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평생을 함께하리란 약속(2)
황태자궁을 담당하는 이들도 추위에 주춤하며 잠시 몸을 녹이러 간 사이, 긴 회랑을 호다닥 건너가는 그림자가 있었다.
도톰한 벨벳 잠옷 위로 캐시미어 숄 하나를 걸친 엘리자베스는 주위를 살피며 레온하르트의 방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역시나, 꼭 그녀가 올 것을 미리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문은 열려 있었다.
살금살금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레온하르트의 방문 앞에 앉아 있던 엘리자베스가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문고리를 잡고 있던 레온하르트는 못 말리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냉큼 그녀를 방 안으로 들였다.
고작 그 짧은 순간에 차가운 겨울바람이 훈훈한 공기로 가득 차 있던 황태자의 처소로 몰래 잠입했다.
“리지 너... 아직 결혼도 안 한 성인 여성이 약혼자 방에 이런 식으로 냉큼 찾아왔다가 구설수에 오르기라도 하면 대체 어쩌려고 이러는 거야?"
그러나 정작 그렇게 말하는 레온하르트의 얼굴에도 미소가 가득했다.
그의 보폭으론 두어 걸음이면 충분할 정도로 짧은 거리 너머에서 찾아온 귀한 손님이 혹시라도 감기가 들까 봐 레몬을 띄운 뜨거운 차를 주며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와 마주 앉았다.
호로록. 평소의 우아하고 기품 있는 모습은 어디로 가고 눈시울에 장난기만 가득 매달려 있는 엘리자베스가 일부러 소리를 내며 잔을 기울였다.
“...뜨거워.”
"천천히 마셔. 입천장 데겠다. 오늘은 천둥도 번개도 없는데 무슨 일로 찾아 오셨을까?"
의자를 거꾸로 뒤집어 앉아 등받이 위로 턱을 괸 채로 레온하르트가 물었다.
손안의 온기를 즐기고 있던 엘리자베스는 그제야 생각났다는 투로 질문했다.
“레온, 레온이 보기에 나는 행복해?"
그 말을 들은 레온하르트는 아슬아슬하게 턱을 대고 있던 등받이에서 그대로 주르륵 미끄러졌다.
“...괜찮아?"
엘리자베스가 놀란 토끼 눈이 되어 그를 걱정했다.
괜찮냐고? 레온하르트는 혀를 깨물었다.
전혀 괜찮지 않았다. 그동안 그녀와 함께한 10여 년이 그 질문 하나로 아무것도 아닌 헛고생으로 돌아간 것 같은 끔찍한 절망감에 눈앞이 캄캄했다.
“그... 리지. 슬슬 네가 또 처소에서 사라졌다는 걸 알고 한바탕 소란이 벌어지기 전에 그만 돌아가는 편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제 와서 무슨?”
문제가 있어. 그것도 아주 아주 큰 문제가. 레온하르트는 가까스로 웃는 얼굴을 유지하며 소리 없이 중얼거렸다.
“흐응... 레온은 내가 싫다고 하면 안 할 거잖아?"
“뭐, 뭘?"
'정말 미쳐 버리겠네.”
그가 보기에 자기가 행복하냐는 질문으로 지난 10여 년을 흔들어 놓은 엘리자베스는 이제 그의 마음마저 흔들어 놓고 있었다.
의자 등받이 뒤로 몸을 숨긴 레온하르트는 눈을 꼭 감고 테이블 너머 엘리자베스가 자신에게 있어 어떤 존재인지 다시 상기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사랑스럽고, 아름답고, 걸을 때면 꽃향기가 나고, 품에 안으면 종소리가 들리고, 입을 맞추면... 때려치우라지!
"리지, 너는 나를 늘 죄인으로 만들어."
엘리자베스는 등받이 너머로 숨겨지지도 않는 커다란 덩치를 억지로 구겨넣듯 얼굴을 가리고 끙끙거리다 활짝 웃으며 그렇게 말하는 레온하르트를 보고 혹시 그가 감기에 걸린 건 아닐까 걱정했다.
가까스로 이성을 되찾고 엘리자베스와 마주 앉은 레온하르트는 어렵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엘리자베스, 행복은 다른 누군가가 정해 주는 게 아니야. 이런 추운 날 몸을 녹일 스튜 한 그릇과 온기를 대접받은 거지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부인을 잃은 귀족 중 누가 더 행복할 것 같아?"
“그야 당연히 거지... 아닐까?"
