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행여 내 사랑만은 의심 마오(2)
몇 번 버릇처럼 테이블을 펜으로 두드리던 레온하르트는 이내 익숙하게 문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완전히 역전된 외교 관계를 다시 재역전시킨 적도 있는 그였다.
눈앞의 문제 정도야 조금만 생각해보면 금방 해결할 수 있는 간단한 사안이었다.
그러나 레온하르트는 일부러 뜸을 들여 가며 천천히, 신중하게 펜을 놀리고 있었다.
'아바마마 성격에 분명 옳다구나 하고 귀찮은 정무를 전부 떠넘기실 게 분명해’
그의 생각대로였다. 황제는 흐뭇한 시선으로 레온하르트를 응시하고 있었다.
'누구 아들인지 참 잘 컸단 말이지.'
복잡한 예식 같은 건 전부 생략하고 그냥 옥좌 위에 앉혀 놓아도 어색함 없을 것 같은데.
황제는 속으로 히죽 웃으며 레온하르트가 문서를 받아 꼼꼼하게 읽기 시작했다.
매의 눈처럼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것을 읽어 내려가던 황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떻습니까?"
"너... 내일부턴 이 자리에 네가 앉거라.”
“싫습니다. 그런 자리는 줘도 안 가지... 아니, 가지기 싫다고 해도 어차피 제 거긴 하지만 아무튼.”
“네가 쓰는 글자 하나가 곧 제국의 힘이다. 내용은 물론 필체 하나까지 상대방이 코웃음 치게 내버려 둬선 안 되는 법이지. 타국에 머무르고 있는 이들 또한 그런 마음가짐으로 일하고 있을 게다. 그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황제가 되거라.”
“...명심하겠습니다. 아바마마.”
마침 때맞춰 황후궁에서 보낸 다과가 들어왔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차만 홀짝였다.
"아바마마.”
"왜.”
“...유지하는 것과 앞으로 나아가는 것 중, 저는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어른이 되어 좋은 점이라면 역시 계피 향 과자를 먹을 수 있다는 걸까.
바사삭, 그가 즐겨 찾던 과자가 입 안에서 부스러지며 알싸한 계피 향이 훅 풍겼다.
황제는 묵묵히 차 한 잔을 비우고 새로 찻잔을 채웠다.
코끝까지 매운 향이 느껴지는 계피 과자 대신 레몬 향이 상큼한 마들렌 몇 개를 우물거리며 그는 생각에 잠겼다.
“에스페도르는 늘 앞을 보고 전진했다. 멈춰 있는 건 짐은 물론 선조들께서도 용서하시지 않을 게다.”
“설령 그 끝에 낭떠러지가 있다 해도요?"
“낭떠러지가 아니라 지옥 입구가 있다고 해도 움직여야 해. 그리고 네가, 황제가 할 일은 백성들이 지옥 입구 위를 안전하게 뛰어놀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레온하르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제 몫으로 넘겨진 공문서들을 뒤적였다.
하나같이 전생에 비하면 지나칠 정도로 평화로운 내용이었다.
전쟁에 나갔던 군인들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뒤에도 한동안 무기를 품에 안고 잠들었다고 하던가.
레온하르트는 지금 자신이 꼭 그런 모습이라고 생각하며 자조했다.
"그나저나 아바마마, 정말 처소를 바꾸실... 생각은... 아니시겠지요...?"
"오늘 너 하기에 달렸지.”
망했군. 레온하르트는 애써 웃어 보이며 황제의 앞에 놓여 있던 서류까지 자신의 앞으로 끌어당겼다.
레온하르트가 엘리자베스의 처소를 사수하기 위해 먼저 나서서 행동하는 사이 엘리자베스 또한 본격적인 황후 수업을 받고 있었다.
'이게... 황후 수업...?'
국모로서 해야 하는 일을 배운다기보단 아일라 황녀와 함께 놀아 주는 일에 가까웠지만, 어쨌든 수업은 수업이라고 황후는 주장했다.
"리지, 리지 언니!"
잠시 황후가 자리를 비운 사이 아일라가 침대에 매달린 얇은 레이스 휘장을 온몸에 칭칭 휘감은 모습으로 엘리자베스를 불렀다.
“나도 신부 할래!”
“황녀님도요? 어머나, 그럼 신랑은 누구일까?"
엘리자베스의 말에 아일라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음... 으음... 너무 많은데....”
고민을 할 때면 손가락을 잘근거리는 버릇이 있는 황녀님은 커다란 눈동자를 굴리며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름을 하나씩 늘어놓았다.
