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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폐하가 시곗바늘을 되돌린 사연-103화 (103/130)

103화 빌린 것, 푸른 것, 낡은 것, 그리고 새것(1)

"공주님은 처음 본 왕자님보다 그동안 자기랑 같이 살면서 친해진 용이 더 좋았대. 그래서 용이랑 결혼했어.”

'요즘 아이들 동화는 내가 읽던 것과 많이 다르구나....'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아일라에게 질문했다.

“그럼 그 공주님은 행복해졌나요?"

아일라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용이는 왕자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산다는데 행복하지 않을 리가.”

황제의 말에 황후 또한 동감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새것, 낡은 것, 빌린 것, 그리고 푸른 것을 몸에 지닌다면 그 신부는 평생을 행복하게 산다고 한다.

식을 앞두고 베아트리체와 로젤린, 그리고 미미르가 찾아왔다.

저마다 각자 손에 상자 하나씩을 들고 있었다.

대체 언제 서로 친해진 거냐 물을 새도 없이 네 사람은 까르륵 웃음부터 터트렸다.

새신부를 위한 선물보다 베아트리체와 라이오넬 대공 사이의 이야기가 가장 먼저 화두에 올랐다.

“그래서 편지를 보냈더니 대뜸 답장으로 이런 게 온 것 있죠?"

베아트리체는 수줍게 웃으며 왼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네 번째 손가락에 낡은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대공비가 대대로 물려받아 온 반지랍니다. 세상에, 알고 봤더니 예전에...."

소곤소곤, 베아트리체는 지금 생각해도 기가 막힌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정말 그랬어요? 대공께서 몰래 언니의 정원에 몰래 숨어들었다 들켜서 언니에게 뺨을 맞았다니!"

"그때 아버지께서 이상할 정도로 순순히 넘어가시던 것을 의심했어야 하는데! 그 불한당이 대공이었다니...."

“그럼 대공은... 베아트리체의 따귀에 반한 건가요?"

“이야기가 그렇게 되나? 대공 취향 참 독특하네....”

“그, 그런 게 아니라! 반지, 반지 이야기로 돌아가서.... 대공께서도 형식적으로 편지만 주고받는 건 싫으셨다고... 그래서 그날 그렇게 실례를 했다면서, 평생 동안 그 일에 대해 추궁하고 벌을 줄 권리를 드릴 테니 답장으로 빈 봉투를 보내 달라고 하셔서....”

“프로포즈하면서 벌을 달라고 하는 남자는 또 처음 보네. 정말 그 대공 괜찮은 거야?"

미미르의 말에 로젤린과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베아트리체는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약혼자를 대신해 있는 힘껏 항변했다.

"으흠, 아무튼 저는 그렇게 됐습니다. 다음에 만날 때는... 더 이상 레이디 밀란이 아닌 키르스텐 대공비겠지요?"

“그렇게 생각하니 또 아쉽네요. 아무리 편지를 자주 나눈다고 해도 지금처럼 차를 마시면서 마주하는 것만 할까요?"

“즐거운 이야기! 즐거운 이야기! 레이디 엘리자베스는 프로포즈 어떻게 받았어요? 저희 부모님은요, 세상에. 아버님께서 어머님과 단둘이 호숫가에서 뱃놀이를 하자고 하더니... 호수 중앙까지 가서는, 결혼해 주지 않으면 여기서 노를 놓아 버리겠다는 거예요!"

"뭐? 그거 협박 아니야?"

"그랬더니 어머니께서 어떻게 행동하신 줄 아세요?”

“설마 직접 노를 저으신 건 아니겠지...?"

세 사람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다.

“그 설마예요!”

“세상에, 그 고상하신 공작 부인께서? 말도 안 돼!”

“대체 로즈 네가 태어나는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다시 한바탕 와르륵 웃음소리가 쏟아졌다.

"그래서, 우리 작은 황후마마께선 어떤 프로포즈를 받으셨나요?"

“자... 작은 황후마마라니! 미미르 언니!”

“그러게요, 미미르 님의 말을 듣고 보니 저도 궁금해졌어요. 황태자 전하께선 어떻게...?"

“저는 들려 드렸으니 들을 권리가 있습니다. 갔으니, 오는 게 있어야겠죠?"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호기심과 장난기로 반짝이는 세 쌍의 눈동자 앞에서 엘리자베스는 수줍은 목소리로 그날 밤 있었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어머머! 세상에, 정말요?"

