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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폐하가 시곗바늘을 되돌린 사연-105화 (105/130)

105화 빌린 것, 푸른 것, 낡은 것, 그리고 새것(3)

루트비히 모르트 폰 엘리시움이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기억은 어느 추운 겨울날, 난로조차 없는 낡은 방에서 목이 쉬어라 울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대꼬챙이처럼 날카로운 성격의 어머니가 작은 몸을 앞뒤로 흔들고, 뺨을 내리치려던 것을 유모가 온몸으로 막아주고, 투실투실한 체격의 아버지가 엘리시움의 후계 운운하며 역정을 내시던 날.

아직 제대로 된 사고조차 불가능한 어린아이가 그렇게 서럽게 울었던 건 아마 본능적으로 '나는 사랑받지 못할 것이다.'라고 알아 버려서일지도 몰랐다.

적어도 루트비히는 그렇게 생각했다.

사랑받을 자격 없는 놈.

아버지는 자신을 그렇게 불렀다. 태어나기도 전에 황궁으로 가 버린 누님의 이야기를 할 때면 꼭 그 말이 뒤따랐다.

어머니는 아예 자신을 보려 하지도 않았다. 하얀 머리칼과 푸른 눈동자는 이제 지긋지긋하다며 역정을 내던 모습은 아직도 종종 꿈에서 나오곤 했다.

그렇게 악몽을 꾸고 울면서 일어나는 날이면 늙은 유모는 옛날이야기 대신 얼굴도 모르는 누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야기 속 누님은 꼭 햇님처럼 상냥하고 다정한 분이었다.

그러나 유모의 밝은 목소리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무척 사랑스러운 분이셨지요, 주인마님 말씀도 잘 듣고....'

거기서부터 유모의 목소리는 조금씩 젖어 들기 시작했다.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았지만 루트비히는 그녀 또한 그다지 사랑받지 못하고 자랐을 거라 어렴풋하게 짐작할 수 있었다.

루트비히는 말을 멈춘 유모를 재촉했다. 그리고 그녀가 저택을 떠나던 순간을 들려 달라고 졸랐다.

그러면 유모는 다시 기운을 차린 목소리로 루트비히에게 그날 자신이 본 것을 들려주었다.

"아가씨께선 본인의 의지로 이 저택을 떠나셨답니다.”

"그럼 누님은 지금 어디 있어?"

"황궁에 계시지요.”

"황궁... 거기 가면 누님을 사랑해 주는 사람들이 많을까?"

“무척 사랑받고 있다고들 합니다.”

"다행이네....”

벌써 몇십 번도 넘게 한, 일종의 의식이나 습관 같은 대화였다.

잠이 든 루트비히에게 이불을 다시 덮어 주며 유모는 한숨을 내쉬었다.

말로는 늘 공작가의 품위 운운하며 후계자다운 행동을 보이라 하시면서 정작 모범을 보이시진 않는 아비와 낳기만 했을 뿐 거들떠보지도 않는 어미.

그 둘 사이에서 어떻게 이런 아이가 태어났을까 싶을 정도로 마음씨 고운 도련님이었다.

말이 좋아 엘리시움의 후계자이자 소공작일 뿐, 챙겨 주는 이라곤 집사와 자신을 제외하면 아무도 없는 저택이었다.

제 누이가 마땅히 누려야 할 행복을 빼앗겼다면 어린 도련님은 평범한 아이로서 누려야 할 당연한 것조차 누리지 못하고 있었다.

다른 또래들은 한창 뛰어놀고 공부를 하느라 바쁠 시기에 그는 부모의 무관심 속에서 살아남기에 급했다.

'내일은 청소를 좀 해야겠어.'

도저히 소공작의 방이라고 할 수 없는 곳에서 유모는 다시 한숨만 내쉬었다.

얼마 전, 루트비히의 이름으로 초대장이 도착했다.

공작의 계략이 절반 정도는 먹혔던 것인지, 결국 엘리자베스는 그들을 완전히 내버리지 못했다.

그렇게 몇 번인가 누님을 본 적이 있다고 유모는 말했지만 루트비히는 그때마다 고개만 갸웃거렸다.

조각을 잃어버린 퍼즐처럼 흩어진 기억 속에 별처럼 하얗게 반짝이던 존재가 있던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오늘, 루트비히는 마침내 기억 속의 반짝이는 존재와 마주했다.

누님은 막연히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그녀가 입은 드레스며 머리 위의 왕관이 어찌나 화려하던지, 지금부터 전해 줘야 하는 푸른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보잘것없는 구슬 목걸이처럼 느껴졌다.

