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꽃 피는 겨울(1)
어떻게 무도회가 끝났는지도 모르겠다. 너무 웃은 나머지 얼굴 근육에 경련이 일 지경이었다.
레온하르트 또한 소드 마스터의 체력은 어디로 갔는지, 소파에 축 늘어진 모습이 빨랫줄에 빨래 대신 걸려 있던 국기를 연상시켰다.
마법이 걸린 구두가 아니었다면 아마 진작 새끼발가락에서 피고름이 줄줄 흘렀을 거라 생각하며 엘리자베스는 미지근한 물로 목을 축였다.
"...리지... 살아... 있어...?"
어떻게 이 짓은 두 번을 해도 피곤하지. 레온하르트는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생각했다.
엘리자베스가 그의 입가에 물컵을 가져다 대었다. 레온하르트는 고개만 까딱여 물을 마시고 다시 축 늘어졌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일이 마지막으로 남아 있었다.
시녀들이 반쯤 탈진한 엘리자베스를 부축하며 사라졌다. 시종들 또한 저마다 눈짓을 주고받으며 그를 침소로 안내했다.
사제가 지켜보는 가운데 침대 속으로 나란히 눕자 두 사람을 축복하는 기도문과 함께 휘장이 드리워졌다.
"그럼 좋은 꿈 꾸십시오.”
그 말과 함께 부산스러운 발걸음이 이어지더니 마침내 문이 닫혔다.
문 너머로 오늘 밤 꿈꿀 시간이 어디 있겠냐며 장난스럽게 면박을 주는 소리가 들렸다.
엘리자베스와 레온하르트는 눈만 말똥말똥 뜨고 있었다.
'미친, 미친, 치민, 아니. 미친, 미친, 미친!'
어떻게 행동해야 하지? 무슨 말을 하면 좋지? 젠장, 전생의 나! 미쳤다고 피곤하다며 그냥 잠만 잤냐! 죽어라! 아니, 이미 없어졌지만 하여튼 죽어!
잘 생각하자 레온하르트, 심호흡, 심호흡하고, 그러니까... 그... 아... 미쳐버리겠네, 리지도 이제 성인이고, 그리고, 으, 젠장!
“술이라도 한잔하고 잘래?"
잔뜩 긴장한 바람에 결국 목소리가 삐끗했다.
레온하르트는 주위가 온통 푹신푹신한 베개와 이불뿐이라 머리를 박을 수 없다는 점을 아쉬워했다.
엘리자베스는 고개만 끄덕였다.
휘장을 걷어 내고 불을 밝혔다.
짭조름하고 단단한 크래커 위로 과일을 듬뿍 섞은 부드러운 치즈를 한 조각 얹어 만든 크레페와 아직 술에 익숙하지 않은 엘리자베스를 배려하듯 달콤한 맛이 나는 아이스 와인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꼭 이럴 줄 알고 미리 준비한 것처럼 세팅까지 완벽하게 끝난 모습 앞에서 레온하르트는 결국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다 문득 그 옆으로 시선이 향했다. 무시하려고 해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을 내뿜는 녀석이 그곳에 있었다.
대체 어떻게 잡은 건지 신기할 정도로 커다란 문어를 말려다, 그 커다란 다리며 빨판을 가위로 섬세하게 오려 꽃처럼 만든 녀석을 과연 안주라고 할 수 있을까?
“이거... 대체 누가 준비한 거지...?"
“음... 여기 뭔가 붙어 있어!"
아무렇지도 않게 문어 다리를 만지작거리는 엘리자베스를 보며 레온하르트는 속으로 경악했다.
민들레처럼 모양을 낸 문어 다리 끝에는 프레이야의 이름이 적힌 편지가 붙어 있었다.
[마땅히 축제 음식을 준비하기 힘든 겨울이면 말려 뒀던 문어나 해산물을 이렇게 오려서 장식하기도 했다는구나. 마침 솜씨 좋은 사람이 있어서 구할 수 있었단다. 나라 살림이 평화롭고 윤택할수록 더더욱 긴장을 놓지 말아야 해요. 맛있게 먹고, 레온이 말 안 듣거든 이젠 황후마마 소유물이니 재량껏 처리하세요.]
“내가 무슨 물건도 아니고 소유물이라니...”
벌어진 입으로 어이가 나갔다 넓은 황궁을 한 바퀴 돌아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어마마마의 어린 황후를 위한 진심 어린 조언에 숙연한 마음마저 들었다.
자세히 보니 아이스 와인에도 편지가 붙어 있었다. 아바마마 특유의 호쾌한 글씨체였다.
