레온하르트였다.
“...리지에게 돌려보내 줘."
지금 당장 그녀를 보지 않으면 미쳐 버릴 것 같았다. 그리고 두려웠다.
그녀를 그리워하는 이 감정마저 마녀의 말대로 과거의 자신이 낙인처럼 남겨 놓은 마법의 일부일까 봐.
"조금 더 진정하고 가는 게 어떨까?"
“제발.”
시계탑의 주인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이것으로 황제 폐하께 '제발'이란 애원을 듣는 건 두 번째군.”
“세 번, 아니. 몇 번이고 말해 주지. 시계탑의 주인, 나를 당장 엘리자베스 곁으로 돌려보내 줘. 제발."
잔뜩 쉬어 버린 목소리와 달리 레온하르트의 눈동자는 맑고 고요했다.
시계탑의 주인은 잠시 눈만 깜박이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대답해 주겠나?"
"해 봐.”
레온하르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걸음 앞으로 내딛는 동작이 무척 힘겹게 느껴졌다.
“리지는... 엘리자베스는... 행복해진다고... 확신할 수... 있는 건가?"
연극이어도 좋아. 그 사람이 우는 모습은, 슬퍼하는 모습만은 보고 싶지 않아. 그렇게 만들고 싶지 않아.
나에게 그 귀한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힘이 있느냐고 그는 묻고 있었다.
한바탕 거친 풍랑이 지나간 바다처럼 고요하고 맑은 눈동자를 응시하며 시계탑의 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레온하르트는 이곳에 발을 들인 이후 처음으로 웃었다.
"그럼... 됐어.”
정말로 그것이면 만족했다는 듯 레온하르트는 미소 지었다.
시계탑의 주인은 그런 그를 보며 한참을 고민했다.
그리고 어깨까지 으쓱여 가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 정말! 어쩔 수 없지. 이 상태로 돌려보냈다간 분명 리지가 슬퍼할 테니 조금은 자비를 베풀어 줄까.”
레온하르트는 갑작스러 그녀의 태도 변화에 다시 긴장했다.
“그 아이의 불행은 네 탓이 아니야. 너의 불행 또한 네 탓이 아니지. 너는... 아주 먼 옛날부터 천천히 곪아 들었던 상처를 도려 내는 과정에 불과해.”
“과정?”
"왜 프레이야는 그렇게 숨을 거두었지? 왜 이실두르는 그녀를 지켜 주지 못했지? 왜 네 할마마마는 그렇게 엄하셨지? 왜 엘리시움 공작가는 그렇게까지 타락했지? 결국 누구의 잘못이지?"
"그렇게 따진다면-.”
“끝도 없겠지. 그러니 너무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 누구의 탓도 아니지만 동시에 모두의 탓이야.”
“...마법사와 멀쩡한 대화를 하려 한 내가 어리석었지.”
“그걸 이제야 알다니!"
레온하르트는 쯧, 하며 혀를 차며 시계탑의 주인을 노려봤다.
“그러니까... 음... 이건 상처에 뿌리는 약이라고 생각해. 이곳에서 빠져나가면 너는 모든 것을 잊을 거야.”
“잊는다고?"
"네 시곗바늘은 거꾸로 돌아갔어. 그리고 다시 제자리를 찾았어. 지금부턴 완전히 새로운 시간이야.”
"알기 쉽게 설명해 줬으면 한다만."
"하여간 이래서 평범한 사람들이란! 일스를 반만이라도 닮으면 좀 좋아?”
“일스가 여기서 왜 나와? 아니, 당신이 일스를 어떻게 알지?"
"크흠, 그건 알 필요 없고! 하여튼 레온하르트, 당신이 해야 할 일은 하나야. 그 아이를 행복하게 만들어 줘. 그거면 돼.”
그 말을 들은 레온하르트가 그녀를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째려보자 그녀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죄책감을 가질 이유고 원인이고 용서받지 못할... 아! 때려치우라지! 전부 잊어. 그리고 그냥 행복하게 잘 먹고 잘 살라는 말이다!”
시계탑의 주인은 결국 발을 쿵 구르며 강제로 레온하르트를 내쫓았다.
손끝과 발끝부터 천천히 흐려지기 시작하는 것을 본 레온하르트가 마구 발버둥 쳤다.
“전, 전부 잊는다니. 잠깐, 나는 그럴 수... 이봐! 미미르!"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레온하르트, 엘리자베스. 너희는 행복해 질 거야.”
그 말을 마지막으로 레온하르트의 시야는 완전히 암흑으로 물들었다.
