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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폐하가 시곗바늘을 되돌린 사연-100화 (100/130)

100화 프로포즈

황궁 밖으로 나선 레온하르트는 곧바로 고급 상점가로 향했다.

"당장 '그것' 내놔!”

리아는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험악한 목소리로 명령하는 손님 앞에서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대관식에 사용될 보석을 세팅하느라 장인들은 모두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 '그것'... 이라니요?"

무슨 물건을 맡겨 놓으셨나? 하지만 그런 손님이 오실 거라는 예정은 없었는데?

리아는 손님에게 차를 내오며 혹시 잊은 예정이 있던 건 아닐까 다시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오늘의 예약 일정은 텅 비어 있었다.

예의 대관식 일정으로 인해 모든 예약이 취소된 덕분이었다.

예약 취소는 기본에, 들리는 손님은 적당히 상대하고 돌려보낼 것.

이것이 오늘 리아가 해야 할 일이었다.

"당장 오너에게 말해. 트리스탄이 왔다고.”

"네, 네? 하, 하지만 오너께서 오늘 일반인 손님은....”

"가서 말하기나 해!"

“히익! 알겠습니다!”

리아는 도망치듯 뛰어 오너에게 향했다.

잠시 뒤 레온하르트는 품 안에 작은 상자를 안고 헐레벌떡 뛰어오는 보석상의 오너를 마주할 수 있었다.

"그... 아까 소리친 건 사과하지. 너무 급해서 눈에 보이는 게 없었거든."

무서운 손님이라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친절한 사람이었다. 리아는 저도 모르게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닙니다! 저는 괜찮으니 걱정하지 마시고, 아! 안쪽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리아, 가서 일 보거라.”

“오너....?"

리아는 입사 이후 처음 보는 오너의 얼굴에 고개만 갸웃거렸다.

'트리스탄, 트리스탄... 설마?'

유리 진열대 위를 마른걸레로 닦던 리아의 손이 멈췄다.

트리스탄이라는 이름과 유난히 반짝이던 자수정빛 눈동자, 그리고 하얗게 질린 오너의 얼굴.

'설마 황태자 전하를 만난 거야?'

세상에! 맙소사! 나에게도 이런 일이 생기다니!

리아는 오늘 있었던 일을 꼭 엘리에게 말해 주겠다고 결심하며 황태자 전하와 오너가 들어간 밀실만 연신 힐끔거렸다.

“주문하신 물건입니다. 확인해 보시지요."

오너는 그렇게 말하며 상자를 열었다.

녹이 슨 청동처럼 오묘한 푸른빛의 상자 속엔 하얀 쿠션이 깔려 있었다.

쿠션 사이에 끼워져 있는 건 한 쌍의 반지였다.

다이아몬드 특유의 광채를 가장 잘 살려 주는 라운드 브릴리언트 컷.

불순물 하나 보이지 않는 최고 등급의 투명함.

무색이라는 말 외에는 어울리는 단어가 없는 맑은 색까지.

최상급 다이아몬드 중에서도 특별히 고르고 고른 다이아몬드라며 오너가 자부심을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얇은 은사를 실처럼 꼬아 덩굴처럼 엮은 링 사이사이엔 푸른 사파이어와 자수정이 열매처럼 박혀 있었다.

“나쁘지 않군.”

“그야 전하의 안목이 워낙 높으신 덕분이죠.”

상자를 품에 잘 갈무리하며 레온하르트는 피식 웃었다.

반지에 이어 오너는 다음 상자를 열었다.

상자 속에 있는 건 푸른 장미와 제비꽃이 함께 있는 액자였다.

“이만한 등급의 원석을 구하느라 제법 애를 먹었습니다.”

"그야 당연하지. 황실의 소유물을 황가의 허락 없이 어떻게 손에 넣겠나?"

이번엔 오너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보석을 잘게 갈아 물감 대신 책을 장식하듯 하얀 액자 속에는 보석으로 만든 꽃 두 송이가 박혀 있었다.

“....리지가 좋아할까?"

“솔직하게 말씀드릴까요?"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디께는 이런 보석보단 겨울에도 피는 꽃 한 송이가 더 어울릴 겁니다.”

"크흠!”

머쓱한 표정으로 레온하르트는 액자만 노려봤다.

자수정, 사파이어, 아쿠아마린, 토파즈, 에메랄드와 산호, 제이드, 그리고 꽃 그림자를 장식한 오팔까지.

전부 최고 등급의 보석이었다.

가게를 나선 레온하르트는 곧바로 황궁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의 발걸음은 처소가 아닌 황후의 정원으로 향했다.

“장미, 은방울꽃, 제비꽃, 수레국화, 물망초. 이 중 뭐가 있지?"

“저... 전부 있습니다만....”

온실 속에서 꽃에 물을 주고 있던 정원사는 물뿌리개의 물이 화분에 넘치다 못해 자신의 발등을 적시고 잊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더듬더듬 대답했다.

“역시 어마마마의 정원이야. 그것들을 섞어 꽃다발을 만들어 줘.”

"예? 꽃다발은 갑자기 어쩐 일로....”

"아니, 아니다. 그 꽃의 씨앗을 줘."

정원사는 의아한 표정으로 눈만 깜빡이면서도 그의 말대로 움직였다.

