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하얀 새가 홀로 날아 오르던 날(3)
“리지, 리지? 괜찮아? 로젤린... 인가 하는 레이디가 유모에게서 나는 향이 신경 쓰인다며 가 보래서 왔는데, 문까지 잠가 놓고. 무슨 일 있어?"
"괘, 괜찮아! 그냥... 오랜만에 보는 동생이 너무 반가워서! 모처럼 아무런 방해 없이 가족과 있고 싶어서 그래.”
“...그래?"
레온하르트는 그 말에 금방이라도 문을 걷어차려던 것을 멈추고 다리를 내려놓았다.
문 너머에 엘리자베스가 있었다. 그 이유만 아니었더라도 레온하르트는 진작 문을 박살 내고 그 너머에 있을 공작 부인을 죽여 버렸을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어색하게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감추며 레온하르트에게 회장을 살펴 달라고 부탁했다.
레온하르트 특유의 절도 있는 발소리가 들린 것으로 보아 무사히 회장으로 돌아간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예상과 달리 레온하르트는 발소리와 숨소리를 죽이며 문으로 돌아와 귀를 바싹 가져다 대고 있었다.
“...유모로 왔으면 유모답게 있으세요.”
"이졸데!”
겨우 그 한마디를 하는 일이 왜 이리도 어려운 건지. 엘리자베스는 등을 돌려 공작 부인의 시야에서 루트비히를 감췄다.
품 안의 아기는 너무 작았다. 정말로 이런 아기가 레온하르트처럼 성장해서, 엘리시움의 후계자가 될 수 있을까 걱정이 들 만큼 작고 여렸다.
후, 하고 불면 그대로 날아갈 정도로 가벼워 그녀는 루트비히를 더욱 단단히 끌어안았다. 아기의 자그마한 콩닥거리는 심장 소리가 들리자 분노와 경멸, 배신감으로 핑핑 돌던 머리가 조금 진정되는 기분이었다.
“...루트비히가 있는 한 엘리시움은 무사할 겁니다. 하지만... 다음은 없습니다.”
환영회에서 한 번, 데뷔탕트 이후 또 한 번, 그리고 지금.
세 번이면 충분했다. 더 이상은 아무리 그녀라고 해도 참을 수 없었다. 아니, 그녀가 먼저 나서서 가족을 내칠 것이다.
지금 당장은 어렵더라도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그리고 그동안 엘리시움 공작가가 전혀 바뀌지 않는다면 그렇게 될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루트비히를 푹신한 침대 가운데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 주었다.
그녀의 품이 제법 안락했던지 루트비히는 어느새 잠들어 있었다.
자신을 품어 주던 온기가 사라지자 잠시 칭얼거리긴 했으나 엘리자베스가 간절한 소원을 담아 그의 보드라운 이마에 키스하자 이내 다시 새근새근 고른 숨소리를 내었다.
공작저를 나서 황궁으로.
황궁에서 다시 공작저로.
진실을 마주하고 다시 황궁으로.
모두 그녀 자신이 결정한 일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또다시 스스로 고민하고, 결론짓고, 행동했다.
'레온이 알면 좋아해 줄까?'
엘리자베스는 마지막으로 루트비히의 하얗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쓸어 주며 속으로 웃었다.
'제발 너만큼은... 너만큼은 행복해지렴....’
그것을 마지막으로 엘리자베스는 방을 나섰다.
생일 선물 내기의 승자가 막 정해진 참이었다.
회장으로 돌아가기에 앞서 엘리자베스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모습을 점검했다.
그리고 있는 힘껏 그동안 있었던 즐거운 일을 떠올렸다. 그러자 굳어 있던 얼굴이 풀리고 자연스러운 미소가 그려 졌다.
"리지!”
"오래 기다렸지? 미안해요. 루트비히가 어찌나 귀엽던지, 절로 지켜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기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보호받아 마땅한 존재들이지. 보아하니 새로 태어날 황태자의 동생도 제법 사랑받을 모양이구나. 다행이야."
황후의 말에 레온하르트는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 내기 결과는 어떻게 되었나요? 보아하니 그 내기에 신경 쓰신 게 한두 분이 아니던 것 같던데....”
"반반... 이지만 아직 레온하르트가 선물을 꺼내지 않았으니 미미르가 아주 조금 더 앞서 있단다.”
“그래요?"
