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평생을 함께하리란 약속(3)
레온하르트의 예상대로 한 침대에서 나란히 머리 위로 까치집을 올린 모습으로 일어난 두 사람을 본 시녀장은 어처럼 입만 벙긋거렸다.
밤새 레이디 엘리자베스가 사라졌다는 말에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였다.
엘리자베스가 그녀의 전담 시녀들과 다소 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레온하르트 또한 시녀장 앞에서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갖은 수를 써야 했다.
'베일리 놈, 왜 하필 개라서 말도 못 하고...!'
“정말 손만 잡고 잤다니까? 아니, 손도 못 잡았다니까? 스무 해가 넘도록 나를 보면서 내 말을 그렇게 못 믿겠어?"
“정말이지요? 제가 정말로 전하를 믿어도 되는 거겠지요?"
“그렇게 의심되면 리지에게도 물어보든가!”
“두 분이서 입을 맞추셨는지 제가 어떻게 압니까!”
“그러니까 아무 일도 없었다니, 아니. 그 입이 아니라 그 입이었나? 하여튼 간에!”
베일리는 아침부터 유난히 시끄럽다고 생각하며 입을 벌리고 하품만 쩍쩍 해댔다.
황태자궁에서 벌어진 작은 소란이 끝나기가 무섭게 황제가 두 사람을 불렀다.
레온하르트와 엘리자베스는 혹시 어젯밤 한 이불을 덮고 잔 일로 잔소리를 듣는 건 아닐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황제와 황후가 기다리고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거라.”
“어젯밤은 즐거웠니?"
"어마마마!”
엘리자베스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얼굴만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오라버니, 나 안아조.”
황제의 품에 안겨 있다 아장아장 그의 곁으로 다가온 아일라가 혀 짧은 발음으로 졸랐다.
레온하르트는 익숙하게 그녀를 한 팔로 안아 올렸다.
순식간에 다시 시야가 높아진 아일라가 꺄아, 하며 까르륵 웃었다.
“일단 자리에 앉거라. 아일라, 오라버니 너무 괴롭히지 말고.”
“저는 괜찮습니다. 그보다 하실 말씀 이란 게....”
무릎 위에 아일라를 앉힌 레온하르트가 설마 하는 심정으로 황제를 돌아봤다.
“내년부턴 네가 황제 해라.”
내년부턴 네가 이 동네 대장 하라는 투로 황제는 툭 내뱉었다.
그의 곁에 앉아 있던 황후 또한 이미 결심을 마쳤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내년... 내년까지 앞으로 한 달도 안 남은 건 아시지요?”
“짐도 황위 물려받을 때 이런저런 사정으로 정신이 없었지. 그때 황후가 없었다면 정말 버티기 힘들었을 거야.”
“저야말로 폐하가 계셨기에 그 시기를 견딜 수 있었는걸요."
“황후....”
"으흠, 흠. 그, 아바마마. 혹시 일부러 급하게 날짜를 잡으신 건 아니지요? 신년 축하 연회며 이런저런 대신들의 인사며 온갖 잡다한 업무들이 귀찮아서 저에게 황제로서의 의무를 떠넘기시는 건 아니겠지요?"
"우리 황태자가 저래 보여도 머리는 좋다니까.”
"잔꾀 부리는 머리만 좋은 게 아니라요?"
레온하르트는 쩌릿쩌릿한 뒷덜미를 붙잡고 끄으응, 앓는 소리만 냈다.
"오라버니, 어디 압파?"
“...아일라. 너는 아바마마 닮지 마. 무조건, 무조건 어마마마 닮는 거다. 알았지?"
아일라는 손가락을 깨물며 고개만 갸우뚱거렸다.
“저어... 아무리 그래도 올해 안에 즉위식을 올리는 건 너무 무리한 일정이 아닐까요?"
“무리한 일정이다마다.”
“그런데 어째서 굳이... 지금처럼 나라 안팎으로 모두 평온한 시대에 왜 일부러 무리한 일정을 진행하시려는 건지 두 분의 뜻을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엘리자베스의 주눅 든 목소리에 황후는 자애롭게 웃으며 황제의 손을 꼬옥 붙잡았다.
“원래 부부 사이라는 것이 고난과 역경을 함께 헤쳐 나가며 더욱 돈독해지는 법이란다. 우리 아가라면 충분히 잘 할 수 있어.”
“하지만 황후마마....”
