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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폐하가 시곗바늘을 되돌린 사연-97화 (97/130)

97화 평생을 함께하리란 약속(1)

데뷔탕트와 성인식 이후 엘리자베스의 처소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고급 종이에 인쇄된 초대장이 날아들었다.

무슨 후작가의 티 파티, 어느 백작가의 야유회, 사냥회, 시 낭독회 등등.

생일 선물로 황태자를 받은 그녀는 이미 황태자비나 다름없었다.

가고 싶다고 함부로 참여했다간 구설수에 오르기 딱 좋았다.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기에 엘리자베스는 신중에 신중을 기해 초대장에 거절의 답장을 보냈다.

이어서 거절의 답장을 쓰기 위해 인장을 떼어 내던 엘리자베스는 문득 봉투에서 풍겨오는 장미 향기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역시나, 로젤린이 보낸 편지였다.

그녀의 가문은 대대로 향수 사업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로젤린은 향기에 예민한 것은 물론 그녀에게서도 늘 은은한 향기가 풍기고 있었다.

내용을 읽어 보니 다른 귀족들의 유려하고, 화려하고, 격식과 예의를 잔뜩 차린 것과 달리 의외로 단출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베아트리체 언니와 함께 티타임을 즐길까 합니다. 부디 영애께서도 함께 자리를 빛내 주셨으면 합니다.]

엘리자베스는 잠시 고민하다, 대외적으로 사이가 좋지 않은 두 가문의 여식이 한자리에 모이려면 중립 지대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웃으며 답장을 써 내려갔다.

그리고 며칠 뒤 베아트리체와 로젤린, 엘리자베스는 경매회 당일 티타임을 즐긴 유리 온실에서 다시 만났다.

"베아트리체, 얼굴에 유난히 수심이 깊어 보이는데 혹시 무슨 일 있나요?"

엘리자베스는 꼭 자신의 일인 것처럼 걱정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조금 전부터 찻잔 속으로 각설탕을 하나, 둘, 셋... 홍차가 홍차 시럽이 될 지경이 되는 것도 모르고 퐁당퐁당 빠트리던 베아트리체가 그제야 핫, 하며 고개를 들었다.

“아... 아무 일도 아닙니다. 휴우....”

한숨까지 쉬어 놓고 아무 일 아니기는? 엘리자베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슬쩍 로젤린을 향해 시선을 돌리자 그녀 또한 고개만 절레절레 내젓고 있었다.

“언니, 이번에 제가 새로 조합한 향인데 한번 시험해 보시겠어요?"

로젤린은 품에서 향수병 두 개를 꺼내 들었다. 소라처럼 동글동글, 돌돌 말려 있는 색유리가 무척 아름다웠다.

베아트리체가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엘리자베스 또한 제 몫의 향수병의 뚜껑을 열고 가볍게 소맷자락을 휘저었다.

“탑 노트는 라임과 민트, 미들 노트는 오렌지 꽃과 복숭아, 그리고 베이스는 머스크와 송진 계열을 사용했어요. 향이 워낙 가볍다 보니 오 드 뚜왈렛과 코롱 중에서 고민했는데, 우선 오 드 뚜왈렛으로 가져와 봤습니다.”

로젤린의 말대로 가장 먼저 상큼하고 가벼운 향이 물장구를 치듯 가볍게 엘리자베스의 코끝을 스쳤다.

미들과 베이스 노트는 내일 직접 확인해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엘리자베스는 향수병을 닫았다.

“귀한 선물을 받았네요. 고마워요, 로젤린.”

“별말씀을. 향수 조제는 제 취미 중 하나랍니다. 어지간한 조향사의 작업실 못지않게 갖출 것은 다 갖췄으니, 괜찮으시다면 영애께서도 들러... 주세요.... 언니? 베아트리체 언니?"

로젤린이 기겁을 하며 베아트리체의 손을 낚아챘다. 엘리자베스 또한 한순간 훅 몰려온 달큰한 향기에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맥박이 뛰는 곳에 한 방울만 뿌려도 충분한 오 드 뚜왈렛이 베아트리체의 하얀 손목을 타고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좋은 향이구나.”

"언니!"

"베아트리체, 정말 아무 일 없는 거죠?"

환기를 위해 창문을 열자 차가운 겨울 공기가 때아닌 여름 향기를 느끼고 떼로 몰려왔다.

