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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폐하가 시곗바늘을 되돌린 사연-108화 (108/130)

108화 꽃 피는 겨울(3)

다음 날 두 사람은 근위대의 대련장으로 향했다.

예정에 없던 그의 방문에 한참 인수인계를 하고 있던 군무 대신 알베르트부터 갓 근위대에 들어온 막내까지 우르르 대련장에 모였다.

'저 자리에 내가 있었던 게 어제 같은데....'

레온하르트의 시선이 향한 끝에 아직 앳된 티가 남은 막내 기사가 서 있었다.

흐트러진 차림새, 젖은 눈과 흙으로 지저분해진 바짓단, 땀으로 흠뻑 젖은 머리칼을 하고 있던 기사가 그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푹 숙였다.

“전하, 여기까진 어쩐 일이십니까?"

“내가 못 올 곳이라도 왔나?"

“그런 건 아니지만....”

"오랜만에 옛 추억이 생각나서 말이야. 저 자리였지, 아마?"

그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막내 기사에게 집중되자 그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어제 일처럼 생생하긴 합니다. 누가 알았을까요. 그 황태자 전하께서 지금 이렇게 훌륭한 무인으로 성장하실 줄이야.”

"그러는 자네도 누가 알았겠나. 모든 기사들의 귀감이자 연회장에 모습을 드러내기만 했다 하면 레이디들의 뜨거운 눈빛을 한 몸에 받던 그 기사가 지금은...."

레온하르트의 시선이 알베르트의 배로 향했다. 노골적인 눈빛에 알베르트가 큼큼 헛기침만 반복했다.

장난감 병정 인형처럼 가지런히 서 있던 기사들 틈에서 킥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 이게 다 부인의 사랑입니다!"

“누가 뭐라 했나? 알베르트의 얼굴이 더욱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마른세수를 반복하던 그가 앓는 소리를 냈다.

“인수인계 중이라 바쁩니다. 폐하께선 참으로 한가해 보이시는군요.”

가까스로 진정한 그가 슬쩍 기사들의 눈치를 살폈다. 어느새 다들 긴장이 풀려 있었다.

"한가하다마다.”

"그럼 잘되었습니다. 오랜만에 옛 추억이나 살릴 겸 근위대의 기강을 다시 잡아 주시겠습니까? 저는 이제 근위대에서 물러났으니 저 녀석들이 뼈가 부러지든 말든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한 나라의 군무 대신이 할 말인가?"

“그러면서 목검은 왜 꺼내 오십니까?"

그냥 황제와의 대련이라면 다들 혹여나 귀한 몸에 생채기라도 낼까 쉬쉬했을 것이다.

그러나 새로 등극한 황제는 소드 마스터였다.

검을 쥔 사람치고 그 이름 앞에서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레온하르트는 어쩔 수 없다는 투로 어깨를 으쓱이더니 곁에 있던 엘리자베스에게 겉옷을 벗어 덮어 주었다.

아이가 이제 몇 살이고, 얼마나 자랐고, 그런 이야기를 나누며 엘리자베스와 알베르트는 대련장이 훤히 보이는 언덕 위로 올랐다.

기사들은 호기심 반, 정말 이래도 되는 걸까 하는 걱정 반, 자신의 실력을 아낌없이 자랑할 수 있다는 기대가 저마다 섞인 얼굴로 서 있었다.

그 모습을 흡족하게 바라보던 레온하르트는 다른 기사들에 비해 머리 하나 쯤은 더 크고 어깨도 떡 벌어진 기사를 보며 눈썹을 슬쩍 들어 올렸다.

그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 내고 있던 그녀가 웃으며 가장 먼저 앞으로 나섰다.

높게 올려 묶은 머리칼이 망토처럼 그녀의 등 뒤로 나부꼈다.

“...여자... 분이시네요?"

엘리자베스는 내심 놀란 마음을 숨기며 말했다. 알베르트는 옆을 흘끔 보며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제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습니다. 어지간한 사내놈보다 훨씬 낫고, 또 앞으로가 기대되는 친구지요. 그녀를 따라 들어온 기사들도 제법 됩니다."

그 말에 엘리자베스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친하게 지내면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짐을 이기면 네가 원하는 일을 하나 들어주마. 황후 빼고는 뭐든 주겠다.”