"그만. 이미 짐과 황후는 결론을 내렸다. 어떻게 보면 짐이 황제로서 마지막으로 내리는 명령인 만큼 두 사람은 아무 말 말고 따르도록.”
황제의 일방적인 선언에 레온하르트와 엘리자베스는 서로 얼굴만 쳐다봤다.
* * *
“정말이지, 아바마마께선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벌이신 건지!"
“딱 전하의 아버지 되시는 분이 하실 법한 생각이시네요.”
“미미르!"
“하아... 많이 복잡하겠지요? 그 과정을 언제 다 외운담. 일리시스, 혹시 괜찮으면 선언문 외우는 것 좀 도와줄래요?"
“저... 저야 언제든지 말씀만 하시면...."
모처럼 시계탑에 모인 네 사람은 기껏 우린 홍차가 식는 것도 모르고 이번 사태에 대해 저마다 다른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비단 황궁뿐일까, 갑작스럽게 내려온 황제의 명령에 비명을 내지르는 건 황궁 밖, 도로테아의 작업실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를 죽이시려는 게 분명해!"
도로테아는 죽는 소리를 내며 그동안 엘리자베스의 대관식과 결혼식을 생각하며 그려 둔 스케치를 몽땅 꺼내 왔다.
엘리자베스가 황후의 관을 쓰는 날,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그날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은 분명 자신이 만든 걸작 중의 걸작일 것이라고 내심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렇게나 빨리 그날이 올 줄이야!
“내가 옛날이야기 속에 나오는 요정 대모라도 되는 줄 아시는 모양인데!"
씩씩거리며 도로테아는 스케치북을 넘기고 다시 드레스를 디자인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기대를 하시면! 그 기대에 부응해 드려야지!”
결국은 하신다는 말씀이잖아요. 엘리는 입술을 삐죽이며 도로테아의 책상 위에 마구 흩어져 있던 스케치를 갈무리했다.
“두 분께서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아무렴 황궁만 할까요?"
도로테아는 이마에 손을 짚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어휴... 잠시 쉬어야겠다. 아주 봄이 되기 전에 따스한 남부 지방의 황후마마 고향으로 가실 모양이야.”
“저런, 그럼 아일라 황녀님의 옷도 새로 만들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네가 만들어라! 네가! 그렇지 않아도 눈앞이 캄캄한데 퍽이나 황녀님 옷까지 신경 쓸 여유가 있겠다!"
“제가 만들어도 되는 거예요?"
도로테아는 그만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엘리 또한 제 딴에는 농담으로 한 말이 통하지 않자 뾰로통한 표정으로 입술만 삐죽 내밀었다.
“...너, 가서 이번에 새로 들어온 아이들 전부 불러오거라.”
“새로 들어온... 아, 학교에서 온 애들요?"
도로테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 한마디에 수석 재봉사부터 바로 어제 직업 학교에서 실습을 나온 아이들까지 모두 모였다.
“나도 방금 들은 소식이지만, 황태자 전하께서 올해 안으로 황위를 이어받으시게 되었다.”
그녀의 말에 직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새로운 황제와 황후가 될 이들의 의복을 마련하는 일이 하루 이틀 만에 끝날 리 없었다.
“즉위식과 함께 결혼식도 진행하실 모양이니 당분간 다들 죽었다 생각하고 일하거라.”
곳곳에서 앓는 소리와 끔찍한 비명이 들렸다.
'그래도 직업 학교에서 온 애들이 있어 조금 낫다.'
'우리끼리였어 봐, 급하게 다른 재단실의 사람들까지 비싸게 고용해야 했을걸?'
'그래도 저 애들이 제대로 일할 수 있을까?'
'왜, 그래도 바늘에 실 꿰는 법은 알고 있던데.’
“다들 조용! 아무튼 그렇게 됐으니... 다들 힘내 보자. 상복까지 동시에 작업하는 것보단 낫잖니?"
그녀의 말에 직원들이 어쩔 수 없다는 투로 고개를 끄덕이고 피식 웃었다.
손짓으로 엘리를 부른 도로테아는 그녀에게 이 소식을 황실에 납품하는 가게에 알리고 오라는 심부름을 시켰다.
보석상, 구둣방, 기타 최고급 잡화점 등등.
“.....리아?"
"엘리! 오랜만이야!”
“네가 왜 여기 있어?"
엘리는 몇 번 마주친 적 있던 직원이 아닌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이 나오자 눈만 껌뻑였다.