그런 그의 속내를 읽기라도 했는지, 상냥하고 다정한 자신의 누이는 목걸이 대신 손수건을 요구했다.

계절은 겨울이었고, 그는 겨울이면 자주 감기에 걸려 늘 손수건을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말이 좋아 손수건이지 그저 보드라운 천을 가장자리만 감침질한 것에 불과했다.

심지어 몇 년 동안 사용하다 보니 곳곳에 얼룩진 자국과 올이 풀린 흔적마저 남아 있었다.

그러나 누이는 그것을 소중하게 받아들였다.

낡은 것, 이라고 말했지만 루트비히는 전혀 부끄럽지 않았다.

오히려 손수건을 줄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은 행복한 신부가 될 거라고 말했다.

무슨 뜻인지는 잘 몰라도 어쩐지 무척 안심이 되는 말이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자리에 돌아와 있었다.

엘리자베스와 레온하르트는 적당히 친정에서 준비한 마지막 깜짝 선물이었다고 둘러대며 푸른 꽃잎이 부슬비처럼 쏟아지는 길을 함께 행진하기 시작했다.

루트비히는 멍한 얼굴로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엘리자베스만 바라봤다.

옆에서 무서운 아버지가 씩씩 콧김을 내뿜고, 무서운 어머니가 옆구리를 마구 꼬집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누님의 곁에 가고 싶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그저 존재할 뿐이던 엘리시움의 후계자는 마지막으로 엘리시움을 바꿔 놓을 기회가 되었다.

김이 서리지 않도록 마법이 걸린 유리 마차를 타고 수도를 한 바퀴 돈 뒤에야 엘리자베스는 드레스를 벗을 수 있었다.

모든 순간이 꿈만 같았다.

엘리자베스는 눈을 감고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눈이 마주친 사람마다 모두 그녀에게 경의를 표하고 행복을 기원했다.

쏟아지는 축복 속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대답은 그저 있는 힘껏 환하게 웃고 손을 흔드는 것뿐이었다.

“휴우... 지쳤다.”

"벌써 지치시면 안 되죠, 황후마마. 아직 한참 남았는걸요?"

무거운 왕관과 걸리적거리는 베일을 벗겨 주던 시녀가 까르륵 웃었다.

그녀의 말대로 아직 남은 일이 있었다. 밤새 춤도 춰야 하고, 축하 인사도 받고, 폭죽 구경도 하고....

“이래서야 잠은 언제 잔다니?"

“어머, 주무시게요?"

입을 삐죽 내밀며 작게 투덜거리자 시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엘리자베스는 그 말 뜻을 한 박자 천천히, 가까스로 이해하고 얼굴을 붉혔다.

“저녁 무도회까진 조금 시간이 있으니 잠시 눈이라도 붙이셔요. 차를 가져다 드릴까요?"

화려하지만 갑갑했던 드레스를 벗고 편안한 차림이 된 엘리자베스는 잔뜩 상기된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

지금 그녀가 있는 곳은 새롭게 단장한 황후궁이었다.

그녀의 뜻으로 선대 황후의 화실만큼은 그대로 남겨 두었지만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다른 사람이 머물던 방이었다곤 믿을 수 없을 만큼 싹 바뀐 모습을 처음 본 순간 그녀는 잠시 말을 잃었다.

보는 눈이 없자 엘리자베스는 그대로 소파에 쓰러지듯 주저앉아 깊게 몸을 파묻었다.

새벽부터 긴장해야 했던 몸 이곳저곳이 쑤시기 시작했다.

'잠... 잠들면... 안 되는데....'

가물가물 감겨 오는 눈꺼풀을 억지로 버티던 엘리자베스는 결국 다과를 가지러 갔던 시녀가 돌아오기 전에 잠들어 버렸다.

그녀가 좋아하는 마카롱을 듬뿍 챙겨 돌아온 시녀는 작은 목소리로 어머나, 깜짝 놀란 소리를 내더니 이내 테이블 위로 은쟁반을 올려 두고 부드러운 담요를 가져와 그녀에게 덮어 주었다.

"황후마마께서도 참, 이왕 쉬실 거면 편히 쉬시질 않으시고....”

여덟 살, 좋아한다는 것의 의미도 모른 채 황궁으로 왔던 꼬마가 어느새 자신의 입으로 행복한 신부가 될 거라고 말하는 의젓한 황후마마가 되었다.

어쩐지 가슴 한구석이 먹먹해지는 기분이 들어 시녀는 에이프런으로 눈시울을 찍어 대며 그녀가 편하게 쉴 수 있도록 조용히 물러났다.

