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꽃 피는 겨울(2)
“뭔가 불공평해.”
“뭐가?”
엘리자베스는 코끝까지 이불을 끌어올리며 투덜거렸다.
“나는 지금 손가락 하나 꼼짝 못 하겠는데 레온은 멀쩡하게 움직이는 거. 불공평해.”
주섬주섬 옷을 찾아 입던 레온하르트는 그 말에 결국 혀를 깨물어 버렸다.
“소, 소드 마스터랑 일반인이랑 같아?"
"나도 나름 운동했는데! 사격했는데!"
"그거랑 그건 쓰는 근육이 다르지! 그, 크흠.... 괜찮아?"
아침부터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의 안색을 살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아파. 이렇게 만들어 놓으니 속이 시원하니? 만족해?"
“내가 머리를 깨문 기억은 없는데... 만족하지 못했다면? 왜, 만족할, 읍! 리지! 내가 잘못했어!"
날아온 베개를 얼굴로 받으며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에게 용서를 구했다.
조금 전까지 손 하나 까딱 못 하겠다는 말은 다 거짓말이었는지 베개에 이어 쿠션도 날아오는 것을 가까스로 피한 레온하르트가 다시 침대 위로 기어올라 왔다.
팽 토라진 척 등을 돌리고 앉았지만 그 모습마저도 예쁘고 사랑스러우니 어쩜 좋아. 레온하르트는 살살 달래듯 그녀를 끌어안았다.
맞닿은 체온이 따스했다. 곳곳에 꽃이 핀 자국이 남아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팔을 뻗어 어깨 너머를 더듬었다. 손톱 아래로 피딱지가 묻어 나왔다.
“사흘 동안은 하고 싶은 거 다 하자.”
“그럼 국정은...?"
“일스가 잘해 주겠지. 아니면 사흘 뒤에 반란이 일어나거나.”
철없는 황제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그의 옆구리를 아프게 꼬집었다.
“사흘... 사흘이라....”
"하고 싶은 거 있어?"
바다 건너 사막의 왕처럼 나른한 태도로 기대 누워 있던 레온하르트를 스케치하던 엘리자베스가 이젤 너머로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도로시에게 가 볼까?"
"아마 지금쯤 병가 내고 쉬고 있지 않을까?"
"그러면... 음....”
“그냥 하던 거나 마저 하자.”
"하, 하던 거라니?"
쿡 찌르면 찌르는 대로 반응을 하니 놀리지 않고서야 참을 수가 있나.
레온하르트는 웃음을 꾹 참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 능청을 떨었다.
“그림 말이야. 나 그려 준다며."
잠시 뒤 레온하르트의 이마로 지우개 조각이 날아왔다. 슬쩍 본 엘리자베스의 귓불이 새빨갔다.
완성된 그림을 갈무리하며 엘리자베스는 산책을 가자고 제안했다. 레온하르트는 눈썹을 슬쩍 들어올렸다. 그녀와 함께 걸을 산책길 끝에 어쩐지 시계탑이 있을 것 같았다.
“아아니 아직까지 한 이불 속에서 지금 아니면 평생 못 누릴 게으름 다 피우고 계셔도 모자랄 분이 이런 귀한 곳엔 어쩐 일이십니까? 황. 제. 폐. 하.”
“미미르 언니!”
"황후마마! 제 선물은 마음에 들었나요? 머리카락 색을 영구히 바꾸려던 실험 결과가 그런 식으로 쓰일 줄은 저도 몰랐지 뭐야, 응? 왜 그래?"
"아아니, 그냥. 미미르 언니는 지금 이대로도 예뻐요. 그리고 선물 고마워요! 정말로 멋졌어요.”
"아이구 요, 요 예쁜 황후마마! 어떻게 된 게 저쪽은 황제가 되시더니 더욱더 멀리하고 싶어지고 요기 요 예쁜 황후마마는 더 가까이하고 싶을까? 사람 마음 참 이상하다, 그렇지?"
말을 말자. 레온하르트는 두 사람 몰래 혀를 쏙 내밀며 미미스 브룬느의 문을 열었다.
“...음?"
"할아버지 안 계셔.”
조금 전까지 밝은 목소리로 엘리자베스의 손을 맞잡고 제자리에서 깡충깡충 뛰고 있던 미미르가 울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계탑의 주인이 자리에 없다는 것이 의미하는 건 단 한 가지뿐이었다.
“미미르, 너....”
“나는 괜찮아.”
그러고 보니 미미르가 입고 있는 옷은 소맷자락과 목깃에 달린 소박한 하얀 레이스 장식이 전부인 검은 원피스였다.