"아바마마랑, 군무 대신이랑, 미미르 님이랑, 페리안 소공작이랑, 또 오라버니도 좋고, 어마마랑 결혼하면 안 돼? 아, 아니다! 리지 언니, 나랑 결혼해!"
끝도 없이 이어지는 이름에 눈만 깜빡이던 엘리자베스는 마지막으로 튀어나온 어린 황녀의 고백에 그만 웃어 버렸다.
"저랑요?"
"응! 언니랑 결혼하면 오라버니랑 같이 살 수 있고, 또 베일리도 있고...."
그 오라버니가 아마 허락하지 않을 것 같은데요.
엘리자베스는 휘장 속에서 마구 몸을 퍼덕이는 바람에 그물에 갇힌 물고기 꼴이 된 아일라를 구해 주며 빙긋 웃었다.
“언니, 언니. 프로포즈 받았어?"
휘장에서 벗어난 아일라가 냉큼 커다란 의자 위로 기어 올라가 탁자 위로 팔꿈치를 대더니 그럴듯하게 턱을 괴었다.
그녀의 몸에 비해 탁자 높이가 너무 높았다는 것만 제외하면 그럴듯한 자세에 엘리자베스는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아야 했다.
“프로포즈... 예, 받았지요.”
그렇지 않아도 동그란 아일라의 눈이 더욱 휘둥그레졌다.
“왕자님이 공주님한테 한 것처럼?"
그랬... 던가? 엘리자베스는 그날 밤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요즘 아일라가 한창 읽고 있는 동화책에 나오는 왕자님들은 어떻게 고백하더라...?
“그보다 더 근사하게.”
“우와아...!”
아일라의 눈동자에 동경과 부러움이 가득 깃들었다.
어린 나이에도 말도 잘하고, 그만큼 질문도 많은 황녀님은 아예 탁자 위로 올라올 기세로 연달아 질문했다.
“어땠어? 막, 책에서 나오는 것처럼 옷이 바뀌었어?"
“옷... 이요?"
끄덕끄덕. 엘리자베스는 잠시 고민한 뒤에야 그녀가 말하는 옷이 바뀐다는 개념이 책 페이지가 넘어가며 주인공이 입고 있는 옷이 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옷은 바뀌지 않았어요.”
“쳇. 옷도 바뀌지 않았는데, 그럼 왜 근사했어?"
그 질문에 그만 엘리자베스의 볼은 빨갛게 물들어 버렸다.
아일라가 재촉하듯 응? 응? 하며 고개를 양옆으로 까딱였다.
"언니, 얼굴 빨게.”
"으... 그... 그러니까....”
“응? 왜 근사한 거야?"
이걸 어떻게 돌려 말하면 좋지? 누구라도 좋으니 도와주세요!
엘리자베스의 머리가 핑핑 돌기 시작했다. 아일라는 기대와 신뢰감 넘치는 눈으로 그녀만 바라보고 있었다.
“꼬... 꽃씨를 함께 심었어요."
“이 겨울에? 오라버니 바보다. 겨울에는 꽃 안 피는데.”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무릎을 톡톡 두드렸다. 아일라가 방긋 웃으며 냉큼 그녀의 무릎 위로 올라왔다.
"추위를 이겨 내고 강인하게 피어나는 꽃처럼 함께 이 제국을 이끌자, 그런 뜻이었던 것 같아요.”
“...으흠! 이 황녀도 이해했습니다.”
전혀 이해하지 못한 표정으로 아일라는 고개만 끄덕였다.
아직 어린 황녀님의 사랑스러운 행동에 엘리자베스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초코칩쿠키를 그녀의 손에 쥐여 주었다.
“그러면 언니도 공주님처럼 예쁜 옷 입는 거지?"
“우리 황녀님도 예쁜 옷 입으실 거랍니다. 예쁜 옷 입어야 하는데 이렇게 다 흘리시면 못써요.”
아일라는 도로록 소리가 날 것만 같은 맑은 눈동자를 굴리며 치맛자락 가득 떨어진 쿠키 부스러기를 무시했다.
“엘리자베스, 아일라 어리광 전부 받아 주면 못쓴대도. 아일라, 이리 오렴. 언니는 바쁜 몸이랍니다.”
"어마마마!"
한달음에 아일라는 엘리자베스의 무릎에서 내려가 황후에게 뛰어갔다.
