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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폐하가 시곗바늘을 되돌린 사연-109화 (109/130)

109화 황후의 티 파티(1)

황실 근위대 소속 빅토리아 레인은 자신의 이름 앞으로 도착한 초대장을 심란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노려봤다.

초대장에는 황후께서 직접 주최하시는 티 파티에 초대한다는 문장 하나만 적혀 있었다.

'차라리 그날 일이 있어서 불참한다고 할까?'

곱게 자란 귀족 아가씨들이 바글바글한 가운데 홀로 산처럼 외떨어져 앉아 있을 자신의 모습이 지나칠 정도로 선명하게 그려졌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드레스 코드가 없다는 것일까.

만일 드레스 코드가 있었다면 정말 거절했을 거라 생각하며 빅토리아는 옷장을 열었다.

근위대에서 지급되는 기본적인 물품을 제외하면 사복이라곤 고작해야 면 블라우스와 가죽 바지, 그리고 코트 한 벌이 전부였다.

'적당히 정복 차림으로 가면 되겠지....'

그리고 인사만 드리고 나오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빅토리아는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좀처럼 잠이 오질 않았다. 결국 몇 번 뒤척거리던 빅토리아는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있었던 일은 아마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황후마마께서도 총을 다루신다고 얼핏 들은 기억이 있는데....'

유난히 자신에게 더욱 엄하고 혹독했던 스승님 곁에 서 있던 황후마마는 조금만 거센 바람이 불어도 휙 날아갈 만큼 하얗고 여린 꽃 같은 분이었다.

그런 분이 총을 다룬다니, 좀처럼 상상이 가지 않는 모습이었다.

"베아트리체! 오랜만입니다. 그동안 무탈했나요?"

"황후마마를 뵙습니다. 저야 걱정할 일이 뭐가 남아 있겠습니까."

“황후마마, 언니 말에 속으시면 아니되어요. 바로 어제도 대공께 보낼 답장에 뿌릴 향수를 두고 한참을 고민하셨다니까요?"

로즈! 베아트리체가 결국 언성을 높였다. 로젤린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딴청만 피워 댔다.

“빌려드린 것, 다시 돌려드립니다. 부디 제 행복이 베아트리체에게도 닿았으면 합니다.”

“제국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 황후마마라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그런 분의 행복이니 분명 베아트리체 언니는 행복해질 거예요.”

로젤린의 말에 베아트리체의 볼 위로 붉은 꽃물이 들었다.

그녀의 결혼식을 앞두고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티 파티였다.

로젤린은 작별이 머지않았음을 느끼고 평소보다 더욱 베아트리체에게 친근하게 굴었다.

베아트리체 또한 홀로 두고 가야 하는 아끼는 동생이 걱정되었던지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작은 한숨을 폭 내쉬었다.

"황후마마, 부디 제가 가고 나거든 로즈를 잘 부탁드립니다. 이 철없는 아이를 대체 어쩌면 좋아....”

"언니! 누가 보면 제가 데뷔탕트도 치르지 않은 어린애인 줄 알겠어요.”

로젤린이 가볍게 눈을 흘겼다. 엘리자베스는 웃으며 두 사람을 지켜봤다.

“아, 벌써 시작했어? 늦어서 미안해."

“미미르 언니! 어서 와요.”

“시, 시계탑의 미미르 님을 뵙습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로젤린이 말을 더듬자 베아트리체의 촉이 발동했다.

향을 다루는 가문의 로젤린과 원한다면 한겨울에도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꽃을 피울 수 있는 마법사.

어쩐지 재밌는 조합이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허공에서 시선이 마주친 엘리자베스 또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서로 눈웃음을 교환했다.

“참, 오늘은 한 사람을 더 초대했답니다. 슬슬 올 때가 되었는데....”

“황후마마, 근위대의 레인 경께서 오셨습니다.”

“딱 맞게 왔군요. 어서 안으로 모셔요.”

빅토리아는 숨을 가다듬고 마지막으로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황후의 정원에 자신이 들어올 일은 결코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어젯밤 잠이 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힘주어 다린 정복까지 제대로 갖춰 입고 그녀의 온실 앞에 도착해 있었다.

'이런 곳은... 나랑 안 어울려.’

커다란 유리를 연결하는 세공 장식 하나까지 모두 화사하고 우아하기 그지 없었다.

