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2)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엘리자베스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투로 온실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미 시종을 통해 소식을 들은 영애들은 얼굴 가득 걱정 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런 자리는 처음이라 너무 긴장했나 봅니다. 즐거운 이야기들 나누고 계셨나요?"
“신경 써 주신 덕분에 모처럼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어쩐지 저희가 내려놓은 긴장감을 영애께서 부담 하신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정말 괜찮으신지요?”
“레이디 베아트리체, 저는 괜찮아요. 정작 저는 차 한 잔을 마신 게 다인데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되어 버렸네요. 실은 그게 조금 아쉬워서 다음에도 이런 자리를 마련할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다들 와 주실 거죠?"
자리에 있는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자베스는 환하게 웃었다.
“그럼 황제 폐하의 폐회사를 들으러 갈까요? 아, 영애들을 위해 준비한 선물이 있으니 잊지 말고 챙겨 가세요.”
선물? 베아트리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엘리자베스를 따라 온실을 나가려는데 시종이 그녀를 향해 두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따라 하라는 건가? 베아트리체를 비롯한 다른 영애들이 조심스럽게 두 손을 모아 앞으로 내밀었다.
“씨앗... 이군요.”
이런 선물은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까, 베아트리체는 얼떨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떤 꽃이 필지 궁금하지요?"
영애들의 시선이 엘리자베스의 입으로 몰렸다. 엘리자베스는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비밀이랍니다!”
“레, 레이디 엘리자베스?"
“부디 다음에 만날 때 어떤 꽃이 피었는지 알려 주시길 바라요. 이러다 정말 폐회사가 끝날 때 도착하겠군요, 어서 가죠!”
정말 속을 짐작할 수 없는 분이다. 베아트리체는 고개를 내저으며 손바닥 위의 작고 동그란 것을 내려다보았다.
티파티 이후 엘리자베스는 사격장에 틀어박혀 있었다. 처음 그 소식을 들은 레온하르트는 생각 정리에는 사격도 제법 효과적이라며 납득했다.
그러나 그녀가 사격장에 살다시피 한 지도 어느덧 일주일이 지났다. 황태자의 약혼녀께서 식사조차 걸러 가며 그곳에만 계신다는 말에 결국 레온하르트는 사격장으로 향했다.
탕, 탕-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진지한 얼굴로 엘리자베스는 방아쇠를 당기고 있었다.
그러나 백 걸음쯤 떨어진 곳에 있는 바늘구멍도 맞출 수 있을 것 같은 표정과 달리 과녁엔 아무런 자국도 없었다.
대신 총알이 날아가 박힌 곳은 과녁에서 두 뼘쯤 떨어진 벽이었다. 조금 더 가까이에서 보니 벽 가득 빗맞은 자국이 가득했다.
"리지?"
레온하르트의 목소리에 엘리자베스는 총을 내려놓았다.
“레... 레온....”
“내가 알던 그 명사수는 어디로 갔지?”
“그건....”
레온하르트는 웃으며 엘리자베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처음 그녀가 사격을 배웠을 때처럼 그녀를 끌어안았다.
엘리자베스는 얌전히 그의 품에 안겨, 아니. 반쯤 기대 있었다. 레온하르트와 겹쳐진 손이 다시 총을 잡고 방아쇠 위로 손가락을 걸쳤다.
그러나 함께 총을 쏠 거란 엘리자베스의 예상과 달리 레온하르트는 그렇게 엘리자베스가 과녁을 조준하는 것을 확인하자 뒤로 훌쩍 물러섰다.
엘리자베스는 의아한 표정으로 레온하르트를 흘끗 쳐다보고 다시 과녁에 집중했다.
탕-
명중이었다. 마지막 남은 탄환까지 전부 과녁 위로 쏟아 낸 엘리자베스가 어딘지 홀가분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어떻게 할 거야?"
“뭘?"
엘리시움 가문. 엘리자베스의 말에 레온하르트는 복잡한 표정으로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법대로 처리할까?"
"할 거면... 차라리 내가 황후가 되기 전에.”
“그러면 네가 황태자비가 되는 일도 없던 걸로 되어 버리는데?"
“으음....”