엘리자베스는 꿈을 꾸고 있었다.

꼭 미미르의 연구실처럼 바닥 여기저기에 책과 정체를 알 수 없는 잡동사니며 뼈다귀가 굴러다니는 곳이었다.

그러나 어쩐지 무섭다거나 낯선 기분은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아주 오랜만에 온 느낌이었다.

“오랜만이지?"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엘리자베스는 조심스럽게 뒤를 돌아봤다.

조개껍질로 만든 팔찌를 한 여자가 시원시원한 미소와 함께 서 있었다.

불꽃처럼 새빨간 머리칼, 고양이처럼 새침하게 올라간 눈매, 황금빛 석양 아래 반짝이는 짙은 나뭇잎 빛 눈동자.

“...미미르 언니?”

엘리자베스는 저도 모르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눈앞의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제가 꿈을 꾸고 있나요? 아니, 굳이 꿈으로 찾아오실 필요 없이 그냥 오시면 되는데. 아, '푸른 것' 정말로 고마워요. 그런 선물일 거라곤 정말 상상도 못 했는데....”

"마음에 들었나 보구나. 다행이다.”

어쩐지 다른 사람의 행동을 칭찬하는 듯한 말투에 엘리자베스는 말을 멈췄다.

“...미미르 언니?"

"엘리자베스.”

미미르는 맑은 눈을 들어 그녀를 응시했다.

인간이라기엔 지나칠 정도로 밝은 안광은 그녀가 마침내 인간의 한계를 넘어 시계탑의 주인이 되었다는 증거였다.

엘리자베스는 저도 모르게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그녀가 아는 미미르는 아직 인간이었다. 자세히 보니 기억 속의 미미르보다 키도 조금 크고, 분위기도 어딘지 다른 것 같았다.

“...누구세요?"

엘리자베스의 질문에 마녀는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네 친구야.”

비록 서로의 기억에 남지는 못했지만.

엘리자베스는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빤히 그녀를 응시했다.

분명 어디선가 본 적 있는 사람이지만 꼭 물에 젖은 수채화처럼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기억나지 않았다.

“이스파한?"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잘 차려진 티 파티 테이블이 나타났다. 그녀가 손짓했다.

어쩐지 잊어선 안 될 것을 잊은 것만 같은 죄책감을 느끼며 엘리자베스는 자리에 앉았다.

“리지.”

친근함과 다정함이 듬뿍 담긴 목소리로 마녀가 나지막하게 그녀를 불렀다.

주인이 먼저 권하지도 않았는데 자연스럽게 손이 움직였다. 아차 하며 뒤늦게 자신의 무례한 행동을 자각했지만 이미 접시 위엔 그녀 몫의 이스파한 한 조각이 놓여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얼굴을 붉히며 사과를 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행복하니?"

그러나 마녀는 그녀의 행동을 질책하는 대신 오히려 제 몫의 이스파한을 밀어 주며 그렇게 물었다. 마녀의 질문에 딸각, 은식기가 맑은 소리를 내며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행복하다... 행복... 말씀이신가요."

"그냥 편하게 불러. 미미르라고 부르고 싶지 않다면 마녀라고 해도 괜찮아.”

엘리자베스가 내려놓은 은식기가 마녀의 손짓 한 번에 스스로 움직여 이스파한을 다시 조각내기 시작했다.

엘리자베스는 한참을 말없이 고민했다.

"행복했니?”

마녀는 힌트 대신 조금 간단한 질문을 다시 던졌다.

이 질문엔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었다.

“행복했어요.”

그러자 마녀가 흡족한 표정으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너는 산을 넘었어. 앞으로도 너는 행복할 거야.”

알쏭달쏭한 마녀의 말에 엘리자베스의 미간 사이로 얕은 주름이 잡혔다.

“이게 내가 주는 결혼 선물이란다. 리지, 행복하렴. 행복해지렴. 행복할 거야. 너는 행복해 져.”

마녀의 목소리가 점점 흐려졌다. 눈앞에 있던 이스파한과 테이블, 너저분한 방 또한 조금씩 멀어지기 시작했다.

엘리자베스는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벙긋거렸다. 그러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오늘 일은 비밀이란다. 너에게도, 나에게도.”

그리고 엘리자베스는 눈을 떴다. 식어버린 차를 새로 가져오던 시녀와 눈이 마주쳤다.

“어머, 일어나셨어요? 황후마마... 마마? 울, 울지 마시구요!"

그 말을 듣고서야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느낄 수 있었다.

어쩐지 가장 소중한 것을 잊어버린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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