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황제폐하가 시곗바늘을 되돌린 사연-94화 (94/130)

94화 하얀 새가 홀로 날아 오르던 날(1)

엘리자베스가 태어나던 날, 엘리시움 저택은 아기 우는 소리와 함께 난분분 난분분 싸락눈 내리는 소리로 가득했다고 한다.

매년 겨울 돌아오는 것이 그녀의 생일이었지만 올해는 조금 달랐다. 열여덟 번째 생일, 법적으로 성인이 되는 날을 앞두고 황실 식구들은 물론 도로시와 함께 겨울 코트를 만들 캐시미어를 다루던 엘리까지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엘리자베스에게 어떤 생일 선물을 주면 좋을까.

이야기의 발단은 시계탑에서 벌어진 가벼운 소동이었다.

여느 때와 같이 레온은 미미르와 가볍게 투닥거렸고, 일리시스는 그 둘을 중재하느라 진땀을 흘리고, 엘리자베스 홀로 익숙한 모습에 웃으며 차를 음미하고 있었다.

지난 경매회가 끝나기가 무섭게 모 상회에서 시계탑의 조력을 받아 저급 찻잎에 다양한 향을 입히는 연구를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지금 그녀가 마시고 있는 것은 그 시제품 중 하나였다.

“그러고 보니 리지, 이제 곧 생일이지?"

그것도 성인이 되는. 미미르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미르 언니는 성인식 선물로 뭘 받았나요?"

“나? 휴우, 말도 마. 시계탑의 초침들부터 할아버지보다 더 늙은 분침들까지 싹 몰려와서 마른하늘에 무지갯빛 날벼락을 내리꽂고 오렌지주스 맛이 나는 비를 내리게 하다, 발밑에선 젤리로 만든 꽃이 솜사탕으로 만든 토끼와 함께 빙글빙글 춤을 추지를 않나... 다들 어린애 취급이라니까? 마법사 놈들, 평소에는 '미미르 님’ 하며 아주 내가 끄적대다 버린 종이 하나라도 얻고 싶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주제에 아주 날을 잡았다 이거지. 내 머리를 쓰다듬어도 되는 건 세상에 단둘뿐이라고!"

"그게 누군데요?"

"할아버지와 리지 너. 아무튼 그 소동이 시계탑에 따로 마련된 방에서 일어나서 다행이었지. 어떻게 된 게 멀쩡한 선물을 가져온 녀석이라곤... 휴우. 어떻게 보면 지극히 마법사다운 행동이긴 한데, 가끔은 세상에 상식이란 게 있다는 걸 상기했으면 좋겠어.”

“미미스 브룬느 님께는 무엇을 받으셨나요?"

어지간히 마음에 쌓여 있었는지 숨도 쉬지 않고 우다다 쏟아 낸 미미르가 적당히 식은 찻물을 꿀꺽꿀꺽 쉬지도 않고 한 번에 비워 냈다.

명색이 후작가의 장남인 일리시스가 노련한 집사처럼 그녀의 손가락이 찻잔 손잡이에서 떨어지기가 무섭게 주전자를 들고 잔을 채워 놓았다.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그 모습을 본 레온하르트는 한쪽 눈썹을 슬쩍 들어 올렸다.

'일리시스 녀석, 아직도 마법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린 건가?'

미미르는 엘리자베스를 붙잡고 열여덟 번째 생일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본격적으로 한탄하기 시작했다.

엘리자베스는 때론 감탄하고, 때론 놀라워하고, 때론 경악하며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아무튼 그래, 절대로! 절대로 리지 너는 마법사 놈들과는 친하게 지내지마. 알겠지?"

"하... 하지만 미미르 언니는....”

“나는 괜찮은데! 우리 할아버지도 괜찮은데! 다른 놈들이 위험해! 레온하르트 전하 놈님도!”

“전하... 놈... 님....”

“나는 또 왜? 내가 뭘 했다고?"

레온하르트가 억울함 가득한 얼굴로 느긋하게 기대어 있던 자세를 바로 고쳐 앉았다. 미미르는 코웃음을 치며 '나는 다 알고 있다'라는 표정을 지었고 엘리자베스는 고개만 갸웃거렸다.

