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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폐하가 시곗바늘을 되돌린 사연-104화 (104/130)

104화 빌린 것, 푸른 것, 낡은 것, 그리고 새것(2)

미미르가 준비했다는 푸른 것이 이 하늘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맑은 날이었다.

듣자 하니 성소에 거주하는 성인과 성녀님까지 오늘을 위해 제도로 오셨다고 한다.

식은 황성 안에 마련된 성당이 아닌 제도에서 가장 큰 성당에서 진행될 예정이었다.

가능한 많은 사람들의 축복 속에서 웃는 엘리자베스의 얼굴을 보고 싶다는 레온하르트의 뜻이었다.

덕분에 제도는 젊은 새 황제의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보고 싶어 몰려온 사람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북적대고 있었다.

“나... 나, 긴장한 것 같아?"

"리지. 침착해. 침착. 이미 연습도 했잖아? 괜찮을 거야.”

"괜찮을 거야, 가 아니라 괜찮아야 해! 그리고 연습은 무슨, 연습보단...."

“쉿, 거기까지!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흐음, 긴장을 풀기에 아주 좋은 방법이 있기는 한데....”

엘리자베스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등 뒤로 단단한 벽이 느껴졌다.

“레온, 싫어. 안 돼."

“쉬이, 괜찮아. 어차피 이제 곧 정식으로 부부가 될 건데... 아니 이게 아니라! 어젯밤은 네가 먼저 달려들어 놓고서 이러기야?"

“조금 전 누가 들으면 어쩌냐고 한 사람이 누구더라?"

“아, 긴장 풀렸다.”

레온하르트의 뻔뻔하기 그지없는 태도에 엘리자베스는 입만 벙긋거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레온하르트가 쪽, 그녀의 입술 위로 가볍게 키스했다.

"레온!"

그녀의 자그마한 비명 소리를 뒤로한 채 레온하르트는 조금 있다 보자며 대기실을 나섰다.

슬쩍 둘러본 성당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가장 앞줄은 귀족들을 비롯한 외국의 대사들.

그 뒤를 이어 미우치아를 비롯해 나라에서 훈장을 내린 예술가나 무인들이.

이어서 평민들 중에서 특별히 초청된 이들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의자 사이 복도까지 빼곡하게 매워진 인파에 레온하르트는 혀를 내둘렀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전생의 기억이 조금씩 흐려지고 있었다.

그날, 황위에 오르던 순간이 어땠더라?

적어도 지금처럼 맑고 온화한 겨울은 아니었던 것 같다.

레온하르트는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내려오는 따스한 햇살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다짐했다.

그녀는 행복해진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그렇게 만들 것이다.

즉위식은 경건하고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성소에서 온 성인들과 성녀들이 그들을 축복하는 가운데 황제는 자신이 쓰고 있던 관을 벗어 사제에게 넘겼다.

사제는 진지한 표정으로 관을 넘겨받아 새로운 황제의 머리 위로 씌워 주었다.

이어서 황제, 아니. 이젠 상황이 된 이실두르가 가슴에 달고 있던 황제의 별을 떼어 레온하르트의 가슴에 직접 달아 주었다.

“너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황제가 되거라.”

아들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는 것을 마지막으로 이실두르는 옥좌 아래에 마련된 자리로 옮겨 앉았다.

레온하르트는 황제의 관에 이어 홀과 오브를 손에 쥐고 옥좌로 올라가 앉았다.

두 번째로 앉는 곳이었지만 전생과 달리 이번엔 그를 우러러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달랐다.

'그때는... 정말 눈빛에 찔려 죽는구나 싶었는데....'

이어서 엘리자베스가 등장했다. 황후 또한 같은 과정을 거쳐 자신의 관을 넘겨주고 그녀의 가슴에 황후의 별을 달아 주었다.

“레온하르트를 잘 부탁합니다. 황후마마.”

엘리자베스는 깊게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프레이야에게 마지막 예의를 표했다.

사람들은 금방이라도 새로운 황제의 이름을 외치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그러나 아직 그들의 이름을 외치기엔 한 가지 의식이 더 남아 있었다.

황제와 황후가 된 두 사람이 정식으로 식을 올리기 위해 다시 자리를 비운 사이 미우치아를 비롯한 예술가들의 축하 공연이 이어졌다.

