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행여 내 사랑만은 의심 마오(1)
두 사람은 그렇게 확인한 서로의 마음을 씨앗과 흙 아래로 숨겨 놓았다.
눈이 비가 되고 하얀 설원 아래로 푸른 새싹이 고개를 빼꼼 내밀 즈음 다시 보러 오기로 손가락을 걸고 둘은 약속했다.
“그리고 이거... 꽃반지는 역시 구하기 힘들더라고. 대신 조금 더 어른스러운 걸 만들어 봤어.”
그의 말 한마디에 한겨울에 제비꽃을 피워 내느라 진땀을 흘려야 했던 정원사와 온실 담당 마법사가 들었다간 배신감에 치를 떨 소리였다.
레온하르트가 건네준 것은 갈색 종이에 싸여 있었다.
손으로 더듬어 보자 비단 리본도 아닌 평범한 노끈의 거친 감촉이 느껴졌다.
“지금 열어 봐도 될까?"
“추우니까 들어가서 열어 봐."
레온하르트는 흠뻑 젖어 버린 엘리자베스의 무릎에서 눈을 털어 주며 말했다.
벨벳으로 만들었다 해도 잠옷은 잠옷, 둥근 무릎과 늘씬한 다리가 짙은 색으로 젖은 천 아래로 실루엣을 드러내고 있었다.
“빠, 빨리 들어가자.”
정작 자신은 장갑이며 코트며 할 것 없이 눈과 흙에 엉망이 된 주제에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 바람에 그는 엘리자베스의 얼굴 위로 스친 표정을 보지 못했다.
"레온하르트 황태자 전하."
"으, 응?"
작고 하얀 손이 그의 목덜미를 잡아 당겼다. 레온하르트의 손이 허공에서 우뚝 굳었다. 그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휘둥그레졌다.
“누... 눈 감아.”
숨이 벅찰 때까지 입술만 도장을 찍듯 꾹 누르고 있던 주제에.
엘리자베스는 귀 끝까지 빨갛게 달아올라 수줍은 목소리로 말했다.
레온하르트는 잠시 고민하다, 아무도 없다는 것을 재차 확인하자 그녀를 번쩍 안아 올렸다.
“꺄악!”
"하던 거, 마저 하기 전까지 내려 주지 않을 거니까.”
엘리자베스의 무릎 아래로 굵은 두 팔이 얽혔다. 얼떨결에 레온하르트의 어깨를 손으로 짚은 엘리자베스는 화들짝 놀란 얼굴로 눈만 깜빡였다.
"다... 다 했는데?"
“그럼 눈은 왜 감으라고 한 거야?"
"그야... 소설이나 연극에선 다들 눈을 감고....”
"눈을 감고?"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레온하르트의 눈이 초승달처럼 가늘게 휘었다.
엘리자베스의 머릿속에선 그동안 읽었던 책과 부채 너머로 속닥거렸던 이야기 따위가 뭉게뭉게 구름처럼 퍼지기 시작했다.
“눈을 감고... 그리고... 그리고....”
이대로 뒀다간 갑작스러운 봄을 맞이한 꽃봉오리처럼 펑! 하는 소리를 내며 터지는 게 아닐까.
레온하르트는 장난기를 거두고 진지한 눈빛으로 엘리자베스를 응시했다.
"엘리자베스, 리지.”
"으응...."
"눈 감아.”
엘리자베스는 그가 시키는 대로 얌전히 눈을 감았다.
눈이 내리는 소리가 얼핏 들린 것 같았다.
겨우살이 위로 눈송이가 사뿐 내려앉았다.
숨, 쉬어야지.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저 멀리 오로라가 보인다는 머나먼 북쪽 나라에서 온 바람인 듯 멀게만 들렸다.
레온하르트의 어깨를 꼭 쥐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웃으며 그녀가 자신의 뜻을 알아차릴 때까지 짧은 키스만 반복했다.
병아리가 부리로 콕콕 쪼는 것 같기도 하고, 그때마다 벼락이 내리꽂히는 것 같기도 했다.
숨을 쉬기 위해 입을 벌린 순간 다시 그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엘리자베스는 그만 눈을 감아 버렸다.
차단된 시각을 대신해 딱 그만큼 다른 감각이 예민해졌다.
숨을 쉬면 그때마다 레온하르트 특유의 서늘한 향기가 느껴졌다.
몸을 움직이면 그와 맞닿다시피 한 심장이 마구 뛰는 것이 두꺼운 옷 너머로 선명하게 느껴졌다.
눈이 녹을 법한 날씨도 아니건만 젖은 소리가 들렸다.