[네가 처음 찾았던 술이 어떤 술이었는지 생각해 보면 이미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만, 아이스 와인은 여름과 가을이 지나도록 시들지 않고 끝까지 버틴 포도를 일부러 겨울까지 내버려 두어 당도를 높인 와인이다. 부국강병이니 영토 확장이니 하는 말은 하지 않겠다. 포도가 무더운 햇살과 가을의 고독함을 견디고, 또 눈보라를 맞으며 극상의 달콤함을 지켜 냈듯 너 또한 그렇게만 하거라. 그리고 네 여자는 네가 지킬 수 있을 정도로만 강해지거라. 마지막으로, 쫓겨나기 싫으면 황후마마께 잘 하거라.]
편지를 눈으로 읽은 레온하르트는 한 손으로 얼굴을 덮으며 의자에 앉았다.
아바마마 특유의 툭툭 내뱉는 것 같은 말투가 귓가에서 들리는 기분이었다.
“...폐하, 괜찮으세요?"
"우리끼리 폐하는 무슨... 그냥 평소대로 불러. 음, 리지 너는...?"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레온하르트는 슬쩍 용기를 내어 그녀 곁으로 다가가 얇은 몸을 꼭 끌어안았다.
"엘리자베스, 내 황후.”
푸르고 맑은 눈이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십여 년 전과 같이 여전히 굳은 신뢰감으로 가득한 눈빛이었다.
“그대가... 행복했으면 해. 황후가 아닌, 그냥 한 사람으로서."
"레온, 지금 행복해?”
엘리자베스의 말에 레온하르트는 잠시 갈등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녀가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
“그럴 것 같았어. 왜냐면, 나는 지금 무척 행복하거든.”
그 말과 동시에 거꾸로 돌아갔던 시곗바늘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레온하르트는 기쁜 마음으로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기억이 사라지는 것을 만끽했다.
기억 가장 아래에 가라앉아 있던 그녀를 향한 죄책감이 앞으로 그녀에게 평생 죄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로 바뀌었다.
왜 시곗바늘을 되돌렸는지, 어째서 평생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을 자처했는지, 상처가 아물고 그 위에 흉터가 생겼다.
“...레온? 표정이 왜 그래? 설마 울어?"
엘리자베스가 기겁하며 닦을 것을 찾아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급한 나머지 입고 있던 소맷자락을 죽 잡아당겨 레온하르트의 얼굴을 닦아 주던 엘리자베스는 그가 소금 기둥처럼 굳어 버리자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을 쫓아갔다.
낙낙한 품의 잠옷 소매가 늘어나며 둥글고 하얀 어깨는 물론 그 아래까지 드러나 있었다.
“어... 그... 으흠! 으흐흠!"
뒤늦게 엘리자베스가 어깨 아래로 내려간 옷을 추스르며 몸을 돌려 앉았다.
갑자기 목이 마르고 온몸이 후끈거렸다. 엘리자베스는 냉큼 코르크 마개를 따고 넘치도록 한 잔, 그리고 다시 한 잔 따라 강제로 레온하르트의 손에 쥐여 주었다.
“....우... 우리의 행복을... 위해....”
더듬더듬, 떨리는 목소리로 아무렇게나 나오는 대로 건배사를 외치고 여전히 굳어 있던 레온하르트의 잔에 자신의 잔을 가져다 댔다.
쨍- 하는 맑은 소리가 나고 엘리자베스는 그대로 잔을 기울였다.
아이스 와인 특유의 농밀한 달콤함 탓인지 순간 눈앞이 어질했다.
“다... 달다. 그지? 레온, 레온?"
“리지... 그... 아니다. 아... 아냐, 아무것도. 그냥 너무 무리해서 마시지만 말, 읍!"
레온하르트의 입으로 치즈를 듬뿍 올린 카나페가 들어왔다.
저도 모르게 입으로 들어온 것을 우물우물 씹어 삼킨 레온하르트는 가볍게 와인으로 입을 헹궜다.
달달한 맛이 나쁘진 않지만 그의 취향과는 상당히 떨어져 있는 맛에 문득 황태자궁 침대 아래에 숨겨 두었던 술이 그리워졌다.
‘그러고 보니 그건 어떻게 됐으려나. 책상 서랍 아래에 뭔가 숨겨 뒀던 것 같은데. 나중에 시간 나면 찾아보지 뭐. 베일리는 어디서 지내게 하지? 역시 황후궁에 있는 쪽이 매일 찾아갈 빌미도 되고... 응? 그러고 보니 베일리가 하루종일 안 보였네.'
“리지, 베일리 못 봤어?"
"응? 베일리는 아일라 황녀님과 같이 갔는데?"
"뭐?"