"하지만 바로 다음 해에 거지는 동사하고, 귀족은 새 부인을 만날지도 모르는데? 그때도 거지가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 말에 엘리자베스는 아, 하며 이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의 엘리자베스는 행복하다고 치자. 하지만 내일 시녀장에게 잔소리를 듣는 엘리자베스는 행복하지 않겠지. 그럼 리지 너는 행복한 거야, 불행한 거야?"
“...결국 내가 직접 느끼고 판단해야 한다는 말이네.”
레온하르트의 고개가 크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깊은 고민에 빠져 있던 엘리자베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들며 다시 물었다.
"그럼 레온은 지금 행복해?"
레온하르트의 말문이 막혔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는 지금 무척 행복했다. 시곗바늘은 되돌려졌고,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다.
눈앞에는 웃는 얼굴이 자연스러운 엘리자베스가 있었고 모든 일이 제 수순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불행했다.
그녀에게 자신이 어떤 죄를 저질렀고, 또 그 죄를 없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무슨 짓을 벌였는지 솔직하게 고백하지 않는 이상 그는 절대 행복할 수 없었다.
아니, 행복해선 아니 되었다.
“...네가 행복하다면 나도 행복해."
결국 평생 죄인으로 살기를 자처한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그 한 문장이 고작이었다.
레온하르트의 얼굴에 순간 그림자가 진 것을 놓치지 않은 엘리자베스는 일부러 보란 듯이 그의 앞에서 크게 하품을 했다.
“하암. 나 졸려. 여기서 자고 갈래.”
"응... 뭐? 뭐라고?"
한 박자 늦게 그가 반응했다.
의자에서 굴러떨어지기 직전 허리에 힘을 줘서 가까스로 버틴 레온하르트의 눈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커져 있었다.
“이미 침대가 다 식어 버렸을 거야. 그러니까 여기서 잘래.”
"리지!”
말 한마디면 아주 땀이 뻘뻘 날 정도로 난로에 장작을 넣거나, 아니면 아예 시계탑에서 마법사를 불러다 봄을 불러 올 수 있으면서 왜 굳이? 라는 말이 입 천장까지 올라왔다.
그가 당황하는 사이 엘리자베스는 자연스럽게 숄을 착착 접어 의자 위에 올려놓더니 냉큼 침대 한구석을 차지하고 올라가 누워 버렸다.
황당함과 당혹감에 어쩔 줄 몰라 입만 벙긋거리던 레온하르트는 결국 마지막 수단을 사용하기로 했다.
“베일리! 이리 와.”
“베일리! 추우니까 난로 앞에서 자."
"리지!"
베일리는 고민했다. 두 주인 중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하지?
"날도 추운데 왜 베일리를 굳이 이불 위에서 재우려고 그래? 그냥 따뜻하게 난롯가에서 자라고 해.”
“베일리는 북국에서 사는 개야. 저 털 덩어리가 추위를 느껴 봤자 얼마나 춥겠어?"
베일리는 코끝을 간질이는 자신의 털에 에취, 재채기를 했다.
“저것 봐! 얼마나 추우면 재채기까지 하겠어. 베일리, 숄 덮어 줄까?"
큰 주인과 작은 주인 중 큰 주인이 침대에서 내려오더니 얇고 긴 천을 가져왔다.
베일리는 얌전히 그녀를 따라 난롯가 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그녀가 몸에 가볍게 덮어 준 천에선 큰 주인의 냄새가 났다.
몇 번 몸을 꿈틀거리고 충분히 그 냄새를 느낄 수 있도록 천을 이리저리 뭉친 베일리는 다시 그 위에 드러누웠다.
큰 주인이 맑은 목소리로 웃더니 잘자, 라는 다정한 인사와 함께 자신의 귀 뒤를 긁어 주었다.
그 모습을 침대 위에서 뻔히 지켜보고 있던 레온하르트는 결국 뒷목을 붙잡았다.
'술, 분명 침대 아래에 숨겨 놓은 게 있을 텐데?'
"레온, 뭐 해?"
베일리에게 잘 자라는 인사를 남기고 몸을 돌린 엘리자베스는 침대 아래로 몸을 늘어뜨린 레온하르트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흡, 하는 소리와 함께 그가 허릿심으로만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의 손에는 갈색 액체가 들어 있는 유리병이 있었다.
"레온, 설마 너....!"
"아, 아니야! 이건 내가 마실 거라고!"
"응? 난 당연히 레온이 마실 줄 알고 말리려고 했는데?"