"미미르 언니. 미미스 브룬느 님이... 설마....”
엘리자베스는 여차하면 미미르 대신 울 기세였다.
레온하르트는 멍한 얼굴로 텅 비어 있는 방을 둘러봤다.
혹시 다른 세상과 연결된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매번 변하던 미미스 브룬느의 방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평범한 방이었다.
어느새 그의 등 뒤로 다가온 미미르는 굳은 표정으로 문을 닫았다.
"언니... 그러니까... 이... 이걸... 어떻게 위로의 말을 해야."
"위로라니?"
“응?”
고개를 푹 숙이고 어쩔 줄 몰라 하던 엘리자베스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황위에 오르자마자 나라의 큰 어른을 잃었다는 슬픔에 침울해하던 레온하르트 또한 휙 소리가 나게 몸을 돌렸다.
"할아버지, 요즘 데이트하시는데? 오늘도 아침 일찍 나가셨어.”
미미르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 그럼 괜찮다는 소리는 왜 한 건데!”
“검은 옷은 또 뭐예요!"
“왜들 이래...? 시계탑의 주인이 없어도 시계탑이 무사하다는 건 그 자리를 대신할 사람이 있다는 건데, 그 사람이 나 아니면 누구겠어? '나는 괜찮아. 시계탑의 주인 대리 노릇을 할 정도로.'라는 뜻으로 한 말이고. 검은 옷은, 그게...."
"그게....?"
미미르의 시선이 천장에서 바닥으로, 그리고 창문과 여기저기 널브러진 쓰레기 더미 따위로 도망치듯 움직였다.
"아, 그냥 검은 옷을 입을 수도 있고 흰옷을 입을 수도 있는 거지! 내 마음이다, 뭐?"
"하... 황후, 짐이 이런 식으로 첫 번째 황명을 내리게 될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이해합니다. 황제 폐하, 저 또한 권력을 이런 식으로 남용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말이지요....”
침통한 표정으로 두 사람은 고개를 내저었다. 미미르는 황급히 두 사람의 등 뒤로@[에] 밖으로 향하는 게이트를 만들어 그들을 쫓아냈다.
“미미르! 너! 그러고도 무사할 줄 알아?"
“미미르 언니한테 무슨 짓 했다간 내가 가만 안 둘 거야! 언니, 다음에 또 올게요!"
마력에 의해 강제로 쫓겨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둘은 끝없이 재잘거렸다. 미미르는 그만 하, 하고 제자리에 주저앉으며 마구 웃음을 터트렸다.
'점잖 빼고 있으면 어쩌나 걱정한 내가 바보였지!'
황제와 황후가 되었다 해도 그들은 여전히 레온하르트와 엘리자베스였다.
어쩐지 미미르는 그 점이 무척이나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이제 나와도 돼.”
그 말에 미미르의 책상 아래에 숨어있던 일리시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가... 가셨어요...?"
“잘하는 짓이다! 황제 폐하야 아직 신혼이니 그렇다 치고, 일국의 재상이라는 놈이...!”
“그치만, 미미르 님도 좋아하셨으으으 읍! 읍! 숨 막힘, 으읍!”
혹시나 누가 들을까 봐 미미르가 허둥지둥 일리시스의 입을 틀어막았다.
사실 레온하르트는 이미 첫 번째 황명을 내린 뒤였다.
일리시스 엘디르얀 폰 페리안은 제국 역사상 가장 어린 나이로 재상의 자리에 올랐다.
어느 여름날, 그가 선언했던 그대로였다.
“하, 하지만 아직 연말이고... 폐하께서 미리 할 일을 마쳐 두신 덕분에 딱히 바쁘지도 않단 말입니다! 그리고....”
한참을 우물거리던 일리시스가 울상을 지으며 설움을 토로했다.
"다들 제 아버님 뻘이신데, 저만 가면 귀엽고 대견해 어쩔 줄 모르겠단 눈빛으로 보고 계신단 말입니다! 그런 곳에서 어떻게 버텨요!”
미미르의 새싹빛 눈동자가 휘둥그레지더니 이내 파하하, 시원시원한 웃음소리가 그녀의 방을 가득 채웠다.
“그럼 수염이라도 길러 보든가. 아, 이참에 실험해 볼까?"
“미, 미, 미미르 님...?”
일리시스는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미미르는 그가 뒤로 한 발짝 물러설 때마다 두 걸음씩 앞으로 전진했다.