* * *
레온하르트는 눈을 떴다.
따스한 난롯가에 있다 그만 가벼운 백일몽이라도 꾼 모양이었다.
천천히 황태자궁을 한 바퀴 둘러본 레온하르트는 책상 서랍이 튀어나온 것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런, 새로 바꿔야겠군.”
서랍 밑바닥의 나무가 들려 덜렁거리고 있었다.
시종을 부르려다 말고 그는 멈칫했다.
그냥 이대로 둬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먼 미래에, 어느 날인가 그를 쏙 빼닮은 아이가 저 서랍을 발견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또 재밌을 것 같았다.
황태자궁을 나선 레온하르트는 곧바로 엘리자베스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미미르는 씁쓸한 미소와 함께 듣는 이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걸로 된 거야.”
막 티 파티가 끝나 온실을 나서던 엘리자베스와 그녀의 손님들이 그를 발견하고 저마다 예의를 표했다.
“지금부터 사격장에 갈 건데, 레온도 같이 갈래?"
“사격장? 거긴 왜?"
“미미르 언니는 총도 막을 수 있는 마법 장벽 연구가 한창이고, 레이디 베아트리체는 키르스텐 대공이 말을 안 들을 때를 대비해서 배워 둘까 생각 중이고, 레이디 로젤린은 화약 냄새를 잘 기억했다가 그것과 반대되는 개념의 향을 만들어 총사들의 몸에 배인@[밴] 화약 냄새를 지우려는 시도를 하고 싶다 했고, 또 레인 경은....”
“가장 가까운 곳에서 마마를 지켜 드리고 싶습니다.”
엘리자베스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정복 차림의 빅토리아는 기합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황후만을 위한 친위대를 만들까 하던 참이었는데, 마침 잘 되었군.”
"폐하!"
빅토리아의 얼굴에 '감격’ 두 글자가 동동 떠다녔다.
“모든 것은 황후에게 일임하겠습니다. 다만 그러기 위해선....”
모두의 시선이 황제에게 집중됐다.
“적어도 내 사격 실력보단 뛰어나야겠지. 경의 사격 솜씨 또한 짐을 만족시킬지 궁금하군.”
그 말에 빅토리아는 자신 있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엘리자베스는 웃으며 모두를 이끌고 사격장으로 앞섰다.
"준비 끝! 어디 한번 쏴 봐!”
총구부터 과녁까지의 거리 정중앙에 녹색 마법진이 떠올랐다.
레온하르트가 가장 먼저 방아쇠를 당겼다.
그의 총알은 마법진을 뚫고 그 너머로 날아갔다.
그러나 총알 자국은 과녁 정중앙에서 한참 비껴간 곳에 남아 있었다.
“칫, 조금 더 단단하게 해야 하나....”
"마법진을 강제로 뚫으려다 궤도가 벗어난 것 같은데. 단단함보다 오히려 이 점을 살리는 건 어떻겠나?"
엘리자베스는 마법진에 의해 총알의 진로가 바뀔 것을 생각하며 총을 쏘았다.
예상대로 마법진은 다시 한번 부르르 몸을 떨며 곧게 날아가던 총알을 마구 흔들어 놓았다.
"그래도 과녁 안에 들기는 했네요.”
“역시 제국에서 제일가는 총사답습니다. 리지, 잘했어.”
"흐으음... 아냐아냐, 애매하게 비껴가게 만들어 봤자 그것까지 계산해 버리면 말짱 도루묵인걸.”
“아예 무작위로 흘려 내거나?"
“불가능해. 저 마법진은 일정 수준 이상의 물리력이 닿을 경우 그에 맞게 일정한 진동으로 흔들려서....”
미미르는 레온하르트를 붙잡고 한참이나 물리 법칙이니 마법의 법칙이니 하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사이 빅토리아는 심호흡을 하고 사격 자세를 취했다.
기본 소양으로 익혔다는 말은 순 겸손이었는지 자세부터 호흡까지 교과서에 실려도 좋을 만큼 완벽한 모습에 관중석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두 영애들은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흡, 하는 소리와 함께 화약 냄새가 한층 더 짙어졌다.
동시에 펑 하는 소리가 나더니 자욱한 먼지바람이 일었다.
"마... 말도 안 돼....”
가벼운 바람을 불러와 먼지바람을 치워 낸 미미르가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얇은 얼음처럼 산산조각난 마법진의 잔해 너머, 정중앙에 구멍이 난 과녁판이 흔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