평생 형제들과 목검을 들고 싸우거나 말을 타고 달리던 그녀에겐 영 낯선 곳이었다.

'인사만... 인사만 하고 나오는 거야....'

마침내 온실 문이 열렸다.

겨울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따스한 훈기 사이로 은은한 꽃향기가 가장 먼저 그녀에게 인사했다.

그리고 빅토리아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로즈! 너 계속 그런 식으로 굴 거야?"

“언니, 나 결혼할 때 꼭 올 거죠? 그죠?”

"미미르 언니, 요즘 일리시스가 시계탑에 부쩍 자주 들른다던데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일은 무슨, 그냥 심심하니 불러다가 노닥거리는 건데.”

'...뭔가 상상한 것과 굉장히 다른 느낌인데.’

태엽 인형처럼 절도 있는 동작으로 인사하고 자신의 소속과 신분을 밝힌 빅토리아는 자신을 보며 흐뭇하게 웃고 있는 황후 앞에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웃어야 하나? 역시 너무 무례한가? 그럼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하나? 하지만 티 파티의... 분위기를 보아하니 웃어야 할 것 같은데, 웃어도 될까? 웃을까?'

결국 빅토리아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반만 끌어당겼다. 어쩐지 볼에 경련이 일 것만 같았다.

“레인 경, 지난번 폐하와의 대련은 무척 감명 깊었답니다. 그래서 꼭 한번 뵙고 싶었어요. 갑작스러운 초대에 응해주어 고맙습니다.”

“화, 황송할 따름입니다.”

"경? 이분도 기사신가요?"

만개한 꽃처럼 화려한 두 영애의 눈동자에 호기심이 깃들었다.

빅토리아는 속으로 침을 삼키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눈만 깜빡였다.

"폐하와 전력으로 대결해도 전혀 밀리지 않았답니다. 그 모습을 두 영애께서도 보셨어야 하는데! 레인 경, 어서 앉으세요.”

“....명하신 대로.”

엘리자베스는 작게 입을 벌렸다. 그녀 곁에 앉아 있던 두 영애와 미미르 또한 딱딱하고 차갑기까지 한 빅토리아의 태도에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빅토리아, 라고 불러도 될까요?"

“예, 예?"

황후의 명령이니 앉아야지, 주는 차나 마시고 다시 가야지. 그때까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빅토리아의 목소리가 삐끗했다.

“화... 황후마마께서 원하신다면야 어떤 호칭이든 별로 상관은 없습니다만...."

"좋아요! 빅토리아, 이쪽은 베아트리체, 이쪽은 로젤린. 그리고 여긴 미미르."

“빅, 빅토리아 레인입니다. 저, 황후마마?”

“명령입니다. 여기서만큼은 딱딱하게 격식 차리지 말고 편하게 즐기세요."

황후의 명령에 대답을 해야 한다고 머리가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떡 벌어진 입에선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충분히 무례하게 보일 수 있는 모습이었으나 아무도 그것을 지적하지 않았다.

문득 빅토리아는 목 끝까지 채운 단추가 갑갑하게 느껴졌다.

황후의 곁에 앉아 있는 두 영애는 물론, 심지어 미미르는 치맛자락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부스러기까지 묻힌 차림새였다.

'괜찮... 겠지...?'

빅토리아는 조심스럽게 예도를 의자에 기대 세워 놓고 목을 조이던 단추를 몇 개 풀어 놓았다.

눈이 마주친 황후께서 잘했다고 칭찬을 하듯 상냥하게 웃고 있었다.

“이런 분이 계신다면 공국으로 간 뒤로도 안심할 수 있겠군요.”

베아트리체, 라고 했던가. 먼 공국의 대공비가 될 예정인 공작가의 영애라고 들었다.

"굉장해요! 저도 오라버니들만 아니었어도 향이 아닌 검을 배웠을 텐데.”

이 자리에 있는 영애 중 가장 어린 티가 남은 로젤린은 미미르를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눈을 빛내고 있었다.

"어제 진통제를 찾았던 게 이 사람 때문이었어? 흐음, 그럴 만하네.”

그리고 시계탑의 미미르. 알음알음 존경과 경외심을 담아 시계탑의 작은 주인이라 부르고 있는 마녀까지.

여자가 검을 쓰다니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고 비난을 사는 건 아닐까, 남몰래 각오했던 일이 바보같이 느껴질 정도로 그들은 자신의 존재를 쉽게 받아들였다.