레온하르트는 다시 말문이 막혔다. 저 순진한 눈빛을 두고 차마 그가 걱정하고 있던 것을 고백할 수 없었다.
대신 레온하르트는 그동안 익숙하게 해 왔던 것을 반복하기로 결심했다.
숨을 들이쉬고, 눈을 감고, 미소를 지으며, 쿵!
...소리가 나야 할 텐데, 그의 이마에 느껴진 것은 실크 벽지를 바른 벽의 딱딱함이 아닌 부드럽고 말랑한 감촉이었다.
번쩍 눈을 뜨자 잔뜩 화가 난 표정의 엘리자베스가 보였다.
“리... 리지....”
“너 또 머리 박으려고 했지! 내가 지난 10년 동안 몇 번이나 그 모습을 봤다고 생각해? 안 되겠어. 이제부턴 내가 직접 막을 거야!”
“리지! 그런 게 아니라....”
“그런 게 아니면 뭐? 뭘 하려고 했는데?"
“그게... 그... 춥다, 일단 이불부터 덮고 생각, 아니 이야기하자.”
“또, 또 말 돌리지!”
레온하르트는 갈등했다.
두 손을 허리에 짚고 맹랑하게 따박따박 따지는 저 사랑스러운 약혼녀를 그냥 이불에 돌돌 말아 버릴까?
이불 속으로 들어온 엘리자베스는 단단히 심통이 났다는 것을 표현하려는지 일부러 등을 돌린 채 옆으로 누웠다.
하늘하늘 굽이치듯 흩어진 은빛 머리카락과 하얀 이불 사이로 슬쩍 보이는 길고 가느다란 목에 레온하르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진정하자... 진정.... 아직 식 안 올렸다.... 우리나라 국가가 어떻게 시작하더라? 후우, 근의 공식은... 으으윽! 아!'
그녀가 이불로 들어오는 순간 그의 코끝을 툭 건드리고 간 꽃향기에 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다급히 엄숙하게 국가를 제창하고 자신이 아는 수학 공식이며 화학 원소 기호를 달달 외웠지만 손바닥에선 삐질삐질 식은땀이 솟고 있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넘겨야 할까 고민하던 찰나 오늘 아바마마와 함께 정무를 논하던 중 그가 흘러가는 듯한 어조로 말했던 일이 떠올랐다.
마음속으로 아바마마에게 깊은 감사를 전하며 레온하르트는 엘리자베스에게 문득 생각난 투로 말했다.
“맞다 리지, 아바마마께서 우리 황녀님이랑 여생을 보내겠다고 하신 소식 아직 못 들었지?"
엘리자베스의 어깨가 움찔했다. 레온하르트는 그제야 한숨을 내쉬며 드러누웠다.
“...그게 무슨 소리야?"
엘리자베스의 긴 머리칼을 손가락에 감았다 풀며 나른한 목소리로 레온하르트가 설명했다.
"아무래도 일이 그렇게 될 것 같아. 어마마마의 고향에서, 세 분이서 알콩달콩하게 신혼 기분이라도 내고 싶으신 모양이야.”
아무도 밟지 않은 새하얀 설원 위로 병아리처럼 폴짝폴짝 뛰어 발자국 남기던 여동생을 떠올리며 레온하르트는 피식 웃었다.
어마마마께서 그토록 좋아하시던 생굴조차 먹지 못할 만큼 심한 입덧 뒤에 찾아온 동생은 어마마마를 쏙 빼닮은 사랑스러운 여자아이였다.
아일라 페이루즈 폰 에스페도르.
심심하면 어마마마의 화실에 침범해 스케치북 위로 의미를 알 수 없는 낙서를 하는 것이 취미인 황녀님을 떠올리자 저도 모르게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시곗바늘을 되돌린 대가로 이렇게 사랑스러운 여동생이라면 한 번 정도 더 되돌려도 괜찮지 않을까...?'
“그 말은... 그러니까... 그....”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손가락에 가볍게 걸쳐져 있던 은빛 머리카락이 스르륵 빠져나갔다.
레온하르트는 다른 생각을 하던 것을 멈추고 몸을 옆으로 돌렸다.
어둠 속에서 엘리자베스와 레온하르트의 눈이 마주쳤다.
레온하르트가 엘리자베스의 허리를 붙잡아 가까이 끌어당겼다.
서로의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순간 콩닥콩닥 마구 심장이 뛰기 시작하려던 찰나, 그가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너, 내년이면 황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