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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폐하가 시곗바늘을 되돌린 사연-95화 (95/130)

95화 하얀 새가 홀로 날아 오르던 날(2)

드디어 내기 당일, 아니, 엘리자베스의 열여덟 번째 생일날이 밝았다.

얇은 구름을 숄 대신 걸쳐 입은 하늘 아래 가장 큰 연회장의 문이 열렸다.

전체적인 색조는 푸른색. 그러나 여름과 달리 레이스를 한 겹 덧입힌 푸른 리본은 어린아이들이 주로 쓰는 간단한 나비 모양 리본이 아닌 우아하고 화려한 모양으로 매여 있었다.

각 가문에서 마차가 도착하고 한껏 차려입은 오늘의 초대 손님들이 하나둘 연회장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상기하듯 저마다 품에 다 끌어안지도 못할 만큼 커다란 상자부터 손바닥 위에 올라갈 만큼 작은 상자까지, 정성스레 포장한 선물을 가지고 있다.

오늘의 주인공인 엘리자베스는 아침부터 한 발자국 내디딜 때마다 들려오는 생일 축하 인사에 가슴이 먹먹할 지경이었다.

공작저에서, 그리고 황궁에서 생일을 챙기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한 번은 시계탑의 친구들이 그녀를 놀래 주기 위해 깜짝 파티를 준비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오늘은 그녀가 법적으로 성인이 되는 조금 더 특별한 날이었다.

'이제 어른이 되었으니 에스프레소도 마실 수 있어!'

레온하르트가 보는 앞에서 당당하게 전부 마셔 버려야지. 그리고 술도 마셔 볼 거야. 또....

시녀들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빗기고 땋는 사이 엘리자베스는 어른이 되었으니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역시 레이디 엘리자베스는 푸른 보석이 잘 어울리네요!"

총총 땋은 머리카락을 느슨하게 잡아 빼서 몇 올 정도는 자연스럽게 흐트러트리고.

그대로 이렇게, 저렇게 수십 개의 진주와 은, 사파이어, 기타 푸른 보석으로 꽃과 나비를 만들어 붙인 핀으로 높이 올려 고정해서.

마지막으로 눈썹 위를 가볍게 덮는 가지런한 앞머리와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옆머리까지 깔끔하게 빗어 주면 끝!

등 뒤로 거울을 비춰 주자 엘리자베스는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신기한 얼굴로 나지막한 감탄사를 내뱉었다.

"어떠세요?"

“....정말로 어른이 된 기분이야....”

“그야 오늘부터 정말로 어른이신걸요!"

십여 년을 그녀 곁에서 함께한 하녀장이 앞치마로 눈시울을 찍어 대며 말했다.

처음 황궁에 올 때만 해도 그녀의 허리께에나 겨우 오던 자그마한 소녀가 어엿한 성인이 되다니!

황태자 전하의 성인식보다 더욱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그럼 가실까요?"

잔뜩 긴장한 기색으로 엘리자베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 너머엔 여느 때와 같이 레온하르타가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리... 엘리자베스.”

평소처럼 친근하게 그녀를 부르려던 레온하르트는 머리를 올린 엘리자베스의 모습에 잠시 멈칫했다.

우아하게 틀어 올린 머리, 귀와 목에서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드러난 둥근 어깨 너머로 하얀 실크 원단이 숄처럼 길게 늘어져 있었다.

“...보물고에 가서 왕관이라도 하나 가져올까?”

레온하르트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리고 왕관을 쓴 엘리자베스의 모습을 상상했다.

'...아바마마! 빨리! 빨리 왕관 넘겨요!'

“제법 괜찮게 꾸몄군.”

왕관의 주인은 화려하게 꾸며진 연회장을 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폐하,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무엇이 말입니까? 황후.”

황후는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연회장 구석을 차지한 샴페인 타워를 가리켰다.

금빛으로 찰랑이는 잔을 보는 순간 황후의 머릿속에선 오늘의 주인공이 처음 황실 연회에 모습을 드러냈던 날 일어난 불상사가 스쳐 지나갔다.

오늘도 그렇게 된다면 어떡하지?

'물론 리스트를 작성한 건 리지 본인이지만....’

불안한 기색을 좀처럼 숨기지 못하는 황후를 보며 황제는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귓바퀴를 가볍게 깨물었다.

"괜찮습니다. 짐을 믿으세요. 그리고 그 아이를 믿으세요. 응? 내 사랑.”