레온하르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엘리자베스가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 예의 남동생이 걱정되는 것이겠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레온하르트는 얼굴도 모르는 엘리시움의 소공자를 향해 이를 갈았다. 그러나 이내 '아들이 아니었다면 딸이 태어 났을 것이고, 딸이라면....’까지 생각하곤 고개를 내저었다.
“...차라리 우리가 키울까?"
“그거, 스스로도 말이 안 된다는 거 알지?"
"응...."
엘리자베스는 순간 차라리 그와 그녀가 평범한 귀족 가문이었으면 좋았을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말 그녀가, 그리고 레온하르트가 평범한 귀족 가문이었다면 아직까지 약혼 관계를 유지하고 있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황실이기에, 그리고 공작가이기에 아슬아슬하게 유지되고 있는 약혼 관계였다.
“잘 들어, 리지.”
"응?"
“나는 너를 무조건 행복하게 만들어 줄 거야. 그리고 그 일에 방해가 된다면, 그게 설령 신이라 한들 용서하지 않기로 했어.”
"레온하르트!"
엘리자베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나 레온하르트는 그녀의 손을 맞잡고 덤덤하면서도 더없이 진지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네 가족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리지, 내가 지금까지 너에게 알려 준 게 뭐였지?"
엘리자베스는 잠시 고뇌한 뒤에야 대답했다.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고 행동하는 방법....”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시움 가문에 대한 일은 모두 너에게 맡기기로 했어.”
“정말?"
엘리자베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러나 언제 그랬냐는 듯 순식간에 다시 수심 깊은 표정으로 돌아온다.
"그러니 잘 생각해 봐.”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숙제네....”
사격을 하는 동안 잠시 잊고 있었던 피로가 한 순간에 몰려왔다.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푹 숙이며 잔뜩 지친 목소리로 조소했다. 시야 속으로 뼈마디가 굵은 손이 들어왔다. 손의 주인은 고개를 들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밥은 제대로 먹고 있어?"
“밥? 아... 뭐, 그럭저럭.”
라고 대강 대답하는 순간 엘리자베스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엘리자베스는 더욱 깊숙이 고개를 숙였고 레온하르트는 나지막이 웃으며 그녀의 손을 쥐고 이끌었다.
“밥 먹으러 가자.”
"어어, 어디로?”
“제도. 마침 보여 줄 게 있어."
지난번 시찰을 나올 때보다 조금 더 두꺼운 옷을 입고 두 사람은 황궁 밖으로 나섰다.
가장 먼저 레온하르트는 예의 카페에 들렸다. 그날도 아침부터 주문을 받고 있던 점원은 어디서 본 적 있는 인상의 손님이 유난히 기억에 남아 있던 것을 주문하자 엘리자베스의 안색을 살피더니 메모 한 줄을 덧붙였다.
[달게, 무조건 달게! 커피에 시럽을 타지 말고 시럽에 커피를 타는 느낌으로!]
“...이게 이렇게 달았나?"
“어른이 되면서 입맛도 바뀐 모양이지. 추운데 정말 안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괜찮겠어?"
“으응... 찬 바람도 가끔은 나쁘지 않은 것 같아.”
커피가 이렇게 끈적거리는 음료였나? 엘리자베스는 혹시 시럽이 덜 섞인 건 아닐까 하는 심정으로 긴 은수저를 들어 잔을 휘휘 저었다. 수저 끝에 꿀처럼 굳어진 시럽이 진득하게 묻어 나왔다.
레온하르트가 엘리자베스를 데리고 향한 곳은 학교였다.
“직업... 학교?"
“여자아이들을 위한.”
레온하르트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그를 빤히 쳐다봤다.
"화, 황태자 전하. 기별도 없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찾아오시다니....”
설명은 관계자에게 듣는 쪽이 더 빠를 거라며 레온하르트는 그녀를 교장실로 안내했다.
학교의 교장이라는 귀부인은 황태자와 레이디 엘리자베스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당황했으나 이내 침착하게 학교를 소개하기 시작했다.