“흐음... 성인식... 성인식이라.... 우리 리지가 시계탑에서 실종됐던 게 엊그제 일 같은데 벌써 성인이라... 시곗바늘은 참 빠르게도 돌아가지. 안 그래?"

딱히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는지 미미르는 어깨만 으쓱였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성인식 선물로 꽃다발과 향수를 받겠지만, 우리 리지는 어떠려나? 응? 황태자 전하. 다른 사람도 아니고 리지 생일 선물을 고작 그런 걸로 줄 생각은 아니죠?"

도발에 말려들면 안 된다, 마법사의 도발에 말려들면 안 된다, 고작 저런 말에 반응하면 안... 안... 안....

“두고 봐! 절대 잊지 못할 생일 선물을 줄 테니까!"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자 테이블이 들썩였다. 레온하르트는 호언장담했다.

"레온?"

눈앞에서 치즈 케이크가 담긴 접시가 흔들리는 것을 본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돌렸다.

“호오! 역시 그렇게 나오셔야지! 내기라도 할까요, 전하 놈님?"

미미르는 여유만만, 느긋하다 못해 함정에 빠진 어리석은 사냥감을 보는 것 같은 시선으로 찻잔만 홀짝댔다.

"미미르 님?"

일리시스가 다급하게 그녀를 말렸으나 이미 두 사람의 내기는 시작된 뒤였다.

“리지가 과연 어떤 선물에 더 기뻐할지 기대되는걸?"

“저야말로. 지는 사람은 사흘간 이긴 사람이 시키는 일이라면 뭐든 하기. 시계탑의 차기 주인을 멋대로 부릴 수 있는 기회는 드물다구요?"

"그러는 미미르 너야말로 황제가 될 사람을 손가락 하나로 이리저리 움직이게 되는 일은 절대 없을 거니 단단히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내 의사는...?'

엘리자베스는 황망한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계약서까지 작성하기 시작한 두 사람만 번갈아 봤다.

"하여간 정말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니까? 하기사, 마법사의 생각을 내가 어떻게 알겠냐마는... 베일리? 베일리, 듣고 있어?"

“...라고 전하께서 베일리의 앞발을 붙잡고 한탄하시던 것 있지?"

“나는 미미르 님이 이길 것 같아. 그 분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어머?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아낌없이 애정을 과시하시는 전하가 더 유리하지 않을까?"

“...라며 황태자궁의 하녀들이 다들 들떠 있습니다. 폐하, 어떻게 할까요?"

“제법 즐거운 주제 아닌가. 그 결과가 궁금해지니 그냥 내버려 두거라. 그렇지요, 황후?"

“후후, 아예 저희도 함께 어울릴까요? 어디 보자... 황후의 관 같은 건 쓸데없이 무겁기만 하니 다른 좋은 물건이 없으려나....”

“...황후! 그 말은, 짐이 이긴다면 사흘간 짐이 하는 말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겠다는 뜻이오?"

"어머나? 폐하께서 애피타이저가 나오기도 전에 디저트를 드시는 취향인 줄은 몰랐는데 말입니다."

“...라며 두 분께선 여느 때와 같이 화목하게 지내고 계십니다. 아, 도로테아에게 안부를 전해달라는 황후마마의 전언이 있었습니다.”

“그래요? 그것참 재밌는 일이네요. 레이디 엘리자베스라면 저의 중요한 고객이기도 하니.... 흐음. 황실에서 일어나는 일을 외부자가 관여하긴 어렵겠고, 대신 상품을 내걸까요?"

“...라고 점장님께서 굉장히 즐거워하시던 것 있죠? 언니들은 어떻게 생각해요?"

엘리의 말에 막 바느질을 시작하려던 수석 재봉사들이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황태자가 이길 것이라는 데 절반, 미미르가 이길 것이라는 데 절반. 그리고 두어 명 정도가 의외로 페리안 공자가 상상도 못 할 선물을 가져올지도 모른다며 소곤거렸다.

* * *

소문의 당사자인 엘리자베스 또한 펜 끝을 잘근잘근 씹으며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역시 가족이니까... 초대해야겠지...?'

벌써 몇 번이나 초대장 리스트를 적었다 고치길 반복했다.

두 번째, 세 번째로 초대해야 할 사람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정작 첫 번째, 가장 중요한 손님이 되어야 할 가문을 두고 엘리자베스는 펜 끝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고뇌하고 갈등했다.