"황태자 전하께 그런 면이 있었다니... 그거 진짜 전하 맞아요?"

“꼭 이야기 속에 나오는 장면 같아요... 낭만적이야....”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점점 더 빨갛게 물들었다. 미미르가 씨익 웃으며 품 안에 가져온 상자를 꺼냈다.

"아무래도 여기서 '푸른 것'을 꺼내야 할 것 같은데? 열어 봐.”

미미르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었다.

그러나 상자 속에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언니?"

“벌써 공개하면 서운하지! 두고 봐, 이 언니가 너를 위해서 아주 특별한 마법을 준비하고 있으니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푸른색이 될 거야.”

엘리자베스는 미미르의 옆구리를 콕 찌르며 그만 웃어 버렸다.

이어서 로젤린과 베아트리체도 상자를 테이블 위로 밀어 놓았다.

“빌려드릴게요. 다음에 만날 때 돌려주세요. 귀한 물건이니 금방 돌려주셔야 합니다?"

돌려준다는 핑계로 어떻게든 빨리 다시 만나고 싶던 베아트리체가 생각해 낸 묘안이었다.

이어서 로젤린이 가져온 '새로운 것'은 역시나 향수였다.

“향이 참 좋네요! 이 향에는 어떤 이름을 붙였나요?"

로젤린은 혀를 쏙 빼물며 싱긋 웃었다.

“레이디 엘리자베스!"

"네?"

향수의 이름을 물었더니 갑자기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로젤린의 목소리에 엘리자베스가 화들짝 놀랐다.

그녀를 제외한 사람들이 한바탕 다시 까르륵 웃었다.

“흠, 리지를 이미지로 한 향수지? 되게 잘 만들었다. 리지 느낌 그대로야."

“제 느낌?"

“응. 맑고, 상냥하고, 종소리 같고... 또 은 같고? 하여튼 그런 느낌적 느낌이 있어.”

미미르의 칭찬에 로젤린은 진심으로 기뻐했다.

“그럼 마지막으로 남은 오래된 것은...."

손가락으로 하나씩 꼽아 보던 베아트리체는 '오래된 것'으로 주로 사용되는 것이 무엇인지 떠올리고 그만 입을 다물었다.

오래된 것, 신부의 가족과 과거를 연결하는 것.

그러나 엘리자베스가 과연 가족과 함께한 과거를 연상시키는 물건을 지니고 싶어 할까?

“리지....”

미미르가 조심스럽게 엘리자베스의 손을 맞잡았다.

잠시 아무 말 없이 고개만 숙이고 있던 엘리자베스는 애써 웃으며 자신의 결혼식 예복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 * *

“레이디 엘리자베스는 하얀색이 잘 어울리지요. 푸른 그림자 말고 따스한 그림자가 지는 하얀 톤에, 유리 비즈 대신 진주로 수를 놓으면 더욱 따뜻한 느낌이 날 거예요.”

"하지만 그렇게 작은 진주가 있을까요?"

“후후, 천연 진주는 아니지만 분홍빛을 띠는 양식 진주도 제법 나쁘지 않답니다.”

“왕관은... 역시 황후마마의 관을 쓰시게 되겠지요?"

도로테아의 말에 황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황후의 관이라는 물건이 쓸데없이 무겁기만 하고 투박해서 어울릴지 모르겠구나.”

“그럼 이참에 새로 만들까요, 황후?"

“제가 무겁다고 할 때는 아무 말씀도 안 하신 분이 이제 와서...?"

“그, 그땐 어마마마의 뜻이 너무 강경하셨던 터라...! 화내지 마세요, 내 사랑. 응?"

“아바마마, 어마마마한테 또 잘못했어요?"

“으응, 그런 일이 있단다. 도로테아, 황후의 관이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하지요?"

“기억이야 하지만... 아, 소매는 어떻게 할까요? 크게 부풀리는 유행은 지나갔으니 딱 맞게 하는 쪽이 좋을까요?"

“그게 좋겠어요. 그나저나 도로테아는 늘 자신과 싸우는군요.”

“제가요?"

"매번 이것보다 아름다운 드레스는 없을 거라 생각하는데, 다음 순간 도로테아는 그보다 더 어여쁜 드레스를 만들어 오잖아요. 과거의 자신과 싸워 이긴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해요.”