찬 바람이 볼에 닿자 베아트리체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허둥지둥 자리를 정리했다.

정말 저 아가씨가 누구보다 정숙하고, 우아하고, 예의 바르고, 격식 있고, 기품 있던 베아트리체가 맞는 걸까? 엘리자베스는 다시 한번 로젤린을 응시했다.

그녀의 눈빛을 이기지 못하고 로젤린은 한숨을 푹 내쉬며 베아트리체에게 일어난 일을 대신 설명했다.

"언니의 혼처가 정해졌어요."

“.....어머나.”

엘리자베스는 눈만 깜빡였다.

공작가의 혼사였다. 남편 될 사람이 누군지는 몰라도 베아트리체에게 부족함 없이 훌륭하고 잘난 사내겠지.

그러나 정작 신부가 될 베아트리체의 표정은 어둡기 그지없었다. 분명 무슨 일이 있구나,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직감하며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 달라는 눈빛을 보냈다.

로젤린이 막 말을 이으려는 찰나 베아트리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레이디 엘리자베스는... 행복한 분이세요.... 읍, 홍차가, 오늘따라 우유가 어울리는군요.”

"그거 조금 전까지 언니가 각설탕 열 개 정도는 넣어서 그럴걸?"

“내... 내가 그랬니? 창문은 왜...."

“그것도 언니가 내 향수를 손목 위로 콸콸콸 들이부어서 환기하느라 그런 거고.”

“아... 어쩐지 달큰한 향이 난다더니... 응? 내가? 세상에! 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레이디 엘리자베스, 추태를 보였습니다. 부디 하해와 같은 자비로...."

“진정, 진정하세요. 베아트리체!"

“그래, 언니! 심호흡! 심호흡!"

“심호흡... 후우우....”

"아, 아까 저보고 행복하다고 하셨는데...."

베아트리체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내년 봄이면 키르스텐 공국의 대공비가 될 겁니다.”

“키르스텐이라면... 아, 라이오넬 허셜 키르스텐 대공이 있는 곳이군요."

베아트리체의 고개가 위아래로 가볍게 흔들렸다.

비록 이름만 들었지만 키르스텐은 건축 양식은 물론 먹을거리와 단순한 문화 하나까지 제국보단 사막 너머에 있는 나라와 더 닮았다고 한다.

그래도 대공의 비가 되는 일이니 베아트리체에게도 그렇게 부족한 상대는 아닌 것 같은데...?

"대공과의 약혼이 정해진 날, 부모님은 물론 소식을 들은 모두가 그러더군요. 다른 곳도 아닌 키르스탄의 대공비니 부족함 없이 살 수 있을 거라고.”

“그렇... 겠지요?"

"하지만....”

치맛자락을 꼭 붙잡고 있던 베아트리체의 주먹이 바들바들 떨렸다.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고! 고작해야 초상화 한 번 보고! 상대방의 조건만 보고! 그런 결혼은... 공작가의 딸로 태어난 순간 정해진 운명이지만... 그래도... 그래도....”

로젤린도 엘리자베스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엘리자베스 또한 여덟 살이 되기 전까지 황태자의 얼굴을 초상화로만 접했고 로젤린 역시 공작가의 영애인 이상 몇 년 안에 비슷한 수순을 밟아 적당한 가문으로 결혼하게 될 예정이었다.

베아트리체가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번쩍 치켜들며 엘리자베스에게 물었다.

"엘리자베스, 황태자 전하께서 잘 대해 주시던가요?"

“네? 네... 네!”

엘리자베스는 확신을 가지고 대답했다. 베아트리체의 갸름한 볼을 따라 굵은 눈물방울이 끝없이 흘러내렸다.

“...좋으시겠어요. 부러워요. 태중 혼약이라니, 정말 얼굴도 못 보고 혼약하셨으면서 누구보다 지금 행복하고, 진실된 사랑을 하시는 영애가 부러워요. 질투가 날 정도예요!"

“베, 베아트리체?"