그의 너스레에 그녀가 피식 웃었다. 전대 황제 폐하도 그렇고, 이번 폐하도 그렇고. 다들 지극 정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청이 있기는 합니다.”

"무엇인가?"

"이기고 나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당당한 자신감이 마음에 드는 친구라고 레온하르트는 생각했다.

그녀의 움직임은 어떤 바람보다 빠르게 달리는 종마처럼 거대하면서 정교했다.

어지간한 사내보다 큰 체격에 내심 각오했던 것과 달리 그녀는 체격으로 밀어붙이는 대신 철저한 계산 끝에 꼭 필요한 힘만 쓰고 있었다.

그 점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덩치만 믿고 마구 검을 휘두르는 것보단 이쪽이 더 재밌기도 했고.

척추뼈를 따라 우두둑 소리가 날 만큼 깊게 몸을 젖혔다.

코 바로 위에서 우우웅, 공기가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나는 척, 한 발에 체중을 싣고 다른 발로 그녀의 팔을 노렸다.

여자라고 봐주지 않겠다, 여자니까 조금은 살살 하마, 여자니까. 그런 소리에 질려 있던 그녀는 레온하르트의 정직한 공격에 순간 울컥했다.

그는 순수하게 무인 대 무인으로서 그녀와 싸우고 있었다.

이런 황제라면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검을 휘둘렀다.

"와아....”

엘리자베스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레온하르트가 누군가와 싸우는 모습을 제대로 보는 것도 처음이었지만 그 상대가 전혀 밀리지 않는 일 또한 처음이었다.

“어쩌면 저 친구도 폐하처럼 소드 마스터가 되는 건 아닐까, 내심 기대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굉장히 멋질 것 같아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알베르트는 공감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기사단에 입단할 때만 해도 악 밖에 남지 않았던 이가 지금은 소드 마스터를 상대로 흔들리지 않고 침착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대로 묻히기엔 너무 아까운 인재인데, 역시 폐하께 건의드릴까?

아냐. 폐하도 눈이 있고 직접 검을 맞대 보셨으니 아시겠지.

짧은 고민에 빠져 있던 알베르트가 나무 부러지는 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승부가... 조금 애매하게 난 모양입니다.”

레온하르트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부러진 자신의 목검을 노려봤다.

상대방 또한 감히 황제의 목젖 바로 앞을 겨누고 있다는 사실에 어쩔 줄 몰라 눈동자만 굴리고 있었다.

비록 검은 부러졌지만 승자는 레온하르트였다. 소드 마스터의 검기는 부러진 날을 대신했다.

“제국이 또 큰 인재를 얻었군.”

레온하르트가 먼저 웃으며 검을 거뒀다. 금방이라도 죽을죄를 지었다며 무릎을 꿇으려는 그녀를 다독이고 오히려 칭찬했다.

“이름은 뭔가.”

“빅토리아 레인입니다."

승리를 타고 난 기사구나. 그대가 길잡이별이 되어 줘야겠어.”

빅토리아의 헤이즐넛빛 눈동자가 흔들렸다.

"레인 경, 앞으로 더욱 정진하게.”

빅토리아는 환하게 웃으며 그의 앞에 검을 세워 보였다. 레온하르트는 새 목검을 가져오며 시원시원한 목소리로 외쳤다.

"다음은 누구인가!"

* * *

"아악! 리지, 리, 악! 살살! 살살!"

"그러니까.”

찰싹.

“왜.”

칭칭.

“무리를 하셨어요!"

꽈아아악.

황후의 병간호라는 호사를 누리고 있던 레온하르트가 머쓱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얼굴에도 스친 상처가 남아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일부러 아프라는 듯 있는 힘껏 반창고를 붙이고 붕대를 칭칭 동여맸다.

“아니... 짐은 모처럼 검을 잡았겠다, 몸이나 조금 풀 겸 기사들의 사기 고양을 위해....”

"아무리 소드 마스터라고 해도! 그릇이 작으면 물이 넘치는 법인 걸! 왜 모르십니까!”

"조금 더 아래, 거기, 그... 악! 잠, 잠시 잊고 있었습니다. 매일 훈련을 게을리한 결과가 이런 식으로 돌아올 줄은 정말로 몰랐단 말입, 리지! 아파! 아프다고!”

표정을 찌푸리며 레온하르트가 결국 몸을 돌렸다.