“어디에 쓰실 예정인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씨앗 주머니를 품에 안은 레온하르트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프로포즈.”

* * *

막 잠자리에 들려던 엘리자베스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카디건을 걸치며 대답했다.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온 건 레온하르트였다. 그런데 그가 입고 있는 옷이 조금 이상했다.

“....레온, 왜 잘 시간에 예복을 입고 있어?"

뒷짐을 쥔 채로 서 있던 레온하르트는 목을 가다듬고 엘리자베스에게 늦은 밤 데이트를 신청했다.

“리지, 잠시만 시간을 내어 주겠어?"

“어... 으응... 나도 옷을 갈아입는 편이 나을까?"

지금 당장 황태자궁을 나서면 마차가 준비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응? 아, 아니. 꼭 그럴 필요는 없는데... 멀리 가는 거 아니야. 그냥 잠깐 정원 산책을 좀....”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카디건 대신 제법 도톰한 코트와 장갑, 그리고 목도리를 챙겼다.

"리지?"

엘리자베스는 목도리 두 개를 하나로 매듭지어 묶더니 한쪽은 레온하르트의 목에, 다른 쪽은 자신의 목에 칭칭 감았다.

“...목이 추워 보여서.”

레온하르트는 쿡쿡 웃으며 그녀를 정원으로 안내했다.

그의 사춘기 시절 화풀이 대상이 되어 잘려 나갔어야 할 나무는 이제 완전히 고목이 되어 앙상한 가지만 남아 있었다.

그러나 마른 가지 위로 함박눈이 내리며 커다란 눈송이가 달라붙자 나무는 꼭 하얀 꽃이 핀 것처럼 화사하게 보였다.

“여기는... 왜?"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의 목 위로 목도리를 벗어 둘둘 감아 주었다.

“웃, 웃지 마! 기껏 감아 줬는데. 대체 무슨 일이야?"

목도리에 어깨까지 돌돌 말린 엘리자베스가 얼굴을 붉혔다.

레온하르트는 대답 대신 하늘을 올려다봤다.

'음, 별 좋고. 달도 좋고, 눈도 완벽하고.’

“씨앗 심기 좋은 날이지?"

“씨앗?"

아까부터 알 수 없는 말만 하는 레온하르트의 태도에 엘리자베스의 이마 위로 작은 주름이 생겼다.

레온하르트는 씩 웃으며 눈 덮인 설원 위로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옷이 더러워지는 것도 마다 않고 맨손으로 눈을 걷어 내더니 단단하게 얼어붙은 땅을 파내기 시작했다.

"레온! 장갑, 장갑이라도 끼고 해! 아닌 밤중에 씨앗 심기는 대체 뭐고 데이트는 무슨.”

"엘리자베스.”

이 정도면 되겠지.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에게 주머니 속에 있던 씨앗 주머니를 내밀었다.

“무슨 꽃이 필지 궁금하지?"

“이런 겨울에 심어도 필 리가....”

“피워 내자.”

엘리자베스는 눈만 깜빡였다.

“우리가 같이 피워 내자. 그리고 어떤 꽃이 피는지 직접 눈으로 확인하자. 그러고, 그 꽃이 질 즈음 씨앗을 받아다 다시 심고, 또 피워 내고, 또....”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의 손에 씨앗 주머니를 쥐여 주며 달처럼 부드럽게 웃었다.

"그렇게 평생, 나와 함께 봄을 맞이해 주겠어? 엘리자베스 이졸데 폰 엘리시움."

레온하르트의 화사한 금빛 고수머리가 나붓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렸다.

그의 자색 눈동자는 엘리자베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그가 무슨 말을 한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매년 봄을... 봄을... 꽃을.... 함께?'

엘리자베스는 멍한 표정으로 손바닥에 올려진 씨앗 주머니만 내려다봤다.

그사이 레온하르트는 품 안을 뒤져 반지 상자를 꺼냈다.

“엘리자베스, 앞으로 당신이 걸어갈 길을 저 또한 함께 걸어도 되겠습니까?”

엘리자베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반지가 어떤 모양인지, 어떤 보석이 박혀 있는지, 또 씨앗은 어떤 꽃의 씨앗인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레온이... 나에게... 프로포즈를 했어...?'

그녀의 어머니는 누군가 그녀에게 프로포즈를 하는 일 따윈 일어나지 않을 거라 말했다.

그러나 열 살의 레온하르트는 그녀에게 곁에 있어 달라고 고백했다.

그리고 다시 십여 년이 지난 지금.

이미 결혼식 날까지 정한 주제에 레온하르트는 다시 한번 자신을 받아 줄 수 없겠냐고 묻고 있었다.

긴 대답은 필요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마구 고개를 끄덕이며 레온하르트를 끌어안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고백을 받으면 울기만 하는구나 싶어 문득 쓴웃음이 나왔다.

“어, 얼마든지. 얼마든지! 아니, 같이 걸어 줘. 레온이 아니면 안 돼. 레온이 걷는 길을 나도 함께 걷게 해 줘. 레온이 그랬지? 내가 행복하면 레온도 행복하다고. 그러면 나를,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줘. 그래서 레온도 평생 행복하게. 나랑 평생 행복하게 살아 줘!"

엘리자베스는 레온하르트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대며 소리쳤다.

“레온하르트 트리스탄 폰 에스페도르 황태자 전하, 저와 결혼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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