엘리자베스는 그녀가 흘리고 간 쿠키 부스러기를 내려다보며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도로시! 오랜만이에요. 그동안 잘 지냈나요?"
“레이디 엘리자베스를 뵙습니다. 옆에 계신 분 덕분에 전혀! 잘 지내지 못했고, 앞으로도 잘 지내지 못할 예정입니다.”
“어머, 도로시. 원망은 제가 아니라 본궁에 있는 황제 폐하께 하셔야죠."
황후와 함께 두툼한 종이 뭉치를 품에 안은 도로테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바빠요? 왜 바빠요?"
“황녀님을 뵙습니다. 레이디 엘리자베스께선 지금부터 대관식 의상과 결혼식 예복을 맞추셔야 해요.”
“...나도 보면 안 돼?"
"그건....”
도로테아는 슬쩍 황후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덩달아 아일라의 시선 또한 어마마마에게 돌아갔다.
황후는 그 둘의 시선을 무시한 채 엘리자베스에게 선택권을 넘겼다.
엘리자베스는 어쩔 수 없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 최고! 역시 나 언니랑 결혼할래!”
본궁에서 황제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스스로 해야 할 일을 찾아 처리하고 있던 레온하르트는 순간 등줄기를 타고 오소소 소름이 돋자 어깨를 으쓱였다.
“왜 그러느냐?"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나저나 정말로 리지 처소는 이대로 유지하시는 거지요? 약속하셨지요?"
"그러니까 네놈 하기에 달렸다니까?"
“이미 아바마마 몫까지 전부 해내고 있지 않습니까! 여기서 더 뭘 어떻게 하라는 말씀이십니까?"
황제는 능글맞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막내 황녀님이 보고 싶어질 시간이었다.
“거기서부터가 '앞으로 나아간다.'라는 거다. 짐은 아일라를 보고 올 테니 짐이 올 때까지 열심히 앞으로 전진하거라.”
"아바마마!”
레온하르트의 비명을 뒤로한 채 황제는 본궁을 나섰다. 분명 오늘이 엘리자베스의 예복을 맞추는 날이라고 들었다.
얼마나 아름다운지 직접 눈으로 보고, 기억하고, 또 그걸로 아들을 놀려 먹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앙증맞은 두 손으로 그럴듯하게 치맛자락을 들어 올리는 늦둥이 따님의 인사에 황제는 그녀를 번쩍 안아 올리더니 보드라운 아기의 볼에 자신의 볼을 마구 비벼 댔다.
결국 아일라가 황제의 수염이 따갑다며 울음을 터트리기 직전이 되어서야 그는 아일라를 내려놓았다.
그 모습에 엘리자베스는 다른 이들과 함께 까르륵 웃다 말고 문득 엘리시움 저택에 있을 자신의 남동생을 떠올렸다.
그 아이도 저렇게 사랑받고 있을까? 아마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이다.
엘리자베스의 표정이 어두워진 것을 알아차린 도로테아가 그녀에게 품에 안고 온 종이 뭉치를 내밀었다.
“...혹시 엘리시움 저택에 관한 새로운 소문은 없던가요?"
도로테아는 고개를 내저었다. 엘리자베스는 그녀가 내민 스케치에 집중하는 척 표정을 숨겼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더 나빠졌다는 소식보단 나으니까... 그러니까....’
“언니, 나 이거!"
"으응...?"
저도 모르게 손이 떨리면서 스케치 몇 장이 바닥으로 떨어졌나 보다.
아일라는 어젯밤 유모가 읽어 준 동화책에 나온 드레스와 똑 닮은 스케치를 손에 쥐고 팔랑였다.
“그 디자인이 마음에 드나요?"
"응! 언니가 입으면 분명 공주님보다 더 예쁠 거야!”
아일라의 말에 모두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엘리자베스 또한 제법 밝은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언니는 꼭 행복해질 거야.”
황제의 무릎 위에 앉은 아일라가 테이블 위의 쿠키를 향해 손을 뻗으며 종알거렸다.
“공주님은 왕자님을 만나서 행복해졌나요?"
아일라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공주님은 왕자님이랑 결혼 안 했어.”
"네에?"
엘리자베스가 눈을 깜빡였다. 아일라는 당돌한 목소리로 그런 이야기는 요즘 '대새’에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대새가 아니라 대세, 랍니다. 그럼 공주님은 누구와 결혼했나요?"
“용!"
대체 아일라는 어제 무슨 이야기를 읽은 거지? 그녀의 알쏭달쏭한 말에 엘리자베스는 물론 도로테아도 귀를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