오도독, 함께 나온 견과류를 깨물어 먹던 엘리자베스가 무슨 문제라도 있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 가여운 베일리. 이제 나이도 있는데 아일라가 잘 돌봐 줄 수 있을까?"
레온하르트는 그렇게 말하며 은근슬쩍 엘리자베스의 부드러운 허벅지 위로 드러누웠다.
엘리자베스가 호두 하나를 더 집어 들자 능청스럽게 눈을 감고 입만 쩍 벌리고 기다리는 모습에 결국 그녀가 파하하 소리를 내며 웃어 버렸다.
“...리, 읍!....”
그러나 레온하르트의 입 속으로 들어온 것은 단단하고 고소한 호두 따위가 아니었다.
잠시 버둥거리던 몸이 잔잔해지고 꺅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자베스의 긴 머리칼이 레온하르트의 팔 너머로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네가 먼저 한 거야.”
엘리자베스는 순간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귀의 착각인가?
창밖에선 다시 눈이 내리고 있었다. 설원도 달도 새로 깐 비단 침대 시트도 온통 새하얗고 차디찬 와중에 봄처럼 따스한 곳이 딱 한 곳 있었다.
* * *
“휴, 리지가 걱정입니다. 그 아이가 황후의 일을 무사히 할 수 있을지....”
프레이야는 이실두르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며 한숨을 폭 내쉬었다.
이실두르는 프레이야의 머리칼을 손가락에 감으며 그녀를 다독였다.
“잘할 겁니다. 곁에 레온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내 사랑, 이젠 무거운 짐을 내려놓아요.”
“하지만....”
“어마마마! 아바마마!"
"아일라?"
은근슬쩍 그녀를 달래 주는 척 스무 해 전 신혼으로 돌아가려던 이실두르가 냉큼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얌전히 드러누웠다.
프레이야는 얼떨결에 이실두르의 얼굴을 팔꿈치로 밀어내며 커다란 침대 위로 기어오르는 아일라를 안아 올려주었다.
"아일라? 아직도 안 자고 있었니?"
“방에서 발견했습니다. 내일 자랑하려고 했는데 도저히 잠이 안 와서....”
조잘조잘, 말문이 트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질문 세례를 퍼부어 대더니 그 결과 지금 아일라는 또래 아이들보다 훨씬 영특하게 자라 있었다.
병아리 부리 같은 작은 입술로 삐약거리며 아일라가 내민 것은 한 쌍의 조개껍질 공예품이었다.
“어머나, 예쁘기도 하지. 어디서 찾았니?"
"어마마마 방!”
이실두르와 프레이야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그 방이라면 분명히....
그러고 보니 조개껍질 속에 제비꽃과 푸른 바닷빛 산호가 들어 있었다.
"아일라, 이건 다시 원래 있던 자리에 되돌려 놓으세요.”
"네에? 하지만 제가 발견했습니다. 그러니 제 겁니다.”
"이건 주인이 있는 물건이란다. 대신 내일 더 예쁜 걸로 사 줄게.”
“주인? 누가 주인입니까? 대화와 협상으로 극적인 타결을 보고 오겠습니다.”
“...아일라, 그런 말은 대체 어디서 배운 게냐?"
“신문!"
아일라는 자신의 어리광이라면 뭐든 받아 주는 아비를 타고 오르며 자랑스럽게 외쳤다.
“나 오늘 어마마마랑 같이 자도 돼요?"
"크흠, 아일라. 황궁을 떠나면서 따로 자기로 약속을....”
"애가 아직 낯설어서 그럴 수도 있죠. 레온하르트가 태어났을 때는 낮잠을 자도 배 위에 올려놓고 주무시던 분이...?"
"그, 그건 첫째였고!"
"아바마마, 안 됩니까?"
"아니, 아니다. 누가 안 된다고! 아일라, 이리 오거라. 아바마마가 팔베개 해줄까?"
"어마마마가 그건 어마마마 자리라고 했습니다.”
아일라는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작은 얼굴에 졸음이 가득해 보였다.
결국 아일라는 이실두르와 프레이야 사이에서 자기로 마음먹었다. 한번 마음먹고 자리에 누우니 잠드는 건 순식간이었다.
프레이야는 그때까지도 아일라가 꼭 쥐고 있던 황제와 황후의 추억을 꺼내 탁자 위로 올려놓았다.
“이실두르, 행복한가요?"
"당연한 말씀을, 내 사랑. 황궁에선 그 두 아이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네 어쩌네 하고 있겠지만요.”
요, 요, 입! 결국 프레이야가 이실두르의 입술을 아프지 않을 정도로만 비틀었다. 이른 봄은 황궁에만 찾아온 게 아닌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