하나뿐인 딸의 다신 없을 열여덟 번째 생일이었다. 근 십 년 가까이 황실에서 열리는 어떤 행사에도 초대받지 못했던 것으로 벌은 이미 충분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들을 초대한다면....

엘리자베스의 눈앞으로 황후마마 앞에서 기고만장하게 구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이 순간 스쳐 지나갔다.

초대하지 않는다면?

책상 위로 이마를 대며 엘리자베스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루트비히, 겨우 얼굴만 한 번 봤던 그 아이가 신경 쓰였다.

'그 아이만은 지켜 주고 싶어.'

결국 한참을 고민하던 엘리자베스는 결의에 찬 표정으로 초대장 배포 리스트에 어떤 '이름'하나를 적어 넣었다.

엘리자베스가 직접 적은 리스트를 검토하던 황제는 가장 윗줄에 적힌 이름을 보며 눈썹을 들어 올렸다.

“왜 그러시나요?”

황제는 아무 말 없이 황후에게 리스트를 넘겨주며 마른세수를 반복했다.

“어머나....”

황후 또한 작게 입을 벌리고 눈만 깜빡였다.

[루트비히 모르트 폰 엘리시움]

"아무래도 준비를 단단히 해야겠군요...."

황제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황후의 무릎을 베고 드러누워 황후의 손만 만지작거리며 울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젠 짐도 잘 모르겠습니다, 황후. 그 아이와 레온 녀석을 태중 혼약으로 맺어 준 일이 잘한 일인지....”

“지금 그 두 아이가 어울리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누구라도 알 수 있을 겁니다. 폐하의 뜻은 틀리지 않았어요."

“...정말로?”

황후는 황제의 머리칼을 손으로 살살 쓸어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는 어리광을 부리듯 그녀의 허리를 꼭 끌어안으며 중얼거렸다.

“...황제 자리 따위, 빨리 녀석에게 넘겨주고 멀리 여행이나 가고 싶군. 내 사랑과, 우리 막내 황녀님과 함께 말이야. 황궁은 아이가 자라는 데 별로 좋은 환경이 못 돼.”

황후는 공감의 의미로 쓴웃음만 지었다.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던 황제는 황후와 시선을 마주했다.

“녀석에게 얌전히 왕관을 넘기자니 뭔가 아쉬운데....”

“못된 생각은 하지 마셔요.”

“짐이 무슨 생각을 했다고.”

조금 전까지 울적했던 표정 대신 얼굴 가득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지으며 황제는 즐거운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레온하르트는 식물도감을 열 권쯤 쌓아 놓고 읽고 있었다. 황실 정원을 관리하는 정원사도 셋 정도 불려 왔다.

그러나 이런 겨울에 꽃반지를 만드는데 적합한 꽃은 봄의 여왕을 불러오지 않는 이상 여간 구하기 힘든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황태자였고, 원한다면 봄의 여왕은 물론 여름의 왕 또한 부를 수 있었다.

“제비꽃과 물망초와 은방울꽃과... 음... 또 무슨 꽃이 좋을까....”

그가 고민하고 있던 건 '어떻게 하면 이 한겨울에 꽃을 구할까.' 따위가 아니었다.

'어떤 꽃으로 반지를 만들어 선물하면 리지가 기뻐할까.'

황태자의 말 한마디에 불려 온 온실 전담 정원사들은 서로 시선을 교환하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푸른 장미는 역시 어렵겠지?"

하얀 백합을 줄기를 잘라다 푸른 잉크를 탄 물에 며칠 넣어 두면 푸르스름한 백합이 완성된다. 그런 식으로 물들인다면 푸른 장미를 만드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황태자 전하께서 원하는 푸른 장미는 고작 그런 식으로 만든 가짜 장미는 절대 아닐 터였다. 무엇보다 오랜시간 물이 아닌 색소를 빨아들인 꽃에선 특유의 싱싱함도, 싱그러운 향기도 느낄 수 없다.

차라리 보석 공예가를 불러다 사파이어를 조각하게 하는 건 어떨까요.

정원사는 목구멍 근처까지 올라온 말을 꾹 참아 내며 자신이 아는 꽃 중 푸른 장미만큼이나 귀한 것이 무엇이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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