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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폐하가 시곗바늘을 되돌린 사연-110화 (110/130)

110화 황후의 티 파티(2)

빅토리아가 모처럼 자신을 내려놓고 즐기는 사이 레온하르트는 자신이 지냈던 황태자궁을 다시 둘러보고 있었다.

그와 그녀 사이에서 후계자가 태어나기 전까지 황태자궁은 이대로 유지, 보존된다고 했다.

비록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그날이 너무 늦지 않았으면 좋겠다 생각하며 레온하르트는 자신이 남겨 놓은 흔적을 하나둘 눈으로 쫓기 시작했다.

여섯 살, 침대 옆 협탁 아래에 새겨놓았던 낙서.

여덟 살, 아직 서툰 글씨로 꼬물거리며 썼던 '인셍'계획표.

'그 종이가 분명 여기 있을 텐데....'

책상 서랍을 끝까지 열고 바닥을 살짝 들어내자 숨겨진 틈과 함께 색이 바랜 종이가 보였다.

레온하르트는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과연 지금 자신은 어린 시절 계획한 인생을 얼마나 잘 따랐는지 되돌아보기 시작했다.

'뭐라고 써 놓은 거지?'

레온하르트는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분명 글자처럼 보이지만 읽을 수 없었다.

'암호문인가?'

종이를 이리저리 뒤집어 가며 한참 살펴보던 레온하르트는 뒤집힌 숫자를 발견하고 피식 웃었다.

거울에 비친 것처럼 글자를 뒤집어쓰는 것까진 좋았는데, 숫자마저 뒤집어 쓴 바람에 암호문의 비밀은 허무할 정도로 쉽게 풀려 버렸다.

레온하르트는 머릿속으로 첫 번째 문장을 뒤집어 보았다.

[X월 XX일. 어마마마 사망.]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레온하르트는 마저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그가 기억하고 있는 인생과 전혀 다른 삶이 그곳에 적혀 있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정말 내가 쓴 글인가?'

종이에는 프레이야가 숨을 거두는 날짜는 물론 그 이후 일어날 일까지 적혀 있었다.

가장 최근에 일어날 예정이었던 건 독립을 요구하는 키르스텐 공국과 전쟁을 각오하고 외교 담판을 짓는 일이었다.

혹시 날짜만 같을 뿐, 몇 년 뒤에 일어날 일을 예언한 건 아닐까 하는 추측이 들었다.

그러나 설령 당장 내일 제국의 깃발을 몸에 두른 자객이 공국의 대공을 암살한다 하더라도 일 년 만에 관계가 전쟁을 불사해야 할 정도로 악화되진 않을 터였다.

'어쨌든 누가 보기라도 하면 곤란하니....'

레온하르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난로 속으로 종이를 던졌다.

누렇게 색이 바랜 종이는 끄트머리부터 붉게 타들어 갔다.

희미한 종이 타는 냄새에 레온하르트는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하얀 연기가 뱀처럼 끝없이 긴 꼬리를 끌고 그의 얼굴로 올라왔다.

고작 종이 한 장치곤 연기가 조금 많다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기가 눈에 들어가지 않도록 눈을 감고 손으로 휘휘 쳐 내던 레온하르트는 결국 난로에서 뒷걸음질을 쳤다.

아무래도 오래된 종이다 보니 연기가 많이 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레온하르트는 경악했다.

"여기는...?"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가 있던 곳은 하얀 대리석 타일 위로 붉은 융단이 깔린 황태자의 침소였다.

그러나 지금 그가 서 있는 곳은 그의 방의 절반 정도나 겨우 될 법한 좁은 공간이었다.

푹신푹신한 융단은 마찬가지로 붉은 색이었지만 그의 방에 깔린 것보다 조금 더 어두운 기운이 섞여 있었다.

벽 또한 창문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대신 책이 가득 꽂힌 책꽂이가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책꽂이에 들어가지 못한 책은 탑처럼 높이 쌓여 있었다.

그렇게 쌓인 책 무더기가 서넛에, 발에 차이는 것이 있어 아래를 보자 사람의 두개골 모형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설마 내가 그 나이에 공간 이동 마법을 종이에 새겨 놨을 리는 없고.'

레온하르트는 자신의 애검을 두고 온 것을 진심으로 후회하며 온몸의 감각을 긴장시켰다.