“응? 내가 말 안 했나? 나 학교 졸업하고 여기서 일하고 있는데.”
그 말대로 엘리의 소꿉친구는 그럴듯한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지금은 간단한 접객 업무가 다지만, 얼마 안 가 여기서 제일가는 직원이 될거니 두고 봐! 그나저나 여긴 어쩐 일이야? 재단실에서 일하는 거 아니었어?"
“아, 그렇지 않아도 그 일 때문인데...."
헛간 그림자에 몸을 숨기고 비밀 이야기를 하던 때처럼 엘리와 리아는 서로 머리를 맞대고 소곤거렸다.
“뭐어? 그게 정말이야? 세상에, 오늘 집에 돌아가면 바로 어머니께 말씀드려야겠어.”
"그럼 나는 다른 공방도 마저 들려야 해서, 이만 가 볼게!"
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이 소식을 사장님께 전달해야 했다.
딸랑거리는 종소리와 함께 닫히던 문이 다시 열리더니 엘리의 얼굴이 빼꼼 삐져나왔다.
“엘리?"
"음, 으음....”
엘리는 한참을 주저하더니 리아를 향해 환하게 웃어 보였다.
“졸업 축하해! 그리고 취업도! 첫 월급 나오면 맛있는 것 먹으러 가자!"
그리고 가게 문이 완전히 닫혔다.
리아는 쑥스러운 마음에 괜히 유니폼의 소맷자락만 잡아당기다, 방금 친구가 들려준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다음 날, 레온하르트는 신문 제1면을 장식한 소식에 한숨을 내쉬며 황제의 집무실이 있을 본궁을 노려봤다.
'뭐... 나라 안팎으로 시끄러운 데다 축하보단 위로나 조롱의 의미로 온 외교 사절단 사이에서 즉위식을 올리는 것보다야 훨씬 낫다만....'
엘리자베스가 걱정이었다.
오늘부터 그녀는 본격적인 황후 수업을 받을 예정이었다.
아침 일찍부터 황후궁으로 간 엘리자베스는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레온하르트는 작은 잔을 마저 비워내고 신문을 접어 테이블 위로 올려 두었다.
“응? 야! 베일리! 그거 너 가지고 놀라고 둔 거 아니야!”
베일리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신문을 입에 물었다.
“오라버니!”
도도도, 작은 발소리가 들리고 노란 병아리 같은 황녀님이 그의 방으로 불쑥 들어왔다.
“멈머!”
아일라는 레온하르트와 신문을 두고 씨름하고 있는 베일리를 보더니 한달음에 달려갔다.
"아일라, 베일리는 이제 늙어서 너랑 놀아 줄 체력 없어.”
"멍!”
베일리는 그 말에 반박이라도 하듯 크고 우렁차게 짖으며 아일라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어마마마께 들었어요. 오라버니, 리지 언니랑 결혼해?"
“어? 응. 아일라도 올 거지?"
"우웅....”
아일라는 버릇처럼 손가락을 입에 물고 고민에 빠졌다.
그러더니 곧 레온하르트의 머리를 순간 멍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오라버니, 리지 언니한테 프로... 프로... 프로포즈! 그거 했어요?"
"프로포즈?"
레온하르트는 저도 모르게 손에서 신문을 놓쳤다.
베일리는 마음껏 신문을 물어뜯으며 아일라의 허리를 까맣고 축축한 코로 툭툭 건드리기 시작했다.
2년 전 태어난 아주 작은 친구가 조금은 거친 손길로 자신의 목덜미를 붙잡으며 꺄아, 까. 즐거운 소리를 냈다.
“베일리 힘드니까 올라타는 건 그만둬, 아일라. 응? 착하지?"
"히잉....”
"너는 베일리한테 오빠가 아니라 삼촌이라 불러야 해.”
"왜요?"
“개와 사람의 시간은 다르게 흘러가거든.”
"다르게...?"
아일라는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사이 레온하르트는 베일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프로포즈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프로포즈... 프로포즈라.... 전생에서도 해 본 적 없는 일이었는데.... 아니, 어차피 결혼하기로 다 정해졌는데 굳이 허락받을 필요가 있... 구나! 그걸 주지 않다니! 레온하르트 이 멍청이! 바보!! 얼간이! 머저리!'
"오라버니?"
"베일리, 아일라 응석 적당히 받아 줘. 아일라, 오라버니 잠시 나갔다 올게.”
레온하르트는 그 길로 코트를 챙겨 황궁 밖으로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