멀리서 들려오는 청아한 노랫소리를 직접 들을 수 없다는 점에 엘리자베스는 아쉬워했다.

그러나 저녁에 있을 축하연에서 다시 미우치아의 노래를 들을 수 있다는 말에 그녀의 얼굴은 다시 밝아졌다.

"리지 언니! 아, 아니. 황후마마.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그녀를 향해 후다닥 달려오던 아일라가 세 걸음쯤 앞두고 멈춰 서더니 얼굴을 붉혔다.

아일라는 옅은 분홍빛 실크 원피스를 입고 머리에는 화관을 쓰고 있었다.

바구니를 들고 그녀가 걸을 길 앞으로 꽃잎을 뿌릴 아일라의 모습을 상상하자 절로 미소가 나왔다.

"리지, 준비 다 됐어?”

"황제 폐하께서 드십니다.”

문이 열리고 레온하르트가 들어왔다.

이젠 황태자가 아니라 정말 황제구나.

엘리자베스는 하얀 예복을 입은 레온하르트의 가슴 위에서 빛나는 별을 보며 감격했다.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의 모습에 할 말을 잊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리지... 리지....”

"황제 폐하, 체통을 지키셔야지요.”

"너는... 세상에. 오늘 밤엔 달이 울겠어. 하늘에서 가장 아름답게 빛나던 별이 땅으로 내려가 버렸잖아.”

엘리자베스는 부케를 들어 웃음을 감췄다.

"그럼... 가실까요? 황후.”

레온하르트가 손을 내밀었다. 엘리자베스는 수줍게 그 손을 맞잡았다.

* * *

아직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병아리 걸음으로 씩씩하게 걷는 아일라의 모습은 하객들의 얼굴에 미소를 불러왔다.

아일라는 바구니 속에 가득한 꽃잎을 한 움큼씩 쥐어 하얀 융단 위로 뿌렸다.

그 순간, 미미르가 준비한 '푸른 것'이 나타났다.

“세상에...!”

"마법, 마법인가?"

“그러고 보니 시계탑의 미미르 님이 황후마마와 아주 친밀한 관계라고 들었는데.”

"푸른 장미라니... 기적이야....”

"물망초, 수레국화, 방울꽃, 허허. 아주 온 계절의 꽃이 만개했군.”

사람들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눈처럼 내리는 푸른 꽃잎을 멍하니 바라보며 감탄사만 연발했다.

엘리자베스는 발목이 푹 잠길 정도로 깔린 꽃길을 조심스럽게 걸었다.

슬쩍 시선을 돌리자 흐뭇한 표정으로 베아트리체와 로젤린 사이에 앉아 있는 미미르가 보였다.

신께서 지켜보시는 가운데 엘리자베스의 성은 엘리시움에서 에스페도르로 바뀌어 황실 족보에 올라갔다.

반지를 교환하고, 사제가 그들의 팔에 자수 끈 매듭을 걸쳐 주며 이로써 두 사람이 하나가 되었음을 선포했다.

이제 남은 것은 레온하르트가 그녀의 베일을 걷어 올리고 입을 맞추는 일뿐이었다.

"엘리자베스, 내 사랑.”

어제도 했고 그제도 했고 보는 눈만 없었다면 조금 전에도 할 뻔했던 키스인데 왜 이렇게 떨리는 거지?

레온하르트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애써 진정시키며 그녀의 베일을 걷어올렸다.

“...역시 안 되겠어.”

"뭐?"

“너무 떨려서, 못 하겠다고."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매번 먼저 그녀에게 다가왔던 그가 머뭇거리고 있었다.

'어쩔 수 없지.'

레온하르트는 조금씩 가까워지는 엘리자베스의 얼굴을 멍하니 지켜보다 저도 모르게 눈을 꼭 감았다.

분명 계절은 겨울인데, 한여름 햇빛 아래에 서 있는 것보다 땀이 줄줄 흐르고 입술에선 봄 향기가 느껴졌다.

“저 녀석, 정작 자리를 마련해 주니 왜 저렇게 숙맥처럼 행동하지?"

“그래도 황후마마께서 영리하게 잘 대처하셨네요.”

"보아하니 저놈도 공처가 신세가 뻔하군.”

"애처가겠지요.”

"아바마마, 어마마마. 공처가가 뭐에오?"