'...미미르가 생각나는군.'

구석에 대충 처박아 놓은 먼지와 천장 모서리의 거미줄을 보며 레온하르트는 시계탑의 작은 주인을 떠올렸다.

출구를 찾아 조심스럽게 방을 둘러보던 레온하르트는 방구석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는 커다란 솥을 보자 허, 하고 헛웃음을 흘렸다.

그가 알기로 저런 물건을 다루는 사람은 미미르 외엔 없었다.

'종이를 태웠더니 미미르의 연구실로 강제 이동됐다?'

혹시 그 종이가 사실 공간 이동 마법이 새겨진 종이였나?

가장 그럴듯한 추측을 하며 레온하르트는 우선 방의 주인이 돌아오길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창문도, 문도 없는 이곳은 안타깝게도 주인이 원할 때만 문이 생기는 공간인 모양이었다.

대체 어쩌다가 그런 종이에 알 수 없는 불길한 예언 같은 걸 써 놓았는지는 몰라도 미미르를 만나면 다시 돌아갈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레온하르트는 팔짱을 낀 채 천천히 책꽂이에 꽂힌 책의 제목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마법에 대한 적성도, 흥미도 없던 그는 어느 책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시곗바늘을 되돌리는 마법]

마법서라기보단 동화책 제목 같은 문장이었다.

언제 미미르가 올지 모르니 책이라도 읽으면서 기다릴까.

그런 심정으로 레온하르트는 책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안 돼.”

라는 말이 들리기 직전까지.

* * *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레온하르트는 황태자궁에서 찾은 종이에 왜 공간 이동 마법 따위가 붙어 있는지 따지기 위해 몸을 돌렸다.

“...누구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미미르지만 미미르가 아니었다.

붉은 머리칼, 고양이처럼 새침하게 올라간 눈매와 선명한 초록 눈동자는 분명 미미르의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미미르가 아니었다.

시계탑의 최연소 주인이 될지도 모른다 여겨지는 마법사가 아닌, 아니. 어쩌면 인간이 아닐지도 모르는 낯선 분위기 앞에서 레온하르트는 저도 모르게 허리춤에 손을 가져다 댔다.

손에 잡히는 것이 없어 분한 얼굴로 입술만 깨물며 레온하르트는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는 여자를 노려봤다.

"시계탑의 주인.”

“그럴 리 없다. 내가 아는 시계탑의 주인은-.”

"미미스 브룬느?”

“...정체가 뭐지?"

여자가 피식 웃었다. 노골적인 경멸과 비웃음이 담긴 조소였다.

"일단 좀 앉지.”

그녀가 하얀 손을 허공에서 휘저자 둥근 테이블과 의자 두 개가 나타났다.

하나는 옥좌라 해도 좋을 만큼 화려했으나 다른 하나는 겨우 의자 꼴만 갖춘 낡은 나무 의자였다.

레온하르트가 잠시 주춤한 사이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이 화려한 의자에 앉았다.

태어나서 처음 겪어 보는 모멸감에 레온하르트는 말없이 여자만 노려봤다.

"시계탑의 주인이라고 불러.”

여자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손짓했다. 이번엔 찻잔과 주전자가 나타났다.

레온하르트는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낡은 의자에 앉아 양철로 된 컵만 내려다보았다.

“내가 모르는 또 다른 시계탑이 있나? 당신이 누군지는 몰라도 손님 대접만큼은 미미르가 더 예의 바르군."

"어머, 칭찬 고마워.”

시계탑의 주인은 꼭 자신에게 하는 칭찬을 들은 것처럼 실쭉 웃었다.

"여긴 어디고, 당신은 누구고, 또 어떻게 해야 나갈 수 있는지 당장 말해."

“무서워라. 정말로 다 잊은 모양이네.”

"말장난할 시간도, 이유도 없어.”

초조함을 배짱으로 감추며 레온하르트는 냉정한 어투로 말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자칭 시계탑의 주인이란 자는 느긋하게 찻잔만 비우고 있었다.

“리지는 행복할 수 있을까?"

찻잔 가장자리를 하얀 손가락으로 매만지며 시계탑의 주인이 질문했다.

레온하르트는 무슨 당연한 것을 묻냐는 투로 대답하려다,

"그야 당연....”

결국 문장을 끝내지 못했다.