베아트리체는 설탕으로 반쯤 시럽화 된 홍차를 쭈욱 들이켰다. 지독한 단맛에 순간 머리가 어질했다. 지금 자신이 누구에게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그녀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부디 영애께서는 그대로 행복하시길 바라요. 초상화 한 번 교환하고, 초야 당일 처음으로 얼굴을 보고, 초상화에 대고 사기다! 라고 따지기도 전에 이미 상대방의 족보에 이름이 올라가고, 그게 제 운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귀족의 딸이라면 당연한 일이라고, 더군다나 저는 공작가의 영애니 아예 다른 왕국의 왕실과 혼담이 오고 가더라도 지극히 당연하다고.... 그리고... 그리고... 그렇게 그 가문의 안주인으로서 후계자를 낳고... 그걸로 끝이라 생각요.... 하지만....”

하지만? 로젤린과 엘리자베스의 고개가 동시에 갸웃거렸다.

“레이디 엘리자베스와 황태자 전하의 모습을 보고...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일이 얼마나 행복한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어요....”

“저, 저를 보고요?"

베아트리체는 찻잔 바닥에 남은 설탕을 은수저로 긁으며 우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오넬 대공께선 좋은 분이에요. 편지를 읽은 순간 알 수 있었어요. 하지만... 저는 사랑받고 싶습니다. 누군가를 마음 깊이 사랑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행복한 삶을 살고 싶습니다. 레이디 엘리자베스, 당신처럼요.”

더 마실 것이 없자 베아트리체는 스스로 주전자를 기울여 찻잔을 채우고 한 번에 훌쩍 마셔버렸다.

“영애께선 꽃꽂이에 조예가 깊으시지요? 괜찮으시다면 마지막 선물로 결혼식 부케를 청할 수 있을까요?"

“부케 정도야 얼마든지 만들어 드릴 수 있지만... 행복... 행복... 사랑받는 행복이라니... 그런... 저는....”

"원래 당사자는 모르는 법이지요.”

로젤린은 두 사람의 눈치만 보며 차만 홀짝였다. 겨울에 잘 어울리는 정향과 계피 향이 나는 홍차였다.

“....원치 않는 결혼이라면 거부하는 것도....”

“이미 늦었습니다. 예법에 맞춰 모든 준비가 끝났고 지참금과 함께 신부만 가면 되는데... 그나마도 제가 봄이 좋다 하여 억지로 미룬 겁니다.”

“그, 그러면... 음... 아!"

엘리자베스는 좋은 생각이라도 난 듯 작은 박수를 쳤다.

"라이오넬 대공에게 사랑의 증표를 요구하는 건 어떨까요?"

“...소용없어요. 증표라면 넘치도록 받았는걸요. 황실에서도 보기 힘든 보물이 마차 단위로 왔다면 믿으시겠어요?"

“그런 것 말고! 진실된 사랑의 증표 말입니다.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있는...."

“....편지라도 보내라는 말씀이세요?"

“바로 그거예요!"

베아트리체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었다. 엘리자베스는 몸을 앞으로 숙였다. 덩달아 로젤린과 베아트리체도 모략을 꾸미는 사람들처럼 머리를 맞대고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대공 입장에서도 베아트리체의 가문만 보고 혼담을 진행한 거라면, 분명 편지에서 그런 뉘앙스가 드러날 거예요.”

"하... 하지만 대필을 시키면....”

"대공의 명예와 언니의 명예를 걸고. 장차 평생을 같이할 사람이 될지도 모르는데 한 점 속임 없이 쓰라고 하는 거야, 언니!"

"편지... 편지라....”

“그렇게 편지가 오며 가며 문득 생각이 나서 함께 보냅니다, 하며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반지도 보내고 나라고 여기세요, 하며 꽃도 보내고 그러는 거지, 뭐.”

“로젤린, 너 요즘도 그런 소설 읽니?"

"으흠... 흠!”

엘리자베스는 작게 쿡쿡 웃었다. 편지에 엘리자베스가 직접 그린 초상화를 더하자, 로젤린의 향수를 봉투 듬뿍 뿌리자, 오래된 시집의 시를 인용하자 등등 다양한 의견이 나왔다.

아주 효과가 없진 않았는지 티타임이 끝나고 황궁을 떠나는 베아트리체의 표정은 처음 온실에 들어올 때보다 훨씬 밝아져 있었다.

그날 밤 엘리자베스는 버릇처럼 커다란 베개를 끌어안고 곰곰이 생각했다.

자신은 행복한가? 행복하다면, 다른 사람에 비해 어떤 점이 행복하지? 아니, 행복이란 과연 누군가가 직접 정의 내릴 수 있는 감정인가?

엘리자베스는 처음으로 '나는 행복한가?'에 대해 깊이 고심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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