황후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공이 등장하고 간단한 축하사와 함께 본격적인 파티가 시작됐다.

가장 먼저 선물을 가지고 온 건 베아트리체였다.

그녀 또한 예의 내기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는지 평소의 싸늘할 정도로 차디찬 인상이 아닌 어딘지 장난기마저 느껴지는 서글서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의 시집 초판입니다.”

"고마워요, 베아트리체. 음... 베아트리체는 미미르와 황태자 전하 중에서 누굴 선택했나요?"

베아트리체의 눈이 잠시 휘둥그레졌다. 그러나 이내 어쩔 수 없다는 투로 풋 웃으며 엘리자베스에게 속삭였다.

“저는 역시 황태자 전하라고 생각합니다.”

이어서 로젤린이 내민 것은 직접 만들었다는 향수였다. 향을 배합하는 일 만큼이나 어울리는 유리병을 찾는 것도 힘든 일이었다며 로젤린은 푸른 리본이 달린 병을 내밀었다.

"베아트리체 언니와 달리 저는 미미르 님이라고 생각해요. 마법사니까요!"

이어서 황실에 납품되는 최고급 찻잎에 향을 입힌 홍차, 일리시스가 직접 번역한 고대어 시집이 미리 마련된 테이블 가득 쌓였다.

“생일 축하한다. 그리고 어른이 된 것도. 올린 머리도 무척 잘 어울리는구나! 빨리 아가, 아니지. 영애에게 황후의 관을 물려줘야겠어요.”

“펴, 평소처럼 부르셔도 괜찮은데....”

“그럴 수야 있나. 이젠 정말 어른인걸. 자, 이리로 오렴.”

엘리자베스는 조심스럽게 황후의 곁으로 다가갔다. 황후의 손짓에 쿠션을 받쳐 든 시종이 다가왔다.

“...황후 마마!”

황후는 자애로운 미소와 함께 쿠션 위에 있던 황실의 보물 중 하나인 티아라를 그녀의 머리 위로 얹어주었다. 어지간한 사내의 엄지손톱만한 크기의 사파이어가 종처럼 매달려 있고 수백 개의 다이아몬드가 깃털처럼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고 있는 티아라는 그녀에게 무척 잘 어울렸다.

"황후의 관은 아니지만 역시 잘 어울리는구나. 다행이야.”

“세상에, 세상에....”

"레온이 이길 것 같니?"

“세상에... 네? 아, 그... 잘... 모르겠어요. 미미르 언니가 어떤 선물을 가져왔는지 아직 보지 못해서....”

"흐음."

황후는 턱을 쓰다듬으며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녀의 등 뒤에 서 있던 미미르가 한껏 우아하게 몸을 숙였다 다시 일어섰다.

“무지갯빛 장미...?"

미미르의 손엔 어느새 장미 한 송이가 들려 있었다. 그 흔한 종이 포장도 없이, 줄기에 얇고 푸른 리본을 매 놓은 것이 장식의 전부였다.

그러나 장미에겐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꽃잎 한 장 한 장 붉고, 노랗고, 심지어 푸른빛이 도는 장미는 시계탑의 마법사가 아니면 피워 낼 수 없는 물건이었다.

“이 정도면 황태자 전하를 이길 수 있겠지?”

"글쎄요, 레온의 선물도 보고 결정해야겠는데... 이거 너무 어려운걸요."

“그런가. 그럼 이건 일단 이렇게... 장식해 놓을게!”

미미르가 허공에서 손짓했다. 그러자 회장에 장식된 모든 꽃이 무지개 장미로 변했다. 사람들이 눈앞에서 벌어지고도 믿을 수 없는 일에 감탄하는 사이 미미르는 잔뜩 콧대를 치켜세웠다.

'그 아이'는 귀족들이 저마다 정성껏 마련한 선물과 함께 도착했다.

“루... 루트비히 모르트 폰 엘리시움 공자와... 그 유모 되시는 분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시종은 공작가에서 나왔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남루한 복장을 한 유모와 그녀의 품에 매달리듯 안겨 있는 어린아이를 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엘리시움에 아들이 있었어?'

'다 망해 가는 가문의 후계자라니, 저 아이도 편하게 살긴 글렀군.'

'그래도 누님이 황후 될 사람이니 조금 낫지 않을까?'