그러나 얼굴 한가득 근심 걱정과 울음기가 가득한 엘리자베스를 보는 순간 토라지려던 마음은 사라지고 대신 심장이 데굴데굴 바닥을 굴렀다.

“폐... 폐하는 제 소유니까, 그러니까... 다치지 마세요!"

레온하르트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는 태도로 푹 고개를 숙였다.

그도, 기사들도 모두 지나칠 정도로 달아올랐다. 아무리 소드 마스터라 해도 근위대의 막내 기사까지 빼놓지 않고 전력으로 상대했다.

최근 들어 좀처럼 몸을 쓸 일이 없던 레온하르트는 승리의 대가로 근육통에 시달려야 했다.

“...어디 가서 소드 마스터가 근육통에 걸렸다고 하면 다들 거짓말로 생각하겠지?"

단단히 토라진 모양인지 엘리자베스는 흥, 하며 붕대와 약을 정리했다.

“다음부턴 조심할게. 어차피 내가 거기 갈 일도 이제 없는걸. 응?"

늘 어른스럽게 행동하며 먼저 엘리자베스를 이끌어 주던 그가 황제가 되더니 위엄과 체통을 갖추긴커녕 오히려 어리광만 늘었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허리를 붙잡고 드러누운 레온하르트의 코를 잡아당기며 결국 손가락을 걸고 약속까지 받아냈다.

“빅토리아... 빅토리아 레인 경이라고 했지.”

“그 기사님?"

침대 위로 두 다리를 쭉 뻗으며 드러누운 레온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바마마 때만 해도 생각도 못 한 일이었지. 여자가 기사를 한다고? 신의 계시를 받은 시골 소녀가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성전 속 이야기가 더 현실성 있었을 거야.”

“레인 경... 혼자일까?"

“아니, 찾아보니 몇 명 더 있기는 했어. 다들 실력만큼은 인정한다는 분위기더군.”

"음...."

어느새 그녀가 그의 곁으로 다가와 턱을 괴고 엎드렸다.

"레인 경 말이야.”

"응?"

“그렇게 반짝반짝 윤이 나는 검은 머리칼은 처음 봤어.”

엘리자베스는 하얀 자신의 머리칼을 손가락에 감으며 아무 것도 아니라는 투로 중얼거렸다.

"머리까지 잘라가며 남장을 하고 입단하려는 것을 알베르트가 추천서를 써 주는 조건으로 그만뒀다던가. 그래서 그냥 기르던 것이 지금은 아예 상징처럼 되어 버린 모양이야.”

"만나 보고 싶다.”

"만나면 되잖아?"

레온하르트와 엘리자베스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럴까?"

“아예 리지 네 호위 기사로 삼아도 나쁘지 않겠지.”

“황궁에만 있는 내가 위험할 일이 뭐가 있다고...?"

“음, 이런 거라거나... 악! 거기 멍든 곳인데....”

찔끔 눈물이 날 정도로 아팠다.

붉어진 얼굴로 씩씩거리던 엘리자베스를 빤히 쳐다보던 레온하르트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다시 히죽 웃으며 팔을 뻗었다.

그의 손가락이 굼실거리며 시트 위를 가로질렀다.

"황제이자 남편이라는 분이 어떻게 갈수록 어리광만 늘어가는 기분이다?"

“응애?”

“어른답게 말씀하셔야지요.”

“응애이외다, 황후.”

실없는 농담에 결국 그녀가 피식 웃어 버렸다. 원하는 대로 엘리자베스의 몸을 담쏙 끌어안은 레온하르트는 그녀의 목덜미에 이마를 대며 눈을 감았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어.”

“나는 흘렀으면 하는데. 지금처럼 행복하고, 평화롭고, 또....”

등을 돌리고 그의 품에 안겨 있던 엘리자베스가 몸을 돌려 레온하르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쪽, 하는 가벼운 소리와 함께 그녀가 그와 이마를 맞댔다.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있고."

레온하르트의 웃는 소리가 바로 귓가에서 들렸다. 엘리자베스는 추위를 핑계로 조금 더 바싹 붙으며 눈을 감았다.

정말로, 지금처럼만 그가 곁에 있고, 또 함께할 수 있다면 어떤 일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내일은... 오랜만에 친구들과 티타임 이라도 가질까....’

가물가물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레온하르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자장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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