엘리자베스는 레온하르트의 손을 잡고 회장 중앙으로 나섰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레온하르트는 의아해하면서도 흔쾌히 어울려 주었다.
“내기는 황태자 전하의 승리입니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낭랑한 목소리로 엘리자베스가 선언했다.
가장 놀란 건 승자인 레온하르트였다.
"리, 리지? 나 아직 선물 안 줬는데?"
“그냥 듣고 있어.”
들으라면 들어야지요. 암, 들어야 하고말고. 레온하르트는 얌전히 다른 이들과 비슷한 궁금증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제가 처음으로 황궁으로 오던 날이 생각나네요. 유난히 꽃이 어여쁜 봄이 었어요.”
그리고 엘리자베스는 지난 10여 년간 레온하르트가 그녀에게 가르쳐 준 것에 대해 조곤조곤한 어투로 풀어놓기 시작했다.
아침이면 서리가 내리는 날이었다. 그러나 파티장은 조금 이른 봄이 찾아온 모양이었다.
“...전하께선 저에게 10년에 걸쳐 아주 큰 선물을 주셨습니다. 스스로 생각하고, 고민하고, 결론을 내리고, 그리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힘까지.”
엘리자베스는 깊게 몸을 숙여 레온하르트에게 인사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황태자 전하."
레온하르트는 다급히 그녀를 일으켜세웠다. 오늘의 주인공은 그녀였지 그가 아니었다.
내가 한 일이 뭐가 있다고, 전부 네가... 어쩌고저쩌고.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스스로도 모르겠다.
레온하르트는 아무렇게나 나오는 말을 그대로 뱉다 말고 문득 얼굴이 축축한 것을 느끼고 말을 멈췄다.
“...전하, 울어요?"
그제야 레온하르트는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을 자각했다. 너무 기쁘면 눈물이 나온다더니, 딱 그 모습이었다.
황태자가 소리도 없이 오열하기 시작하는 바람에 미미르가 특유의 쾌활한 목소리로 뛰어들지 않았다면 엘리자베스의 생일 파티는 파국을 맞이할 뻔했다.
“뭐야, 나는 선물을 위해 열흘씩이나 준비했는데 전하께선 무려 십 년 동안 꾸준히 주고 계셨단 거예요? 이래서야 애초에 내기가 성립이 안 되는 이야기잖아요!”
미미르는 양손을 허리에 얹고 짐짓 억울하고 분한 투로 씨근거리며 말했다.
그녀의 곁에 서 있던 일리시스가 식은땀을 흘리며 미미르를 진정시켰다.
레온하르트는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닦으며 미미르를 응시했다.
“뭐, 그래도 내기는 내기. 전하가 이기셨습니다. 사흘간 마음껏 부려 먹으세요.”
금방이라도 마법으로 공격할 것 같던 것과 달리 미미르는 의외로 순순히 패배를 인정했다.
그 모습에 사람들 또한 저마다 내건 것이 있었던지 서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로젤린이 입술을 삐죽이며 베아트리체에게 무언가 건네주는 것을 본 엘리자베스는 속으로 쿡 웃었다.
“사흘... 사흘이라... 음, 좋아. 리지, 10년간 같은 선물만 받았으니 질렸지? 그러니 새로운 선물을 줄게. 시계탑의 분침 미미르를 사흘간 멋대로 부려 먹을 수 있는 권리를 너에게 양도하겠어.”
“전하?"
“레온?"
레온하르트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엄살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저 마법사에게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일을 하라고 시켰다간 나중에 어떤 대가로 돌아올지 몰라서 말이야.”
“흠, 그건 그래요. 저도 나름대로 사흘간의 치욕에 대한 대가를 고심하고 있었거든요.”
"이것 봐.”
레온하르트는 어느새 엘리자베스의 등 뒤에 숨어 얼굴만 빼꼼 내밀고 있었다.
어딜 봐도 훌륭하게 성장한 청년인 그가 이제 겨우 어른 대접을 받기 시작한 레이디의 등 뒤에 숨은 모습은 초대 받은 사람들을 웃게 하기에 충분했다.
“...어떻게 할 거야? 네 동생... 루트비히라고 했던가?"
레온하르트의 속삭임에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다음은 없다고 말해 놨어.”
"그 말은....”
“루트비히는 나를 조르는 목줄이 아닌 엘리시움을 조르는 목줄이 될 거야.”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가족을 버리지 못할 것이란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그녀는 그렇게 모질지 못했고, 바보 같을 정도로 착했으니까.