“좋아하는 음식이나 향이 있나요?"

정신을 차려 보자 로젤린의 얼굴이 바로 코앞에 있었다. 빅토리아는 얼떨결에 딸기케이크라고 대답했다.

뭇 사내보다 커다란 키와 덩치, 클레이모어를 한 손으로 창처럼 던질 수 있을 정도의 힘.

전부 그녀를 이 자리까지 오를 수 있게 해 준 고마운 것이었지만 동시에 진짜 그녀를 지워 버린 애증 어린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녀가 코가 알싸한 계피 과자나 건강에 좋은 뿌리 식물로 만든 사탕을 좋아한다고 알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녀가 그런 것을 먹는 모습을 보며 역시 그녀답다고, 어울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가 정말 좋아하는 건 어릴 때 힘든 수련이 끝나고 몰래 먹었던 달달한 과일 사탕과 케이크였다.

'너 같은 애가 케이크라니, 엄청 안 어울려!'

그저 농담으로 여기고 흘려 넘겼던 말이 진담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날, 그녀는 자신의 겉모습에 어울리지 않는 것을 철저히 지워 내고 잊기로 다짐했다.

그렇게 철저히 숨기고 살았는데.

로젤린의 갑작스러운 기습 질문에 그만 잊고 있었던 달콤한 맛이 떠올랐다.

'...역시 어울리지 않는다고 웃으시려나.'

그러나 그녀의 예상과 달리 로젤린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크는 역시 딸기케이크지요? 봄에만 먹을 수 있는 그 달콤하고 상큼한 느낌! 아무리 작년에 만든 딸기청이 맛있고, 또 케이크 시트 사이에 바른다고 해도 제철 딸기 특유의 맛과 향은 느끼기 힘들지요. 그래서....”

숨도 쉬지 않고 종알거리던 로젤린이 품속에서 자랑스럽게 동그란 상자를 꺼내 보였다.

“그 향을! 찻잎에 입혀 보았습니다!"

향을 찻잎에 입혔다고? 빅토리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엘리자베스와 베아트리체 또한 흥미롭단 얼굴을 하고 있었다.

미미르는 저도 모르게 박수를 칠 뻔 했다.

로젤린이 가져온 홍차에선 정말 딸기케이크 향이 났다. 빅토리아는 지금 자신이 미미르의 마법에 걸린 건 아닌지 의심했다.

홍차를 맛본 다른 이들 또한 비슷한 반응이었다. 칭찬 몇 마디에 로젤린의 콧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그나저나 빅토리아가 딸기케이크를 좋아한다니.”

의외네요? 전혀 생각도 못 해 봤어요? 소문과 다르네요? 빅토리아는 다시 긴장했다.

“정원 구석에 텃밭을 만들어 볼까 했는데, 거기에 딸기도 심어야겠네요! 황후가 재배한 딸기로 만든 케이크라면 대공비를 초대할 명분으로 충분하겠죠?"

텃밭? 딸기를 심어? 황후께서 직접 재배하신다고?

"너, 긴장 풀어. 여기 군사 회의 하러 온 거 아니야.”

미묘하게 일그러진 빅토리아의 표정을 읽은 미미르가 그녀의 옆구리를 툭치며 소곤거렸다.

“미미르 님....”

“사격할 줄 알지?"

“그냥 기본 소양 정도로 익혔습니다.”

"황후마마, 케이크 위의 딸기를 두고 빅토리아와 사격 대결을 하는 것도 재밌겠지요?"

엘리자베스가 화사한 눈웃음을 지었다. 빅토리아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혹감에 입만 벙긋거렸다.

순식간에 이야기의 주제가 봄 딸기와 딸기로 만들 수 있는 수십 가지 디저트로 바뀌었다.

아직 선뜻 말을 얹기 어려운 기분에 빅토리아는 딸기케이크 향이 나는 홍차를 홀짝이며 그들의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

기사 서임을 받은 순간부터 강박증에 가까울 만큼 '여자답다'고 느껴지는 일이라면 필사적으로 무시했었다.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차와 함께 달콤한 디저트를 먹으며, 그에 어울리는 아기자기하고 화사한 이야기꽃을 피우는 일은 그녀 인생에서 결코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그래도 싫지만은 않았다.

이런 황후마마라면 얼마든지 기쁜 마음으로 모실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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