결국 일리시스의 등이 벽에 부딪히고, 미미르는 먹잇감을 눈앞에 둔 포식자처럼 씨익 웃었다.
* * *
“미미르! 하여튼 마법사들이란... 리지, 괜찮아? 다친 곳은 없고?"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레온하르트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도왔다.
그녀의 검은 치맛단에 달라붙어 있던 하얀 털이 유난히 신경 쓰였다.
'몰래 고양이라도 키우는 걸까?'
나중에 물어봐야지. 엘리자베스는 해야 할 일 리스트에 한 문장을 더 추가했다.
"좋아하는 꽃 있어?"
“꽃? 음... 그냥 다 좋은데? 왜?"
황후의 정원 입구에 멈춰 선 레온하르트가 엘리자베스를 빤히 쳐다봤다.
“...내가 바닷속 해초가 좋다고 하면 아주 바다를 만들어 놓을 눈빛이다, 황제 폐하?"
"황후께서 원한다면야 바다가 아니라 하늘의 구름이라도 떼어다 드려야지요."
엘리자베스는 싫지 않은 눈길로 가볍게 그를 흘겨봤다.
“...물망초.”
"물망초?"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얀 설원으로 변한 정원은 나름대로 또 다른 운치가 있었다.
“나를 잊지 마세요?"
“그것보단... 그... 음....”
아직 아무도 밟지 않은 설원 위로 발도장을 남긴 엘리자베스는 한참 동안 발자국만 내려다봤다.
뒤늦게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린 레온하르트는 씩 웃으며 그녀의 발자국 옆에 나란히 발 도장을 찍었다.
"네 발이 너무 작다고 하다 장인에게 핀잔을 들은 게 어제 같았는데.”
“그런 일이 있었어?"
“있었지. 어린애 손바닥 두 개 붙여 놓은 것처럼 작아서, 이런 발로 정말 걸을 수는 있을까 걱정했는데... 음, 미안.”
혹시 그녀가 싫은 기억을 떠올렸을까봐 레온하르트는 냉큼 사과부터 했다. 그러나 정작 엘리자베스는 덤덤했다.
"나는 괜찮아.”
"리지....”
“정말로, 나는 괜찮아.”
“...관련된 일은 모두 황후에게 일임하겠습니다. 그러나... 부디 자신의 행복을 타인을 위해 포기하진 말아 주세요. 제발.”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의 손등에 가볍게 키스하며 간절히 애원했다.
마지막으로 두 사람이 들른 곳은 유리 정자였다.
지금은 눈으로 뒤덮여 잠들어 있지만 푸른 수레국화는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부 기억하고 있을 터였다.
괜히 그날의 기억이 떠올라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곳만 바라보며 흠흠 헛기침을 했다.
“추우니까 잠깐 들어갈까?"
"들어갔다 또 입맞춤당하라고?"
“이번엔 리지 네가 해 줘야, 악! 잘못했어!"
다시 한번 얼얼하게 옆구리를 꼬집힌 레온하르트가 펄쩍거리며 엄살을 떨었다.
결국 보다 못한 엘리자베스가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그의 볼에 가볍게 키스했다.
"역시 안 되겠다.”
"뭐, 뭘?"
레온하르트가 가벼운 몸을 덥석 안아올렸다. 반사적으로 그의 목에 팔을 건 엘리자베스는 그가 향하는 곳이 어딘지 알고 마구 버둥거렸다.
“날이 이렇게 추운데 우리 황후 감기 걸리지 않게 따뜻한 곳에만 계셔야지. 짐이 잘못 생각했습니다. 들어가자. 응?"
"들어가기만 할 거야. 책 읽을 거야. 그림 그릴 거라고!"
“그래그래, 그림도 그리고 책도 읽고 옛날이야기도 하고 또....”
견디다 못한 엘리자베스가 백 소리를 질렀다. 밤새 내린 눈에 정원은 무사한지 살피러 온 정원사는 그저 허허 웃으며 젊은 황제 부부의 등을 향해 눈인사를 건넸다.
문득 발아래로 시선을 내리자 단단히 엉겨 붙은 눈송이를 있는 힘껏 밀어내고 모습을 드러낸 겨울 들꽃이 눈에 들어왔다.
다가올 봄이 얼마나 따스할지 알려주듯 선명한 노란 꽃잎이 사랑스러운 얼음새꽃이었다.
얼음새꽃의 꽃말은 영원한 행복이라 하던가. 정원사는 부디 저들의 행복한 모습이 영원하길 기원하며 얼음새꽃 주위의 눈을 가볍게 훑어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