쉼 없이 반짝이는 별을 그대로 삼킨 듯, 혹은 매일 모습을 바꾸는 달을 삼킨 듯.
혀가 아릴 정도로 달콤한 순간이었다.
"어... 어... 어....”
"어떻게? 어째서? 어느 쪽이야?"
한참 뒤에야 땅으로 다시 내려온 엘리자베스는 레온하르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조금 전까지 마구 깨물리고, 잇자국이 남은 곳마다 혀끝으로 건드려졌던 아랫 입술이 화끈거렸다.
아니,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이대로 있다간 주위의 눈이 폭삭 녹아버릴 것 같았다.
무릎이 달달 떨려 그대로 주저앉을 것 같은 자신과 달리 눈앞의 황태자 전하께선 뻔뻔할 정도로 멀쩡하게 서 있었다.
“리지, 나 너보다 두 해는 먼저 어른이 됐거든?"
"그... 그.... 그....”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그러면 어디서 배우기라도 했냐고? 그 말은 내가 너 말고 다른 사람을 붙잡고 실습이라도 했냐고?"
엘리자베스의 고개가 마구 위아래로 흔들렸다.
달은 웃음기를 감추기 위해 구름 한 조각을 덮었다.
“나한테는 오직 너밖에 없어. 책에 이런 구절이 있었지? '별들이 불덩이임을 의심하고, 태양이 움직임을 의심하고.' 그다음이... 그러니까..."
“지... 진실이 거짓이라 의심해도...?"
하얀 입김이 그녀의 달아오른 얼굴을 잠시 감춰 주었다.
행여 내 사랑만은 의심 마오.
문장의 마지막 구절은 그의 입술을 타고 춤을 추는 것처럼 그녀의 입술 바로 위에서 쏟아져 내렸다.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해도... 너를 평생 속인다 해도... 내 사랑만큼은 의심하지 말아 줘.’
그 책의 결말이 어떻게 끝나더라? 분명 희극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내 이야기가 희극이 아니어도 좋아. 엘리자베스, 당신의 이야기 속에서 나는 그저 조연에 불과하다 한들 그것으로도 나는 충분히 만족해. 그러니 내 사랑, 너는... 네 이야기만은... 부디 세상에서 다시없을 만큼 즐거운 희극으로 만들어 줘.'
“잘, 잘 자.... 그... 음... 아, 선물. 선물 고마워. 그러니까... 어...."
아직까지 정원에서 있었던 일로 눈앞이 핑핑 도는데, 빨리 침대에 엎어져 숨이라도 좀 몰아쉬고 싶은데.
그렇게 만들어 놓은 당사자는 얄미울 정도로 평온한 얼굴을 한 채 얌전히 문을 닫고 돌아서는 대신 문가에 기대서 있었다.
"나는 안 해 줘?"
"뭐, 뭐를!”
저도 모르게 큰 목소리를 낸 엘리자베스가 뒤늦게 입을 손바닥으로 가렸다.
레온하르트는 자신의 입술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엘리자베스는 동그란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나 추워. 내일은 아침부터 바쁠 건데 이대로 재우지 않을 생각이야?"
그 말에 엘리자베스는 레온하르트의 옆구리를 꼬집더니 그의 얼굴을 양손으로 붙잡았다.
쪽.
원하는 것을 얻은 레온하르트는 싱글벙글, 발걸음마저 즐겁게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닫힌 문 앞에서 주르륵 미끄러지듯 주저앉은 엘리자베스는 한참 동안 입술만 만지작거렸다.
'아, 아! 목도리!'
문득 목이 허전한 느낌에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던 엘리자베스는 정원에 목도리를 두고 온 것을 뒤늦게 깨닫고 당황했다.
'사람들이 알면 어쩌지...?'
따스한 침대 속에서 한참 이리 뒹굴, 저리 뒹굴, 발도 동동거려 보고 엎드렸다 옆으로 누웠다 둥글게 몸도 말아 봤지만 도저히 잠이 오질 않았다.
'진실이 거짓이라 의심해도... 행여 내 사랑만은 의심 마오....’
광인을 연기하던 와중에도 사랑하는 연인에게만은 자신의 진심을 전하기 위해 쓴 편지를 받았던 아가씨는 어떻게 됐더라?
엘리자베스는 그날 밤 푸른 강처럼 지평선 저 멀리까지 만개한 수레국화 꽃밭 아래로 풍덩 가라앉는 꿈을 꿨다.
* * *
정원에서 발견된 목도리와 아침까지 사라지지 않고 고스란히 보존된 발자국에 대해 시녀장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추궁하는 대신 진지한 어투로 직언을 올렸다.