'그 부모 성격을 생각하면 오히려 누님에게 민폐나 끼치며 자랄 것 같은데....'

'어쨌든 엘리시움은 완전히 몰락이군.'

사람들의 수군거림도 아랑곳 않고 유모는 루트비히를 데리고 엘리자베스 앞으로 나섰다.

아무리 추운 겨울이라지만 실내에서까지 얼굴을 전부 후드로 가리고 있는 유모가 신경 쓰였다.

엘리자베스는 심란한 표정으로 유모로부터 루트비히를 건네받았다.

그녀의 어린 남동생은 맑고 순진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공작저에선 볼 수 없던 물건에 호기심을 보이고 있었다.

문득 엘리자베스는 유모로부터 아주 짙고 농밀한 향수 냄새를 느꼈다.

아기 특유의 보드라운 냄새가 나도 모자랄 판에 향수? 그것도 예의상 뿌리는 수준이 아닌, 마치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엘리자베스는 아이가 졸려 보인다는 핑계를 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트비히를 품에 꼭 끌어안고 엘리자베스는 근처의 대기실로 향했다.

그녀가 문을 단단히 잠그며 뒤를 돌아보는 것과 동시에 유모가 푹 덮어쓰고 있던 후드를 걷어 냈다.

“...어머니.”

“우리 이졸데, 그동안 잘 있었니?"

역시나. 엘리자베스는 절망했다.

겉모습은 누더기로 가릴 수 있어도 그 몸에 밴 진한 향수의 향은 숨길 수 없는 법이었다.

공작 부인의 화장기 없는 맨얼굴은 그새 주름이 더 늘어 있었다. 엘리자베 스는 고개를 돌리며 싸늘하게 물었다.

“...분명 루트비히만 초대했는데, 초대장이 한 장 더 갔던 모양입니다.”

“루트비히는 아직 어리니까 유모가 필요한 게 당연하잖니? 그 어떤 훌륭한 유모보다 좋은 건 역시 어미의 품이지. 그렇지, 이졸데?"

“저는...!”

엘리자베스가 뭐라 항변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너무 많은 질문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엘리자베스는 어디서부터 말해야 좋을지 몰라 입만 벙긋거렸다.

"다 우리 모두를 위해서야.”

“...‘우리’...말씀입니까?"

공작 부인은 만면에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아니었다면 이졸데, 네가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었겠니? 그리고 루트비히도.”

“어머니....”

엘리자베스는 제발 그만하라는 뜻을 담아 공작 부인을 응시했다. 그러나 그녀의 간절한 소원은 결국 이뤄지지 못했다.

"결국은 너희들을 위해서야.”

“제발 그만하세요!"

결국 엘리자베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 바람에 그녀의 품에 안겨 있던 루트비히가 칭얼거리더니 울음을 터트렸다.

공작 부인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지더니 히스테릭한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당장 그치지 못해? 루트비히! 너는 엘리시움의 단 하나뿐인 후계자야! 네 누님 앞에서 울음이라니! 당치도 않는 소리! 어서 울음을 그치거라!"

"어머니!"

아직 말도 할 줄 모르는 어린애한테 그런 식으로 소리쳐 봤자 오히려 역효과라는 걸 대체 왜, 왜 모르시는 걸까.

엘리자베스는 서툰 동작으로 어떻게 든 루트비히를 달래기 위해 애쓰기 시작했다.

공작 부인은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 한껏 턱을 치켜들고 지켜보고 있었다.

'네가 아무리 황후가 된다 한들 결국 루트비히가 있는 한 너는 우리를 버리지 못해.’

엘리자베스에겐 공작 부인의 시선이 꼭 그렇게 느껴졌다.

“대체... 대체 그 '잘된다'는 기준이 뭡니까. 풍족한 재력?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권력? 그것도 아니면.”

“너희가 잘되어야 이 어미도 함께 잘 살 것 아니니. 이졸데, 세상 모든 일은 말이야... 가는 것이 있으면 오는 것도 있는 법이란다. 내가 너를 황후로 만들었으니 너는 나에게 응당 그에 맞는 대우를 보여야지!"

...차라리 재력이나 권력을 욕심내는 쪽이 나았다.

엘리자베스는 루트비히를 꼭 끌어안고 고개를 숙였다.

지금 여기서 무슨 말을 더 해야 할까, 할 수 있을까. 흐느끼는 대신 입술을 꾹 깨물며 엘리자베스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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