“그래, 그래. 머리는 기억 못 해도 몸은 기억하는 모양이구나. 사람이 최소한의 염치가 있으면 그 정도는 해야지.”

시계탑의 주인이 붉은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자베스 이졸데 폰... 에스페도르는 행복해진다.”

“레온하르트 트리스탄 폰 에스페도르는 그녀를 행복하게 해 준다.”

“아까부터 영문 모를 소리만 하더니, 무슨 당연한 말을....”

“응. 당연한 말이야. 그에 걸맞은 대가를 치렀으니까.”

“...대가라고?"

다시 한번 시계탑의 주인이 웃었다. 혼란스러워하는 레온하르트의 모습은 그녀가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볼만했다.

“마법도 아니고 대가라니, 무슨 헛소리를....”

“헛소리로 들려? 유감이네. 폐하께서 나에게 매달리던 그 순간은 역시 남겨둘 걸 그랬나.”

혼잣말에 가까운 투로 중얼거리며 시계탑의 주인은 찻잔을 홀짝였다.

레온하르트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조금 전부터 자칭 시계탑의 주인이 하는 말이 무척 거슬리고, 또 신경 쓰였다.

“...내가 엘리자베스를 위해 나도 모르는 사이 당신과 거래라도 했던 모양이군.”

“정답! 정확하게 모르는 게 아니라 잊은 거지만."

"...잊었다고?"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되돌려진 시곗바늘은 다시 째깍, 째깍, 움직여서 원래 자리로 돌아왔어. 당신은 엘리자베스를 행복하게 만들었고, 엘리자베스는 행복해졌지. 그러니 이제 마지막 대가를 받아 갈 차례야.”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내가 엘리자베스를 행복하게 해 준 건."

“열 살, 처음 엘리자베스를 만나러 가던 날. 너는 어째서 그 옷을 골랐지?"

레온하르트는 기억을 더듬었다. 그런 옷은 엘리자베스의 머리색과 어울리지 않으니 다른 옷을 가져오라 명령한 기억이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오냐오냐 떠받들어지며 자란 열 살 황태자 전하께서 왜 약혼녀를 위한 신발을 준비했을까? 그것도 물망초 자수를 놓아."

“그건....”

레온하르트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다.

시계탑의 주인이 속삭이는 목소리가 바로 귓가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한 번도 만나 본 적 없는 약혼녀가 어떤 머리색을 가지고 있었는지.

어째서 다른 물건이 아닌 신발을 선물해야 했는지.

왜 굳이 그녀를 황궁으로 데려왔는지.

“.....시계탑의 주인이라 했나.”

“주인이지. 비록 시곗바늘은 고장 났지만.”

으드득. 레온하르트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간청했다.

“내가... 리지를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해 바친 대가는... 무엇이었지?"

그 말을 들은 시계탑의 주인은 오랜시간 공들인 실험의 결과물을 지켜보듯 뿌듯한 얼굴로 말했다.

“너 자신.”

레온하르트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내가 나를 마법의 대가로 바쳤다면... 지금 여기 있는 나는 뭐지?"

“사과할 대상을 지워 버린 희대의 얼간이, 용서받을 기회를 스스로 걷어찬 다시없을 머저리,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감내하겠다며 스스로 구원받을 길 없는 죄인을 자처한 어리석은 놈이지.”

유쾌한 목소리로 노래하듯 중얼거리던 시계탑의 주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책꽂이에 꽂혀 있던 어떤 책 하나를 꺼내어 레온하르트에게 주며 그녀는 독사의 독처럼 차디찬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는 절대 그녀에게 용서받지 못할 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말할 수 없어.”

저주나 다름없는 선언이었다.

"그 말을 해 버리면, 네가 평생 동안 그녀는 물론 주위 사람까지 모두 속였다는 것을 고백하면, 용서를 빌면, 그 아이는 과연 너를 용서할까? 그리고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너를 사랑해 줄까? 네 곁에서 순수하게 행복해할 수 있을까? 응?"

혀끝에서 녹슨 철 맛이 났다. 레온하르트는 결국 터져 버린 입술을 대충 소매로 닦아 내며 그녀가 주고 간 책 표지를 노려봤다.

[어떤 황제 이야기]

"그렇게 할 자신은 있고?"

손톱자국이 선명하게 남은 손을 억지로 끌어다 책을 넘기는 순간 그녀가 킥, 하며 조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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