"황태자 전하, 그리고 레이디 엘리자베스. 두 분께서 벌써부터 황제 폐하와 황후 마마를 닮아가는 모습은 무척 보기 좋습니다만 두 분의 결혼식까진 아직 한 달도 넘게 남았습니다. 팔삭둥이 후계자가 태어나는 일은 없겠지요?"
레온하르트는 유난히 자신을 노려보는 시녀장의 눈빛에 마구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자베스 또한 바닥만 푹 노려보며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휴우, 그럼 됐습니다. 제가 왜 바쁘신 분을 붙잡고 이런 말을 하는지는 잘 아시리라 믿겠습니다. 전하께선 어서 폐하께 가 보시고, 레이디 엘리자베스도 황후궁으로 가시죠."
레온하르트와 엘리자베스는 굳이 멀찍이 떨어져서 걸었다.
등 뒤에서 시녀들이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레온하르트는 마냥 즐겁고 좋았다.
절대, 절대로 아침 식사 전 졸음에 겨워 가까스로 반만 눈을 뜨고 있던 그녀의 볼에 가벼운 키스를 남겨서 그런 건... 맞았다.
"얼굴을 보아하니 아주 둘이 이대로 뒀다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겠구나. 네가 황태자 궁을 나갈 테냐, 아니면 얌전히 새아가를 내놓을 테냐?"
라고 아바마마께서 말씀하시기 전까진.
당연히 레온하르트는 반발했다. 다른 것도 아니고, 고작 밤에 프로포즈 하며 키스 한 번 했다고 처소를 옮긴다니!
“아바마마와 어마마마의 국혼이 왜 그렇게 후다닥 진행됐는지 제가 모를 줄 압니까? 기념 초상화에 보이진 않지만 저도 있다는 것, 이젠 저도 압니다!"
“이놈이...? 그 태도를 보아하니 더욱 괘씸해서라도 레이디 엘리자베스의 처소는 황후궁 바로 옆으로 옮겨야겠구나! 오늘 네가 할 첫 번째 일이다. 처소를 옮긴다는 공문은 네가 쓰거라.”
"그럼 아바마마는요?"
“기쁜 마음으로 승인한다는 서명을 해 주마!”
"크아아악! 싫습니다! 바로 복도 건너편에 있는 사람을 뻔히 보고만 있는 것도 괴로워 죽겠는데 아예 저 멀리 떨어트려 놓으시겠다고요? 차라리 저를 폐위시키고 아일라를 황제로....”
“우리 황녀님에게 그런 어렵고 힘들고 더러운 일을 시킬 수는 없지!"
“...그건 그렇지만, 아니. 그럼 아일라는 안 되고 저는 괜찮다는 겁니까?"
"네놈은 이미 다 컸지 않느냐. 저번에 페리안 공자와 함께 쓴 보고서를 보니 어렵고 힘들고 더러운 일에 아주 적성이던 것 같던데, 왜. 일주일 더 앞당겨 주랴?"
"아바마마!”
결국 레온하르트가 죽는소리를 내었다.
어떻게 된 분이 날이 갈수록 점점 젊어지다 못해 이제 갓 스무 살을 넘긴 아들과 함께 유치해지려고 하신다.
'그래도... 그때처럼 추한 모습으로 가시진 않으셨으니 다행이지만....'
어렵고 귀찮고 때론 손을 더럽혀야 하는 공문서는 몽땅 아들에게 밀어 놓고, 정작 자신은 희희낙락 어린 황녀님을 위해 새로 놀이터를 만들라는 등 그런 일만 하는 모습에 레온하르트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아니, 웃을 때가 아니지. 리지의 처소를 옮긴다고? 안 돼. 절대 안 돼!'
황제는 허허롭게 웃고 있던 레온하르트의 표정이 다시 싸늘해지는 것을 보며 히죽 웃었다.
슬쩍 건드리기만 할 생각으로 꺼낸 말이 의외로 효과가 좋았다.
'진작 알았더라면 예전부터 써먹는 것인데!'
그의 앞으로 외교 관련 문서를 슬쩍 떠넘기며 황제는 레온하르트가 하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봤다.
황후에게 물려받은 금빛 머리칼과 자신이 준 제비꽃빛 눈동자.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행동하는 모습까지 어쩜 저렇게 쏙 빼닮았을까.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습니까?"
"아비가 아들 얼굴 좀 본다는 데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
"리지가 보는 것 아니면 닳습니다.”
“허, 그놈 참.”
황제는 혀를 차면서도 내심 흐뭇하고 기특한 눈빛으로 그가 어려운 외교 문제를 앞두고 고심하는 모습을 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