하지만 그조차도 하지 못한 발상이라니. 심지어 개국 공신이자 초대 황후를 배출한 공작가를 무너뜨리는 것보다 훨씬 평화로우면서도 간단한 방법이었다.
왜 그걸 몰랐을까. 유쾌함에 절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흠, 그럼 남은 건 짐의 선물인가?"
얌전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황제가 앞으로 나섰다. 엘리자베스는 긴장한 표정으로 황제를 올려다봤다.
“짐의 선물은... 그렇지, 레온하르트 저 녀석을 주마.”
"폐하!"
"아바마마!”
졸지에 황태자에서 선물이 되어 버린 레온하르트는 붕어처럼 입만 뻐끔거렸다. 황후 또한 이런 전개는 예상하지 못했는지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보다시피 소드 마스터란 점 외에는 크게 특징이랄 것도 없지만 황후를 닮아 얼굴만은 그럭저럭 볼만하지. 그리고 짐을 닮았다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할 것이다. 이건... 보증서를 쓸 수도 없는 노릇이고, 네가 평생 지켜보며 정말 그런지 직접 확인하는 수밖에 없겠구나. 그래도 괜찮다면 받아 주겠느냐?"
엘리자베스는 눈만 깜빡였다. 그리고 이내 그의 말뜻을 알아차리고 진심으로 기쁜 듯 무릎을 굽혔다.
"그 선물, 기꺼이 받겠습니다. 폐하!"
"참고로 반품, 교환, 수리는 불가능하단다.”
"아바마마!”
황제의 능글맞은 농담에 와르륵 웃음소리가 한바탕 쏟아졌다.
엘리시움 공작 부인은 잠에서 깨어 울기 시작한 루트비히를 뒤로한 채 손톱을 세워 문만 긁어 대고 있었다.
루트비히가 있는 한 그녀는 절대 엘리시움을 버리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 문장을 뒤집으면 루트비히가 있기에 엘리시움 또한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그것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자신과 그녀에게 땟국물이 줄줄 흐르는 걸레 조각 따위를 입혀 우습지도 않은 연극을 시킨 엘리시움 공작이 원망스러웠다.
공작 부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루트비히에게 향했다.
그녀의 끔찍했던 인생의 마지막 결과가 침대 위에서 시끄럽게 울어 대고 있었다.
차라리 여기서 이 핏덩어리를 죽이고, 나도 죽고. 그러면 공작에게 무엇보다 큰 복수가 되지 않을까?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공작 부인은 루트비히의 목을 향해 팔을 뻗었다.
그러나 그녀는 끝내 자신의 아들에게 손을 댈 수 없었다. 아니, 손을 대지 못 했다.
공작 부인은 서툰 동작으로 루트비히를 어르고 달래기 시작했다.
파티가 모두 끝난 뒤에야 공작 부인은 다시 엘리자베스를 만날 수 있었다.
그녀의 배려가 있었던 덕에 루트비히와 공작 부인은 조금 답답하긴 했어도 큰 불편함 없이 엘리자베스를 기다릴 수 있었다.
밤늦게 그들을 찾아온 엘리자베스는 묵묵히 루트비히와 잔뜩 지친 얼굴의 자신의 어머니를 돌아봤다.
화를 낼 가치도 없다, 라고 방으로 들어오기 직전 레온하르트는 말했다.
어쩌면 그의 말이 사실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단 한 번이어도 좋으니 사람 대 사람으로 어머니를 마주하고 싶었다.
"어머니.”
“...이졸데.”
공작 부인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엘리자베스는 깊이 숨을 들이쉬고, 수십 번 연습했던 말을 입 밖으로 내었다.
“저는 더 이상 어머니의 뜻대로 휘둘리지 않을 겁니다.”
“이졸데?"
“그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것도 이제 얼마 남지 않으셨군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저는 엘리시움이 아닌 에스페도르 황가의 일원이 될 겁니다.”
"이졸데!”
“쉿, 루트비히가 깰지도 모릅니다. 목소리를 낮추세요.”
공작 부인은 저도 모르게 벌렸던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의사와 상관없이 몸이 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마차를 준비했습니다. 조용히 돌아가 주세요. 그리고... 루트비히를... 행복하게 해 주세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엘리자베스는 대답을 듣기도 전에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 그와 동시에 시종들이 그녀와 루트비히를 안내하기 위해 방으로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