“영애의 말대로입니다. 저는 지금 바느질로 먹고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꿈꾸는 자리까지 올라왔지요. 더 이상 경쟁할 사람은 없습니다. 과거의 저와, 저를 쫓아오는 아이들을 제외하면 말입니다.”

“쫓아오는... 아, 그러고 보니 엘리라는 아이는 요즘 어떻게 지내나요?"

"그 아이요? 영애의 결혼 예복을 만들 때 자기도 돕게 해 달라고 어찌나 고집을 부리던지, 저도 그만 두 손 다 들었답니다.”

“도로테아의 경쟁 상대가 벌써 정해진 것 같은데요?"

"레이디 엘리자베스...!"

엘리자베스의 말에 도로테아가 즐거운 비명을 내질렀다.

“구두는 새로 맞출 것 없이 데뷔탕트 때 신은 걸 신어도 될까요?"

"네가 원한다면야 그러렴. 하기야, 그 구두보다 더 예쁜 구두도 없다만."

“모야? 어떤 구둔데요?"

“우리 황녀님도 하나 만들어 줄까?”

“아일라는 금방금방 자라니 지금 만들어 봤자 얼마 안 가 신지 못하게 될 거예요.”

“...이 아바마마가 어마마마 몰래 하나 구해 주마.”

"아바마마 최고!”

"다 듣고 있습니다, 폐하. 황녀.”

아일라와 황제가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엘리자베스는 유전의 무서움을 깨달으며 황후와 함께 그만 웃어 버렸다.

소매에 이어 치마 길이는 어떻게 하고, 베일은 또 얼마나 길게 해야 할지 한참을 의논하던 도로테아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돌아갔다.

아일라 또한 새 구두 대신 마음에 쏙 드는 드레스와 엘리자베스의 결혼식 당일 화동 역할을 손에 넣어 만족한 기색이었다.

즉위식까지 앞으로 보름도 채 남지않았다.

엘리자베스는 친구들이 주고 간 물건을 늘어놓고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낡은 것. 가족으로부터 받아야 하는 물건을 정말 받아야 할까?

싫다고 해도 그들은 아직 엘리시움 공작이었다. 즉위식에서 가장 앞줄에 앉는 일은 당연하고, 결혼식 또한 신부 측에 따로 마련된 자리에 앉을 것이다.

'루트비히는 얼마나 컸을까....'

어머니의 손수건은 몰라도 루트비히가 사용하던 손수건이라면 괜찮을지도 몰라.

아니, 부모님께서 지금처럼만 조용히 지내신다면 오히려 새 시작을 뜻하는 물건이 될지도 모르지.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엘리시움 공작저에 직접 편지를 써 보냈다.

“낡은 것... 루트비히의 손수건을 달라고? 이 고얀 것! 끝까지 부모를 능멸하는구나!”

늦은 밤 편지를 받은 엘리시움 공작은 씩씩거리며 편지를 바닥으로 집어 던졌다.

“이 못된 것, 글러 먹은 것. 이제 황후가 되니 자기가 살던 집이고 가문이고 모두 낡아 보인다는 게야?"

집사는 조용히 편지를 주웠다.

한참 동안 열불 난 멧돼지처럼 콧김을 내뿜던 공작은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난 건지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로 향했다.

대대로 가주들에게 내려오는 가문의 보석을 보관한 곳에 도착한 공작은 벽과 벽 사이의 기둥을 조작했다.

그러자 숨겨진 방이 나타났다. 공작은 그 안으로 들어가 사파이어라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색이 진한 다이아몬드를 보며 흐흐흐 웃었다.

“낡은 것은 무슨, 당연히 푸른 것이어야지!"

공작은 머릿속으로 즉위식 당일을 상상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루트비히가 이 보석을 가지고 가서 신부를 위한 푸른 것을 선물한다고 하면 이졸데도 어쩔 수 없이 받겠지. 암, 그날 지켜보는 사람의 시선이 몇일 텐데.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보석을 받는다면 그걸 핑계로 다시 어떻게든 그 아이를 이용해서....'

생각만으로도 헤벌쭉 웃음이 나왔다.

공작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서재를 나와 침실로 향했다.

오늘 밤은 어쩐지 아주 달콤한 꿈을 꿀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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