“직업 학교라고 해서 특별한 점은 딱히 없습니다. 가르치는 과목과 커리큘럼은 법으로 정해진 그대로죠. 차이점이라고 해도 수업이 끝난 뒤 그대로 하교하는 대신 실습이 이어진다는 점 정도일까요. 아, 학생들은 물론 교사들도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전원 여성이라는 점도 특징이라면 특징이겠군요."
“교사들도요...?"
“저와 뜻이 맞는 친구들이 자청해 준 덕분입니다. 아직은 제도 몇몇 곳에만 있지만 이곳을 졸업한 학생들 중에 그 뒤를 이을 사람도 분명 있겠지요. 적어도 저는 그렇게 믿고 있답니다."
“여자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일에 대해 부모들의 반발은 심하지 않았는가? 처음 학교를 세울 때도 그렇고, 아직까지... 그렇지. '학교에 갈 시간이 있다면 그 시간에 여물이나 주고 와!'라는 구시대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들이 있진 않았고?"
처음 듣는 이야기에 엘리자베스의 눈이 다시 휘둥그레졌다. 교장 선생인 마담 헬렌은 전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졸업생은 학교에서 책임지고 일할 곳을 찾아 줄 예정입니다. 물론 의욕이 전혀 없는 학생이라면 곤란하지만... 적어도 아직까지 그런 학생은 없는 듯합니다.”
"그 말은, 학교에 다니면 기술도 배우고 그대로 일자리도 구할 수 있다?"
“그리고 적어도 한 끼는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 있다. 어쩌면 마지막 말에 부모들이 학생들을 이곳에 보낸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설령 학교에서 점심으로 주는 빵과 우유만을 노리고 학교에 온다 한들 어쨌든 여자아이들이 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글을 배우고, 셈하는 법을 배우고 있지요. 그거면 된겁니다.”
마담 헬렌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깊은 감명을 받은 모양이었다. 레온하르트 또한 이야기만 들은 것보다 만족스러운 결과에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학교 내부를 안내하겠다는 마담 헬렌의 말을 학생들의 공부를 방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거절하며 두 사람은 다시 제도 광장으로 향했다.
"네가 만든 거야.”
그와 팔짱을 끼고 묵묵히 걷고 있던 엘리자베스가 시선을 돌리는 것이 느껴졌다.
“리지, 나는 이 제국을 지배하는 황제가 될 거야. 그리고 너는 그런 황제의 곁에 함께할 단 하나뿐인 황후가 될 거고.”
“그렇... 그럴 수 있겠지?"
그럴 수 있겠지는 무슨, 무슨 일이 있어도 그렇게 만들 건데. 레온하르트는 속으로 입을 삐죽였다.
"그러니 숙제 힘내. 아, 그러고 보니 이제 곧 겨울이고... 네 생일도 얼마 남지 않았네. 음, 그... 혹시 받고 싶은 선물... 같은 거 있어?"
레온하르트는 회색 구름으로 가득한 하늘을 노려봤다. 엘리자베스는 그의 귓불이 붉어진 것을 알고 쿡쿡 웃었다. 선물, 선물이라....
“뭐... 성인이 되는 해니 다른 사람들도 이것저것 해 주겠지만.... 아니, 너무 이것저것 해 주니까 오히려 겹칠까 봐, 그, 몰래 선물해 주거나 깜짝 선물이라거나 생각을 안 한 건 아닌데 그래도 역시 성인이 되는 해잖아? 네가 원하는 걸 주고 싶어서.”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레온하르트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눈동자만 굴려 엘리자베스의 눈치를 살폈다.
엘리자베스는 손가락 끝을 입술에 대고 고민에 빠져 있었다.
한참 뒤에야 엘리자베스가 입을 열었다.
"반지.”
“반지?"
말만 해, 다이아몬드를 통째로 깎아 만든 반지? 아니면 열 손가락 전부 채워 줄까? 미미르의 힘을 빌리면 정말 별 조각을 네 손에 끼워 줄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러나 엘리자베스가 원하는 반지는 황금과 보석보다 소박하고 별보다 희귀한 반지였다.
“...꽃반지를 달라고?"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레온하르트는 황당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리지, 네 생일이 겨울인 건 알고 하는 말이지?"
이번에도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레온하르트는 정말로 미미르를 찾아가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불안한 예감을 느꼈다.