“우리 황녀님은 아직 몰라도 되는 거란다. 그나저나 미미르는 언제 이런 마법을 준비했을까요?"

“...프레이야, 잠시만.”

이실두르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프레이야는 저도 모르게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막 하나가 된 그들이 성당 밖으로 나서려는 찰나, 의외로 얌전하게 있던 엘리시움 공작가에서 작은 사내아이가 황제 부부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루트비히 모르트 폰 엘리시움은 무서운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행동했다.

'네 누님에게 이것을 전해 주고 오너라.'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가운데 루트비히는 덜덜 떨리는 걸음으로 엘리자베스에게 향했다.

“누... 누님... 이것을... 아버지께서... 신부의 낡은 것보다... 푸른 것이 더 좋은데... 좋은데... 그... 받아 달라고....”

앞뒤를 알 수 없는 말이었지만 엘리자베스는 그 속에 숨겨진 엘리시움 공작의 흉계를 읽을 수 있었다.

끝까지.

결국 끝까지 그들은 변하지 않았다.

루트비히의 손에 들린 것은 푸른 다이아몬드 목걸이였다.

'낡은 것을 보내라는 내 뜻을... 결국 읽지 못하셨구나....'

루트비히의 돌발 행동에 식이 중단되고 근위대가 경계 태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레온하르트는 손을 들어 올려 수군거리는 사람들을 진정시키는 한편 루트비히를 노려봤다.

엘리자베스와 똑 닮은 하얀 은발과 푸른 눈동자.

그러나 그 눈은 엘리자베스와 달리 흐리멍덩하기 그지없었다.

"황후, 받지 않아도 됩니다.”

“...이건 제 일이에요.”

레온하르트는 그 말에 반걸음 뒤로 물러섰다.

엘리자베스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루트비히에게 다가갔다.

분명 아일라보다 먼저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움직임은 아둔하기 그지 없었다.

그만큼 공작가에서 그의 교육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뜻이겠지.

엘리자베스는 눈을 꼭 감았다 뜨며 무릎을 굽혀 루트비히와 눈높이를 맞췄다.

“누... 누님, 아니, 엘리자베스, 누, 누... 황후, 마마!”

"엘리시움 공자.”

그 호칭에 부모님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지는 것을 본 엘리자베스는 더 이상 실망하지 않기로 했다.

“손수건을 가지고 있나요?"

“네, 네? 네!”

루트비히는 마구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바람에 푸른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엘리자베스가 손을 내밀었다.

“그 손수건을 받을 수 있을까요?"

"하... 하지만 아버지께서, 목걸이를... 목걸이를....”

“저는 분명 '낡은 것'을 요청했습니다. 공자가 보기에 다이아몬드 목걸이와 손수건 중 무엇이 더 낡은 것 같나요?"

“손수건... 입니다....”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루트비히는 주머니를 뒤져 꼬질꼬질한 천 한 조각을 내밀었다.

도저히 공작가의 후계자가 가지고 다닐 법한 손수건으로 보기 힘든 물건에 사람들이 다시 술렁였다.

엘리자베스는 바닥으로 떨어진 목걸이를 주워 루트비히의 목에 걸어 주었다.

“이로써 저는 낡은 것, 푸른 것, 빌린 것, 새로운 것을 모두 받았습니다. 저는 행복한 신부가 될 거예요.”

행복한 신부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몰라도 눈앞의 아름다운 사람이 웃었다.

루트비히는 엘리자베스를 따라 마주 웃더니 그 길로 다시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엘리시움 공작은 당장이라도 제 아들의 뺨을 내리치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어리석은 것! 보석을 주랬지 걸레짝을 주고 오라더냐! 이졸데, 네가... 네가 이런 식으로 가문을 배신해...? 이... 이 무엄한...!'

엘리자베스는 붉으락푸르락 화를 숨기지 못하고 부들부들 떠는 아버지와 그 곁에서 필사적으로 루트비히를 지키려 드는 어머니를 외면했다.

낡은 손수건은 엘리자베스의 과거를 이어 주는 물건이 아닌 과거를 끊어 내는 것으로 변했다.

'이걸로 된 거야....'

엘리자베스는 주저 없이 레온하르트의 곁으로 돌아갔다.

그곳이 그녀가 있을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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